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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을 다녀와서

평촌0505 2012. 2. 10. 11:16

 

사이판(Saipan)을 다녀와서

 

  박사과정에서 공부한 제자들과 함께 정년을 앞두고 사이판 여행을 다녀왔다. 나로서는 평생 처음으로 제자들 가족과 함께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여행 준비와 기획은 제자들이 하였지만 ‘사이판’으로 선택은 내가 했다. 기왕에 제자들과 함께하는 여행을 통해 이영식(李永植; 1894-1981) 목사님과 이태영(李泰榮; 1929-1995) 총장님의 족적(足跡)을 답사하는 의미도 담겨져 있었다. 특히, 이영식 목사님은 사이판에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끌려가 강제 노역한 조선인들의 유골 봉환과 그 추모 사업을 위해 활동하시던 중에 그곳에서 갑자기 타계하셨다. 또, 이태영 총장님은 생전에 사이판이나 괌 쪽에 특수학교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사이판은 우리 대구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정(舊正)을 쇠고 1월 26일 아침 9시 사이판행 아시아나에 탑승하기 위해 대구서 출발하는 팀들은 새벽 2시 반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야 했다. 밤 10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곤히 잠든 손녀 지현(志炫)이를 깨워 동대구 고속 터미널에서 서영란 선생 가족 모두, 김성곤 선생 가족 일행, 권순우 교수 등 모두 13명이 함께 만나 출발했다. 아침 6시 반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강창욱 교수 내외, 윤병천 교수 내외, 김경진 교수 가족일행과 조우하여 탑승 수속을 하였다. 모두 21명에 일곱 가정인데 권순우 교수만 부인이 직장에서 빠져 나오기가 어려워 혼자 참석했다. 부인 혹은 남편도 대부분 대구대 동문들이어서 낮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특히 이번 여행에 김경진 교수, 서영란 선생, 김성곤 선생 가족은 전원이 참석하여 보기에 좋았다. 강창욱 교수 부인 황미애 선생은 참 오랜만에 만나 세월의 흐름이 절로 느껴졌다.

 

  오후 2시 반경 사이판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치고 피에스타(Fiesta)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로 유적지 관광 길에 올랐다. 겨울이지만 우리나라 여름날처럼 덥게 느껴졌다. 사이판은 제주도의 9분의 1정도인 작은 섬이다. 2차 대전 때는 일본이 점령한 요충 지대였지만, 지금은 미국영토로 귀속되었다. 섬 전체 여기저기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고, 특히 한국인 위령탑 앞에서 함께 묵념의 예를 올리고, 위령탑 건립사업에 참여한 이영식, 이태영, 원영조 등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것을 확인하였다. 이영식 목사님은 내가 Gallaudet 대학에 객원연구교수로 있을 적에 이곳서 소천하셨기에 더욱 감회가 깊었다. 생전에 목사님의 인자한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녁 식사는 호텔에서 가든파티 겸 음악을 곁들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전통 춤과 가요를 감상하였다. 식사 후에 집사람과 지현이가 몹시 피곤해 하여 방에 들어와 금방 곤히 잠들었다. 아침 일찍 잠이 깨어 바닷가에 혼자 산책을 나갔더니 바닷물도 너무 맑고 모래도 퍽 부드러워 발에 닿는 촉감이 좋았다. 문명의 세계에서 자연의 품으로 편안히 안기는 기분이었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제 겨우 천지인(天地人)의 합일이 무엇인지 조금 깨달아지는 듯하다. 늦었지만 그 깨달음은 내게 퍽이나 소중하다. 그래서 인지 사이판의 바다, 나무, 새소리, 바람소리 모두가 정겨워지고 밤하늘의 별과 초승달이 참 보기에 좋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한 것은 이동 시간이 10분을 넘기지 않고 계속 한 호텔에 머물면서 여유롭게 자유로운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케쥴에 쫒기는 여행은 내 돈 들이고도 잔뜩 피곤함을 안고 돌아 오기 십상이다. 내가 보기에 사이판 해변의 바닷물은 현해(玄海)가 아니라 옥색의 호수와 같았다. 바닷물이 이처럼 맑고 고운 빛깔을 내는 걸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사이판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는 ‘마나가하’섬을 오가면서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바다 색깔은 신비롭기만 했다. 천혜의 신비로 가득한 이 섬에 아직도 녹슨 대포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확인하게 된다. 제국주의는 어이없게도 천혜의 절벽마저 천황을 향한 만세절벽으로 둔갑 시킨다. 문명과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으로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지 못하게 가로 막는 것은 모두가 죄악이다.

 

  호텔 창가에서 내려다 뵈는 정원의 숲과 꽃나무 그리고 그 넘어 보이는 바다 풍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그 위로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면서 진정 ‘공’(空)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시연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인지 창가에 앉아 『반야심경』을 펼쳐드니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글귀가 어느 때보다 친숙하게 느껴진다. 내친김에 수영장 벤치에서 혹은 정원 꽃나무가 있는 벤치에서도 편안하게 『반야심경』을 들 수 있었다. 하기야 뗏목의 비유처럼, 경에 적힌 법문마저도 피안의 세계로 건너기 위한 방편(方便)에 불과한 것이 아니던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갓데갓데 파라갓데 파라삼갓데(가세 가세 피안의 세계로, 완전한 피안의 세계로) 사이판의 햇살과 맑은 바다는 마침내 우리의 영혼을 이렇게 깨워준다. 날이 추우니 사이판 해변이 더욱 그립다. 김병하(2012.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