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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이야기

평촌0505 2022. 10. 30. 08:03

누구에게나 삶은 하나의 독특한 이야기다. 나는 『토지』의 작가로 박경리를 기억하지만, 삶의 내력은 잘 모른다. 최근 우연히 『박경리 이야기』(2022, 김형국)를 읽었다. 두터운 책을 그냥 내 나름 관심이 가는 대목 중심으로 듬성듬성 보았다. 나는 작가로서 박경리 삶의 속내와 죽음에 대한 태도가 궁금했다. 박경리(1926-2008)는 통영출신으로 본명은 금이(今伊)다.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4년제 진주여고 전신)를 1945년 봄에 졸업하고, 김행도(1922-1950)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딸 김영주가 태어났다.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제1회로 졸업해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곧장 서울로 귀환했다. 9.28수복 직후 남편은 인천에서 부역자로 낙인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4후퇴 즈음 남편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죽은 날짜를 점괘로 받아보니 12월 25일 이었단다. 1955년 <현대문학> 8월호에 단편 <계산>이 추천되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추천자 김동리가 박경리(朴景利)라는 필명을 붙여주었다. 사람에게는 ‘일이 곧 생명’이랬다. 인간 금이의 정체성은 작가 박경리로 집약되기 시작했다. 작가로 등단한 후 10년 만에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1965)을 수상했다.

 

대하소설 『토지』1부를 1969년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해서 1972년 9월에 끝냈다. 집필 중(1971.08)에 유방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토지』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박경리는 1956년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충격에 시달리다가 누군가의 권유에 따라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후에(2003, <다시 Q씨에게>에서) 작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45년 전,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인데, 나는 아이 하나를 잃었습니다. 나는 종로 4가를 돌아서 창경원 맞은편, 아이를 안치했던 병원의 영안실이 보이는 그 길을 애써 지나다녔습니다. 잊지 못하여, 아니 잊지 않기 위하여, 가슴의 대못이 보다 깊이 박히기를 원하면서, 그러나 허망하게도 더러는 잊게 되더군요. …(중략) 문득 생각이 날 때는 잊고 사는 내 자신이 짐승같이 느껴졌습니다(김형국, 2022, pp.250-251).

 

그로부터 박경리는 애연가가 되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말년에는 폐암을 앓기까지 했다. 폐암으로 사경을 헤맬 수밖에 없었던 그는 입원한 큰 병원 병실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하나 저질렀다. 자기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운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짓을 박경리는 감히 해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작가 박경리를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면모를 보게 된다.

 

1973년 4월에는 외동딸 김영주가 시인 김지하와 결혼식을 올렸다. 지하의 첫 아들이자 작가의 손주 원보가 1974년 4월에 태어났다. 하지만 아비는 수감 중이었다. 박경리 당신은 그 핏줄을 꼭 ‘손주’라 불렀다. ‘주인 같은 손자’란 뜻인데, 이 말은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만고의 진리와 통한다고 했다. 당연히 손주 이야기가 나오면 작가의 얼굴엔 그 당장에 사랑과 신명의 기색이 넘쳐흘렀단다. 태어났을 때 시인 아비는 ‘부재중’이었기에 말하자면 ‘생전’ 유복자였던 게다. 그런 연민이 쌓여 “원보가 시험을 친다고 신경 썼더니 잇몸이 부었어!”라는 그런 할머니였다.

 

작가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집필에 무려 반세기 세월을 쏟아 부었다. <현대문학>1969년 9월호로 시작해서 <문화일보> 1994년 8월 30일자로 연재를 끝냈다. 햇수로 26년의 대장정 끝에 일궈낸 ‘대장경’(大藏經)으로 평가된다. 5부 구성으로 200자 원고지 약 3만 장에 이른다. 원고지 100장 묶음이 1.5cm 두께인데 3만 장이면 4.5m, 아파트 1층 반 높이에 해당된다. 나는 작가의 『토지』2부까지를 읽고 그만 두었다. 뒤편으로 갈수록 이야기 전개가 좀 지루했다. 본래 나는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박경리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할 때 “내가 행복했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 작가는 <일 잘하는 사내>라는 시에서 “다시 태어나면/무엇이 되고 싶은가/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후략) 이런 작가의 대답에 여고생들은 무척 애처로워했단다. 박경리는 후배 작가들에게 사람 일생에서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이 중요하지, “목숨을 걸 듯 문학에 매달릴 것까지는 없다”는 식으로 일러주기도 했다.

 

김형국(2022)은 “문학이 당신에게는 성장동기의 대상이기보다는 결핍동기가 그 출발점”이랬다. “당신의 신상에서 만났던 불운과 불행을 문학으로 초극하려 했던 점에서 결핍동기의 실현이었던 것. 현실의 가혹함에서 벗어나 저 피안으로 가려는데 그 길이 글이고, 문학”이었다는 게다. 그는 결핍동기설은 박경리의 문학론에선 ‘포한’(抱恨)이란 말로 태어났다고 했다. 복수의 뜻이 강한 ‘원한’과는 달리 ‘포한’은 꺽임‧뺏김‧모자람 등에 주저앉지 않고 그걸 반전시키려는 삶의 자세다. 이를테면 “내가 공부 못 한 게 포한이 져서 내 새끼는 죽어라고 공부 시킬란다!”가 예로부터 우리네 기층 민초들의 보편적 정서였다.

 

통영 출신 박경리는 1980년 초여름부터 원주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서울 정릉 집에 보일러가 동파되고 반년 정도 지난 뒤였다. 원주 집은 치악산이 멀리 보이는 입지다. “원주로 이사하던 날 작가는 마치 새장을 벗어나는 새처럼 기대에 가득 차고 자유롭게” 보였다고 했다. 원주로 이사한 그해 말에 사위 김지하가 풀려났다. 이듬해 둘째 손주(김세희)가 태어났다. 작가에게는 딸을 결혼 시키고 7년 만에 맞은 평화였다. 원주에서 작가의 일상을 김형국은 이렇게 적고 있다.

 

어쨌거나 그녀는 쉴 사이 없이 뭣인가를 했는데 글을 쓰는 일이야 본업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글 쓰는 사이사이 잔디의 잡초를 뽑는다든지 채소와 잔디에 물을 주는 일이라든가, 연탄재로 밭 가장자리 사람 다니는데다가 깨트려서 다져 놓는다든가, 쓰레기를 모아서 태운다든지 풀 뽑은 것을 모아 음식찌꺼기와 같이 ‘퇴비’를 만든다든지 해서 이 집안에서는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이 그다지 없을 정도였다(p.387).

 

원주에서 작가의 바뀐 일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박경리는 “문학보다 사람 생명이, 글쓰기보다 피붙이의 안온이 더 소중하다”고 했다. 그래도 문학은 작가인 당신에겐 바로 생명줄이었다. 박경리는 회고하기를 “작가생활 40년 가까이 되지만 후반기 20년 동안 나는 거의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여러 가지 그것(원주 이사)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첫째는 자투리가 아닌 두루마리 같은 시간을 갖고 싶었고, 『토지』라는 방대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데 그것은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박경리, 2007)”고 했다.

 

박경리의 연세대 원주캠퍼스 출강은 작가를 실질적으로 원주사람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원주에서 출입을 삼가던 작가는 “그동안 사람을 키운다는 마음여유가 없었는데 늙어가기 때문인지 후학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어렵사리 만나는 땅은 작가가 생겨날 토양이 아니다. 이에 견주어 원주는 자연이 아직 넉넉하다. 과연 학생들을 만나보니 장차 작가로 자랄 만한 싹이 한둘 금방 느낌이 오더라.”(p.391)고 했다.

 

박경리는 후에 이화여대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1994)를 받기도 했지만, 작가의 대학 인연은 단연 연세대 쪽이었다. 연세대가 용재 백낙준(1895-1985) 초대총장을 기려 ‘용재학술상’에 이어 ‘용재석좌교수’제를 운영해 왔는데, 박경리는 1997년에 용재석좌 교수로 뽑혔다. 이 강좌에서 작가는 “삶은 모순 속에 존재하고 갈등 속에 만들어진다. 삶은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갈등이 있어 인생이 있고, 인생이 있기에 문학이 있다.”(p.392)고 했다.

 

‘그 사람에 그 책’이라는 말이 있듯 거꾸로 책의 무게에서 작가의 인간적 무게도 가늠된다. 박경리는 사람의 삶을 세 층위로 나누고 있다. 최상이 자기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한 삶이고, 그 다음이 삶 속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이상을 예술이라는 작업으로 재현하는 자, 맨 아래가 속물의 삶으로 ‘소설 속의 주인공을 모방하는 인생’이라 했다(박경리,1995). 작가 자신을 포함해 소설가는 기껏해야 중간부류에 속한다지만 독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저자는 “자신의 굴곡진 삶이 바로 문학으로 녹아들었고, 그것이 수많은 독자의 공감으로 이어진 박경리의 경우는 중간 층위가 아닌 최상위의 삶이 분명했다.”고 했다.

 

사람에 대해 비교적 까다롭던 박경리에게 소설가 최일남은 드물게 허물없던 사이였다. 대담에서 최일남은 “선생님을 그동안 지탱해온 힘은 무엇이었습니까?”고 물었다. 박경리는 서슴없이 “그건 핏줄이지요. 딸과 손자. 그들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이 나를 버티게 했습니다.”고 했다. 여류문인 박경리와 박완서는 ‘드센 팔자끼리’ 서로 닮은꼴이다. 박완서는 1988년 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외동아들이 갑자기 과로사하는 불상사를 당했다. 그로부터 그 누구도 만나지 않던 박완서는 저자의 권유로 원주로 갔다. 두 작가는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써야 돼. 글로 써야만 이길 수 있어”라고 박경리는 후배 박완서의 등을 두드리며 절규했단다. 마침내 박완서는 글쓰기의 힘으로 다시 일어섰다.

박완서는 박경리에 대해 “글과 생활이 저렇게 함께 되는 본보기를 후학에게 보여주기는 참으로 어려운 법인데 그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해내고 있다.”고 했다. 박경리의 영결식에 바친 조사에서 박완서는 이렇게 적었다.

 

필생의 업적이신 『토지』에는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인간 군상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박제로 만들어 모자이크한 게 아니라 생생히 살아 움직이도록 한 것이 시류의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모든 생물들을 품은 것과 같습니다. 작은 나라에 그 큰 강이 존재하는 건 문학이니 가능한 축복입니다. 두고두고 그 큰 강에서 목도 축이고 양분도 취하면서 자랄 테니 천상에서 지켜봐 주십시오(박완서, 2010).

 

노년에 작가의 병 타령은 다음의 서사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다/ 약도 죽으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 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 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 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산다는 것>)

 

해방둥이인 지금의 내 건강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는 작가의 소회는 내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내게 청춘은 따분하고 잔인한 것이었다. 박경리는 “늙어서 이리 편안하고,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더니 2008년 5월 5일 마침내 육신의 헌옷을 벗고 이 세상을 떠났다. 당신의 시 <내 모습>은 “내세에는/ 꽃으로 태어날까/ 나비로 태어날까”로 끝맺는다. 하관 직후 나비축제가 열리는 전남 함평에서 보내온 나비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