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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수교육 편력

평촌0505 2012. 4. 21. 11:45

 

나의 특수교육 편력(遍歷)

 

1】내가 대구대 특수교육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65년이었다. 주지하는 것처럼 대구대 특수교육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1961년)로 설치되었다. 특수교육과 설치와 더불어 오늘의 대구대 전신인 한국사회사업대학이 정규 4년제 대학으로 출범하였다. 그러니까 특수교육은 바로 오늘 날의 대구대 모태(母胎)다. 그러나 대구대 특수교육과는 5.16 군사정부의 대학정비령에 의해 2년제 초급대학으로 격하되는 불운을 겪었고, 1964년에 4년제 대학으로 다시 복권되었다. 그래서 내가 65년에 특별전형으로 들어와서 보니 선배는 2학년뿐이고 3,4학년이 없었다.

 

  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은 4년제로 복권되면서 특수교육과 외에 사회복지과와 산업복지과를 신설하여 한 학년 정원이 모두 60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교양과정은 전 학년이 한 강의실에서 함께 수강하였다. 따라서 학생과 교수 간에도 그렇고 학생들 간에도 하나의 가족처럼 ‘교육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특수교육에 입문하게 되었고, 청년기의 속앓이가 아물어 가면서 다시 제 정신을 찾아 가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활에서 나름대로 제미를 붙인 것은 대학신문사(당시는 학보사)와 인연을 맺은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학보제작을 통해 남의 글을 꼼꼼히 읽고 교정보는 것, 또 내가 쓴 글이 활자화 되는 경험을 통해 나는 글쓰기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후에 내가 교수 노릇하는 데에도 적잖이 도움 되었다.

 

  내가 특수교육과에서 공부 할 때에 안태윤(安泰潤; 2011년에 고인이 됨) 교수가 학과장을 맡아 초창기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김정권(金正權) 교수는 1964년에 부임하여 주로 교직과목 쪽을 많이 맡았으나 후에 정신지체 쪽 강의를 개발하였다. 당시 이태영(李泰榮; 1929-1995) 학장은 대학 행정 책임을 맡아 바쁜 중에도 ‘특수교육개론’과 ‘특수교육행정’을 직접 강의하였다. 이태영 학장은 『특수교육개론』(1963)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저술하였고, 우리는 저자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서석달(徐錫達) 교수는 원서강독을 주로 했고, 후에 언어장애 쪽 강의를 개발하였다. 서석달 교수는 당시 사회복지과 장훈(張壎) 교수와 함께 수학여행(1968년 5월) 인솔교수로 함께 갔었는데, 제주도에서 폭풍을 만나 제때에 오지 못하고 돈 보내달라고 대학에 황급히 전화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리고 여행 중에는 우리들과 격의 없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시곤 했다. (사진1. 특수교육과 졸업 사진)

 

  1969년 2월에 나는 특수교육과를 졸업하고 그 해 3월에 경북대학교에 교육대학원이 새로 신설되어 교육철학전공을 수료하였다. 1971년에는 모교에서 임시교원양성소 강의를 처음 맡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 해 가을에는 이태영 학장의 특별한 배려로 약 한 달 간 일본에 특수교육과 장애인복지 분야 단기연수를 다녀왔다. 그 때만 해도 일본과 우리나라의 특수교육 격차는 하늘과 땅처럼 느껴질 때였다. 1972년 3월에는 대학부설 특수학교인 대구영화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그 해 9월부터 재단발령으로 특수교육과 전임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보다 빨리 영화학교에서 대학으로 옮기게 된 것은 당시에 안태윤 교수께서 경북대로 가셨기 때문이다. 그 때만 해도 대학재정이 어려워 나는 주당 10시간 강사료 기준으로 6개월간 월 3만원의 급료를 받았다. 그러다가 이듬해 3월에 문교부로부터 정식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는데, 그 때 시각장애전공 쪽 교수로 권기덕(權奇德) 교수와 함께 임용되었다. 당시 첫 월급을 받아보니 5만 6천원 정도였는데, 이만하면 살겠다 싶어 그 해 4월에 결혼해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혼여행 다녀와서 학장실에 인사하러 갔더니 이태영 학장이 최재원 부학장과 뭘 협의하다가 내게 “이제 고생 줄에 접어들었다”면서 싱긋 웃으셨는데, 그 말과 표정이 지금도 뇌리에 선하다. 삶은 고(苦)이지만 웃으면서 사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알고 여기까지 왔다.

 

  당시에는 대학 전체 전임교수가 10명 남짓이어서 교수회의도 그냥 학장실에 둘러앉아서 할 정도였다. 그 때 안병즙(安秉輯) 교수는 대구보건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특수교육과 교수로 소속되어 주로 지체부자유교육 쪽과 특수교육개론 강의를 맡았다. 이상춘(李相春) 교수도 대구보명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처음(1970)에는 사회복지과 쪽이었으나, 특수교육과로 옮겨 장애인복지와 정신지체 쪽 강의를 맡았다. 원영조(元英祚) 교수는 대구영화학교 교장으로 계속 머물기를 원하면서 대학으로 옮기는 것을 개인적으로 극구 사양하시다가 다른 분에 비해 늦게(1975)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이규식(李奎植) 교수는 1968년부터 특수교육과 과학교육전공 교수로 화학 쪽 강의를 담당하였으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청각학(聽覺學)을 개발하여 대학 내에 일찍부터 청각언어장애 크리닉을 운영하였다. 그 때만해도 우리 대학 특수교육과에서 청각장애 쪽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으며, 현장에 특수학교(농학교) 수도 가장 많았다.

 

2】1975년에 나는 특수교육 전공주임을 맡아 1984년에 사범대학 학장으로 보직을 맡을 때까지 약 10년 동안 그 일을 맡아 왔다. 여기서 특수교육과 내에 사회교육전공과 과학교육전공과 더불어 특수교육전공이 별도로 개설된 경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대학 특수교육과가 1961년에 처음 설치되어 특수교사양성을 해오다가 1973년에 이화여대에서 추국희 교수가 주선하여 특수교육과가 설치되고, 같은 해에 단국대도 특수교육과를 설치하여 김승국 교수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 두 대학은 처음부터 ‘특수교육학과’ 성격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교사양성 기능도 함께 했다. 당시 우리 대학의 특수교육과는 교과전공 중심으로 운영하고 특수교육은 교직과정 비슷한 개념으로 운영해 왔다. 어쩌면 그게 옳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특수교육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대학의 ‘특수교육학’ 위상이 상대적으로 이화여대와 단국대에 비해 불리해질 수밖에 없어, 김정권 교수가 고심 끝에 내 놓은 안이 ‘특수교육전공’ 개설이었다. 당시에 김인환(金仁煥; 경제학과) 교수가 교무처장을 맡았는데, “특수교육과 속에 특수교육전공을 왜 개설해야 하느냐”라는 식으로 강하게 반대를 했다.

 

  처음에는 독립전공으로 바로 넣기가 곤란해서 내부적으로 어중간한 개념으로 1974년에 특수교육과 밑에 기존의 과학교육전공과 사생교육전공 외에 주간에 영어교육코스, 특수교육코스(20명)를 개설하고 야간에 수학교육코스, 국어교육코스를 각각 개설하였다. 그 무렵 지방대학 육성책에 힘입어 1975년에는 교과별 전공 입학정원이 120명에서 240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특수교육전공도 입학정원이 40명으로 늘어나면서 ‘코스’에서 ‘전공’으로 탈바꿈 했다. 이렇게 해서 특수교육전공주임을 내가 계속 맡았으며, 이해균(李海均) 교수도 이 무렵에 입학하였다.

 

  특수교육전공에서 나는 전공과목으로 청각장애교육, 특수교육사, 비교특수교육 등을 맡아 강의하였고, 교직과목으로 교육사(후에 ‘교육철학 및 역사’로 변경) 강의를 담당했다. 이 때 특수교육사 강의 자료를 보완․확충하여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1977)라는 책을 냈다. 이것이 교수로서 나의 첫 저술이 되어 후학들에게 비교적 많이 읽혀진 것 같다. 이보다 앞서 1975년에 처음으로 산학재단 학술연구비 지원으로 “한국특수교육 교사양성제도의 개선에 관한 연구”(1976)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때는 곤궁한 때여서 연구비 지원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연구보고서 제출로 모든 의무가 끝나기 때문에 요즘처럼 정산에 따른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어서 좋았다.

 

  70년대 중반 무렵 학생지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올라 갈 무렵에 다른 대학으로 편입이 자유로웠기에 우리 대학에서 다른 대학으로 빠져 나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대학 당국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중간과정에서 전공주임과 학과장 허가 날인을 받아야 교무과에서 인정해 준다고 했다. 그러니 학생들은 일차적으로 전공주임 혹은 학과장의 날인을 받아야 하고, 교수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학생들과 숨바꼭질을 해야 하는 그런 난처한 때가 있었다. 이로 인해 일부 학부형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원망을 사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지금생각하면 당시에는 교수나 학생 모두가 순진했던 것 같다. 요즘 같으면 그냥 접수하면 그만이지 그런 식으로 줄다리기를 하는 게 이상한 일이다.

 

  또 이 무렵에 특수교육전공 연례행사로 ‘임간학교’(林間學校) 라는 것을 개설하여 교수-학생이 함께 야외에서 2박 3일 정도 숙식을 함께하는 그런 기회를 가졌다. 이 임간학교 교장은 전공주임인 내가 맡아 했으며, 이태영 당시 학장이 직접 와서 특강을 해주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는 대학생활에서 특별한 추억으로 남는 행사였다. 첫 해 임간학교는 가야산 계곡에 텐트를 치고 했는데, 밤 세도록 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자기들끼리 소란을 피워 도무지 잠들 수가 없어서 젊은 혈기에 내가 나서서 몽둥이로 제압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임간학교에 참여한 학생들이 지금도 나를 보고 그 때 혼 줄이 났다고 웃으며 회고한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추억으로 평생 남아 있는 것이다. (사진2. 임간학교 관련)

 

  우리 대학에 대학원 특수교육학과 석사과정이 1973년에, 그리고 박사과정이 1975년에 국내에서 최초로 개설되었다. 1976년에는 나도 박사과정에 등록을 하여 이상춘, 안병즙, 권기덕 교수 등과 함께 소정의 코스웍을 밟았다. 당시 만해도 국내 박사과정이 흔치 않아 당해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도 박사과정 등록이 가능했다. 그렇게 가르치며 공부하던 중 1978년 3월부터 약 6개월 간 미국에 특수교육 연수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원래 이 연수 프로그램은 당시 이태영 학장께서 그간 고생한 교수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하여 1차로 1977년 2학기에는 이상춘, 안병즙, 이규식 교수가 다녀왔다. 그 다음에는 원영조 교수와 나랑 두 사람이 가게 되었는데, 원 교수께서는 그 때 학교 일이 많으셔서 몸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1978년 3월에 나 혼자 가기로 했다.

 

  결혼해서 처음 가정을 떠나 6개월가량 미국에 가서 연수생활을 하려니 맘이 설레기도 하고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미국 가기가 쉽지 않은 때여서 떠 날 때에 환송을 해주고 그랬다. 난생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하와이에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LA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당시 김순일 부학장께서 직접 마중을 나와 Pacific Christian College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실제로 강의를 듣고 도서관을 활용한 것은 캠퍼스가 서로 붙어 있는 California State University, Fullerton에서 했다. 그 때 대학과 대학원에서 모두 세과목을 신청해 수강하였는데, 강의 내용은 관련 자료를 통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지만 교수가 하는 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래도 내게는 미국 대학의 강의 풍경을 이해하는 데에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종강하고 교수 집에 초청 받아 식사하고 학생들과 수영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사진3. 78년 미국연수생활)

 

  그 곳에 있는 동안 나름대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기 위해 강의를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학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논문자료를 복사하고 전공서적을 구입하여 자료가 어느 정도 모이면 미리 한국으로 보내곤 했다. 그 때 복사한 논문 자료가 엄청나게 철해져 있어, 지금은 특수교육역사자료실에 옮겨 두었다. 그리고 American Annals of Deaf 저널 디렉터리에 있는 기관과 인명 등을 활용하여 미리 편지로 방문계획을 밝혀 회신이 오면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둘러보고 관련 자료를 얻고, 별도로 점심대접까지 받기도 했다. 5월에 종강을 하고는 내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 농교육의 쟁점과 미래를 나름대로 조사해 보고 싶어 델파이(Delphi)기법을 적용하여 캘리포니아 주 농교육담당 교수, 농교육행정가, 농학교 교장과 수석교사 등을 대상으로 3회에 걸쳐 조사를 실시했다. 거기서 얻은 정보를 내용분석해 보니 내가 책에서 읽은 것보다 훨씬 생생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마침 그 때가 미국에서 PL94-142라는 연방특수교육법(Education for All Handicapped Children Act)이 통과되고 특수교육에서 조용한 혁명이 일기 시작한 때여서, 특수교육 전반에 걸쳐 쟁점이 활발히 부각되었다. 그 때 조사한 결과는 귀국하여 당시 우리대학 대학원장으로 있던 서정덕(徐廷德) 박사 고희 논문집(1979)에 발표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외로운 연수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있는 풀러톤에서 자동차로 약 두 시간 가량 남쪽으로 가야하는 리버싸이드에 나와 대학 동창인 오인수(吳仁壽) 목사가 살고 있었다. 주말에 그 곳에 가는 것이 내게는 큰 낙이었으나, 사실 오목사는 차로 나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느라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 그 때 오목사 내외가 내게 베푼 따뜻한 정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대학 학기가 끝나고는 오목사 집근처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농학교인 리버싸이드 농학교에서 약 2주 이상이나 연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까지 활용할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농심리진단과 측정도구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수기회를 가졌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귀국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농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심리검사연수를 이틀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사진4. 청각장애심리검사연수회)

 

  미국 연수중에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당시 이태영 학장께서 괌을 거쳐 일부러 나를 격려하기 위해 LA까지 오셔서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가셨다. 그 때 오셔서 나를 초청한 지도교수로부터 내가 자발적으로 열심히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면서 귀국하면 상을 줘야겠다면서 좋아하셨다. 그리고 그 때 내가 담배를 끊었다고 하니 양담배 있는 곳에서 담배를 끊은 용사라고 나를 치켜 올려 주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는 집사람에게 내가 미국서 연수 잘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일부러 위로해 주시기도 했다. 이처럼 이태영 학장은 나의 은사이기도 하지만 내가 모교에 교수가 된 것은 물론, 교수가 되고 난 다음에도 이런저런 모습으로 나를 아끼고 배려해 주었다.

 

3】미국을 다녀온 이후 이제 박사학위 논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점이 닦아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의 학위논문 구상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농교육 미래에 대해 델파이 조사한 내용을 같은 방법으로 한국에서 조사하여 비교 논의하는 쪽으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미국과는 달리 당시 우리나라 농교육 현실에서 미국에 상응하는 델파이 페널 멤버를 확보하기가 여의치 않아 결국 접어야 했다. 그 무렵 나는 교사교육 쪽으로 계속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던 차에 소위 수행능력중심교사교육(competency-based teacher education)의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 연구비 지원까지 받게 되었다. 그래서 특수교육교사에게 요구되는 공통 수행능력의 개발(1979)에 이어, 농교육교사에게 요구되는 수행능력을 개발하는 쪽으로 학위논문의 가닥을 잡았다.

 

  ‘Competency'라는 용어를 지금은 ‘수행능력’으로 사용하지만, 당시는 ‘전문능력’으로 표기하여, Performance 라는 말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청각장애아 교사에게 요구되는 수행능력의 설정을 위해 1차 자료로 (1) 미국농교육협의회(CED)에서 개발한 농교육교사자격 표준(1974), (2) 청각장애유아와 그 부모를 위한 교사에게 요구되는 수행능력(W. H. Northcott, 1971), (3) 우리나라 농학교 교사들이 진술한 수행능력 목록(1980) 등을 활용했다. 그리고 설정된 수행능력의 심의위원으로 원영조, 이규식, 김갑림, 김칠관, 김영순, 김장현, 김주호, 노승소, 신상식, 이선호, 최참도, 석동일, 권요한 등이 참여하였으며, 외국 자문위원으로 T. J. Watson(영국 University of Manchester 농전공 교수), W. H. Northcott(미국 A.G. Bell Association for the Deaf 실행위원) 등이 참여하여 도와주었다.

 

  당시 학위논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북대학교 변홍규(교육학) 교수가 미네소타 대학에서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학습장애아교사에게 요구되는 교사수행능력의 평가’에 대한 논문이 방법적인 면에서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변 교수는 그 후 신군부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5.18 광주의 아픔을 외면하고 학위논문 쓰기에 급급했던 내가 변홍규 교수를 떠올리며 내 자신이 부끄럽고 비급해 보였다.

 

  학위논문을 끝내고 나는 Gallaudet 대학에 객원연구교수 자격으로 당시 문교부 해외파견 교수 지원을 받아 1년간 머무는 기회를 가졌다. 집사람에게 함께 가자고 제의하니, 자기는 아이들과 함께 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해서 가족이 함께 갔다. 당시만 해도 가족 전체가 외국에 가는 것을 생각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 때 태균이는 초등 2학년, 태영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함께 가기를 잘 했던 것 같다. 가족과 함께 있으니 78년에 혼자 연수생활 할 때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었고, 가족 간의 결속도 다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Gallaudet 대학에 있는 동안 미국의 농교육과 농문화의 실상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어 농세계의 실재(reality)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농과 농교육자료가 특별히 따로 정리되어 있어서, 도서관 이름처럼 Learning Center로서 활용하기에 참으로 좋았다. 도서관에서 D. Moores 교수를 자주 마주친 적이 있는 데, 그의 연구생활 일면을 잘 볼 수 있었다. 2009년 우리나라 농교육10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에 그가 참석하였는데, 어느 듯 70이 넘은 그의 모습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 때 한국 대표로 내가 먼저 발표하고 이어서 무어 교수가 발표했는데, 내가 발표한 요지를 정확히 파악해서 세 번이나 인용해서 언급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리고 Gallaudet 대학에 있는 동안 비교적 자유롭고 시간 여유가 많아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개정증보판 원고를 완성하여 마음이 홀가분했다. 내가 그 곳에 있는 동안 1981년 12월에 이영식(李永植) 목사님이 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인문대학 김형태 교수가 학위논문 준비차 워싱턴 DC에 왔다가 들렸고, 서석달 교수와 권오택 교수도 함께 들리셨고, 공항에서 이태영 총장과 이기수 선생도 함께 만나 반가웠다. 당시 디트로이트에 강위영 교수 댁에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여행차 들렸고, 그 후 강 교수 내외도 우리 집에 다녀갔다. 그리고 유학 중이던 이상복 교수도 다녀갔다. (사진 5. 걀로뎃대학 연구교수 생활)

 

  미국에 갔다 오니 우리 대학은 교명을 ‘대구대학교’로 바꾸고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초대 총장에 이태영 총장이 취임하고, 사범대학 초대학장에는 그동안 교육학부장을 맡아 학부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김정권 교수가 맡았다. 초기에는 학장임기도 1년씩으로 하여 2대 학장은 이규식 교수가, 이어 1984년에 사범대 3대 학장으로 내가 임명을 받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학장 보직을 맡아 속으로 부끄럽기도 했으나, 그만큼 이태영 총장께서 모교 졸업생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이해했다. 내가 학장을 맡아 있는 동안 상업교육전공과 전자교육전공이 사범대에서 경상대와 공대 쪽으로 각각 독립과로 승격하여 이전하기를 원해 학생들이 계속 집단항의를 하였다. 사대 입장에서는 당장 난감한 일이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게 절실한 과제였다. 당시 교무처장인 최대식 교수는 법대로 현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당해전공 학생들의 장래를 위해 원하는 대로 독립시켜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다. 그 이듬해에 결국 독립학과로 이관 조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년간 사대 학장을 해보니 ‘교수’로서는 할 일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이태영 총장에게 박무식 비서를 통해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뜻을 편지로 전했다. 당시 이태영 총장께서 호주머니에 내 편지를 넣어 다니시면서 요즘 이런 교수도 있다면서 다른 교수들에게 한 이야기가 후에 내 귀에까지 들어 왔다. 아마 그 때 속으로 사범대 학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내가 학장하는 것을 보고 일부 교수들은 학위를 서둘러 했다는 그런 우스운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어쨌든 홀가분한 맘으로 연구실에 돌아오니 살 것 같았다.

 

  그 뒤로 학부에서 학과장 보직은 졸업을 했으나, 1986년부터 8년간 대학원 특수교육학과 학과장을 계속 맡아야 했다. 대학원 특수교육학과 석사와 박사과정에는 학생 수도 많았고, 특히 박사과정에는 현직 교수들도 많았다. 그 때만해도 내가 학과장을 하면서 전일제 학생과 직장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과 수강 신청학점에 차별을 두었다. 직장을 가진 사람은 한 학기에 6학점까지만 신청하게 하였다. 당시에 전일제 학생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대학에 자리를 잡아 이미 중견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때 학과장으로 내가 주도하여 ‘월요세미나’를 지속적으로 하면서 원서 윤독을 중심으로 함께 공부를 했다.

 

  그 때 거창계곡, 가야산, 동해바다 등으로 교수-학생이 함께 어울려 보낸 추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즐겁다. 한 번은 팔공산에서 고기를 구워 소주를 곁들여 제미 있게 담소하던 중에 불꽃이 튀어 불길이 번지는 통에 혼이 난적이 있다. 그 와중에 이영철(우석대) 교수가 근처 암자에 가서 떡도 얻어 오고 쌀도 얻어와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었다. 그 때 내가 가져간 코팰은 방화용으로 황급히 서둔 통에 찌그러져서 못쓰게 되었다. 당시 세미나 멤버 중에 서경희 교수, 김중선 교수, 강창욱 교수, 이영철 교수, 김황용 교수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서경희 교수는 미국서 박사과정 공부하면서 여기서 세미나한 공부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사진6. 대학원 세미나 모임)

 

【 4】1987년 민주화 운동은 대학의 민주화에도 영향을 미쳐 1988년 신학기에 접어들어 우리대학에도 ‘교수협의회’라는 것이 출범하게 되었다. 인문대학에서 권재선(국어국문학과) 교수가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피선되고, 사범대학에서는 내가 초대 교협회장을 맡아 출범을 했다. 이 무렵 이태영 총장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그 해 봄에는 동산병원에 입원하였다가 2학기에 접어들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입원 치료하였다. 그해 가을에 나는 김정권 교수와 특수교육교사양성과정 모델개발에 참여하여 분주하게 일하던 중에 10월 어느 주말에 이태영 총장 병문안을 위해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그렇지 않아도 집사람이 당신은 바쁘다는 핑계로 총장님 병문안을 그렇게 미뤄서 되느냐고 나를 나무라서 아차 싶어 병원에 갔더니 이틀 전에 미국으로 떠났다고 해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 왔다. 그 때 마지막으로 이태영 총장님을 뵙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이태영 총장의 장기부재로 인해 대학은 바람 잘 날이 없었고, 2대 교수협의회 의장을 맡은 이해두 교수는 학내 현안문제 처리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내게 하소연을 하였으나, 그 진의가 제대로 이태영 총장에게 전달되지 않거나 와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 1989년 6월에 원영조 교수가 총장직무대행을 맡아 이쪽저쪽 의견을 수렴하여 나름대로 현안문제를 풀어 가려고 노심초사하였다. 한편, 1989년은 이태영 총장의 회갑이 되는 해여서 동문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회갑기념 논문집을 간행하여 병석에 계시는 이태영 총장에게 가족을 통해 전달하였다. 그 때 이태영 총장께서 대승적으로 구성원들의 바램을 합리적으로 수용하였더라면 우리 대구대는 관선이사 파견이라는 극단적인 파행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의 상흔은 아직도 우리 대구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

 

  1980년대 말에 대구대 특수교육총서 시리즈로 원영조, 이규식,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청각장애아교육』저서를 나누어 집필하기로 했다. 전체 11장중에서 청각장애의 개념, 청각장애아교육의 역사, 한국의 청각장애아교육, 청각장애와 인지발달, 청각장애와 인성발달, 그리고 청각장애아교사의 전문성을 내가 맡아 집필하고 나머지는 이규식 교수와 원영조 교수가 분담해서 집필하기로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원영조 교수가 학교 일로 집필이 예정대로 추진되지 않아 석동일 교수를 새로 집필진에 추가하여, 1990년 10월에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청각장애아교육’ 개론서로서는 처음 출판되어 전국적으로 기본교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책의 판권이 대구대 특수교육연구소에 귀속되어 있었는데, 중간에 저자 표기와 판권관리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2007년에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농학교 교육과정과 교과교육’을 별도 장으로 추가하고, 대구대 출판부에서 저자들에게 판권을 이관 조치하였다.

 

  1990년대 초반은 우리 대학이 이태영 총장의 장기 부재로 인해 소위 민주화의 진통을 겪는 시기였다. 처음에 원영조 교수가 총장직무대행을 수행하다가 이어 이상춘 교수가 부총장에 취임하여 사실상 총장업무를 수행했으나, 교수협의회에서 내놓은 총장직선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나는 동문으로서 거의 유일하게 교수협의회 쪽과 나름의 대화 창구를 유지해 왔었다.

 

  그러던 중 총장직선제가 확정되어 소위 민주화추진 그룹 쪽에서 은밀히 나에게 직선총장 출마를 권유하는 제의가 들어 왔다. 당황스럽기도 하거니와 내가 출마할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마지막 단계에서 원영조 교수 연구실에서 김정권 교수를 모시고 사실대로 경위를 알리고 조언을 구했다. 그 때 원영조 교수께서 “이번만은 김 교수가 나서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해 주워 고마웠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거부의사를 표명하고 더 이상 거론치 말자고 했다. 1992년에 ‘대구사회연구소’ 출범과 함께 초대 연구소 소장을 경북대 김민남 교수가 맡았는데, 간접적으로 김 교수의 권유도 있고 해서 나는 연구소 발기 이사 겸 연구원으로 참여하였다.

 

  이것이 내가 교수생활하면서 진보적 성향의 사회활동에 발을 디딘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전부터 나는 대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이사와 이사장까지 역임하면서 나름대로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대구․경북지역에서 처음 설립된 ‘질라라비장애인야학’ 초대 교장도 약 10년간 맡았고, 대구장애인연맹(대구DPI) 초대 대표(후에 공동대표)도 맡아야 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약 15년이 비교적 사회참여활동을 많이 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나는 장애인들과 직접 만나고 장애인계와 교류를 하면서 특수교육 분야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장애학’(disability studies)과 장애인운동에 눈을 떨 수 있었다. 그 이래로 나는 장애학의 관점에서 본 특수교육의 재구조화 과제를 주요 관심사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특수교육학계는 여전히 장애의 개인모델에 학문적 바탕을 두는 성향이 강해서 양자의 담론 간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양쪽 모두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사진7. 장애인야학활동 관련)

 

  1994년에 나는 첫 번째 박사학위 제자로 강창욱(현재 강남대 특수교육과 교수) 박사를 길러 냈다. 강 선생은 학부 졸업 후에 대구영화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내가 공부를 하려면 직장정리를 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그 때 강창욱 선생은 결혼하고 가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두 말 않고 직장을 정리하고 내 연구실에 들어 왔다. 그로부터 석사, 박사 공부를 하면서 7년간 내 연구실에서 동고동락하였다. 그 후 이한선 선생도 내 연구실에서 7년간 공부하고 지금은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한선 박사는 연구실에 있는 동안 나에게 여러모로 편하게 잘 해주었다. 내 연구실을 거쳐 간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가장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기에 정이 많이 들었다.

 

  학위를 받고 고생을 하던 중에 강창욱 교수가 강남대로 임용되어 대구를 떠나던 날 나는 집에 돌아와 혼자 눈물을 흘렸다. 이한선 선생도 내 연구실을 떠나며 눈물을 흘렸고, 한 동안은 눈물이 나와 전화를 하지 못한다면서 메일로 안부를 전하곤 했다. 이렇게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강창욱 교수는 특히 초등특수교육과 학생들이 강의를 좋아해서 대구대에서 함께 일하면 좋겠다 싶었으나, 세상이 내 뜻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강남대에서 많은 일을 했고 지금도 잘 하고 있어 보기에 좋다.

 

  1995년 11월 29일 약 7년간이나 미국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이태영 총장께서 미국에서 쓸쓸히 영면하셨다. 오로지 대구대를 위해 불철주야 일하시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일생을 마감하였다. 대구대에 많은 숙제를 남겨둔 채 아직도 우리는 그 숙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다. 이태영 총장 10 주기(週忌)를 맞아 우리 BK21연구단이 주관하여 ‘창파 이태영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주제로 추모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류상덕 교장이 창파 이태영 선생의 생애를, 전재일 교수가 사회복지사상을, 내가 특수교육사상을 각각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8년에는 제1회 창파학술제를 개최한 이래, 2회부터는 국제학술제로 추진하여 왔다. 특히 창파학술제를 국제학술제로 정례화하는 데에 김용욱 교수가 교육대학원과 특수교육대학원 원장을 맡으면서 그 예산을 확보해 놓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진8. 창파학술제 관련)

 

  1994년은 우리나라에서 근대특수교육이 시작 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태영 총장은 80년대 후반부터 특수교육 100주년에 따른 기념사업을 다각도로 구상하고 있었다. 한국특수교육 100주년을 앞두고 나는 대한특수교육학회장을 한 번 더 연임하는 책임을 맡아 학술대회를 중심으로 그 준비에 착수해야만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해 연초부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하는 「함께걸음」에 우리나라 특수교육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특수교육의 역사정리 원고를 시리즈로 계속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특수교육학회 학회장은 단국대 김옥기 교수가 맡아 있었다. 그 때는 한국특수교육학회와 대한특수교육학회가 둘로 나누어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전국 규모의 100주년기념 학술대회를 치루기 위해서는 두 학회가 공동주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100주년기념 학술대회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특수교육학회 측에서 학회장 명의로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작은 1445년 세종대왕이 서운관(書雲觀)에서 맹인들에게 교육을 실시한 것이 그 기원이므로 한국특수교육 100주년기념사업은 우리나라 특수교육 역사를 왜곡하는 잘못된 기획”이라는 식으로 현장 특수학교 교장들에게 공문을 발송하였다.

 

  이에 특수교육계에서는 서울학회와 대구학회가 서로 갈라져서 싸움질을 한다는 식으로 양쪽 특수교육학회를 싸잡아 비난하였다. 당시에 대한특수교육학회장으로 100주년기념 학술대회를 추진하던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하고 난감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특수교육학계의 주도권에 대한 뿌리 깊은 갈등이 이어져 온 탓이다. 그 때 1445년 설은 임안수 교수가 박사학위논문에서 왕조실록의 사료에 근거해서 밝힌 것으로 그것을 한국특수교육의 시작 기점(起點)으로 잡을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는 한국특수교육 역사정립을 위해 좀 더 다면적으로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 한국특수교육협회(지금의 특수교육총연합회의 전신) 회장을 김영환 원장이 맡아 있으면서 중재노력을 했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 때 협회와 우리 학회가 공조하여 우리나라 특수교육100주년 기념엽서를 체신부에서 발행해 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원래는 기념우표 발행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R. S. Hall이 평양에서 맹교육을 시작한 정확한 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워 결국 기념엽서 발행으로 대신해야 했다. 그 후 임안수 교수는 ‘근대 한국특수교육의 기원 연대에 관한 연구’(2005)에서 우리나라 근대특수교육의 기원연대는 1894년이 아니라 1898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근대’특수교육의 성립은 19세기 말로 자연히 정리가 되었지만, 그 연대를 1894년으로 보는 입장과 1898년으로 잡는 입장 간에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보기에 Hall 여사가 한글점자를 고안하여 맹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8년이 틀림없지만, 오봉래에게 처음으로 개인지도를 시작한 것은 1894년이다. 다만 그 기준을 무엇으로 어떻게 잡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그래서 역사는 결국 그 역사를 보는 사람에 의한 해석의 문제이다. (사진9. 특수교육100주년 기념엽서)

 

 【5】20세기가 저무는 1999년 말은 대구대 특수교육과 뿐만 아니라 내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99년 봄에 이공계와 자연과학계열에 이어 인문사회분야에서도 소위 ‘두뇌한국(BK) 21 연구단’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학술진흥재단에 연구비신청을 하여 수주하게 되었는데, 내가 BK21 단장으로 연구단 신청을 하게 되면 개인 프로젝트를 포기해야만 했다. 특수교육과 학과회의에서 나는 개인 연구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연구단 단장으로 BK21 특수교육연구단 신청에 임하겠다고 했다. 당시에 집사람은 개인연구비를 포기하면서 된다는 보장도 없는 BK21 연구단 단장을 꼭 맡아야 하느냐고 했으나,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준비단계에서 김용욱 교수와 함께 민천식 박사도 미리 준비에 참여케 하여 적극 추진하였다.

 

  1999년 말 어느 날 대구대 특수교육연구단이 지방사립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는 낭보(朗報)를 받고, 그 날 저녁 우리 특수교육과 교수들은 망년회 겸 ‘대구대 특수교육의 르네상스’를 위한 축배의 잔을 높이 들었다. 국립대학으로는 충남대학의 백제학연구단이 선정되었으나 중도 탈락이 되어 대구대 특수교육연구단은 인문사회분야에서 지방대학으로는 유일한 연구단으로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에는 우수연구단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내가 대구대 특수교육과에서 교수생활하면서 가장 긴장되고 보람찬 때가 2006년까지 BK21 1차 사업을 마무리 한 7년간이었다. BK21은 대학원 중심 사업이어서 참여 학생들에게는 우선적으로 혜택이 돌아가게 되어 있었지만, 교수들에게는 까다로운 책임만 지워질 뿐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대구대 특수교육의 자존심을 걸고 교수-학생이 함께하는 지적 공동체로서 BK연구단을 운영하기 위해 일상적 레퍼토리 외에 몇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그 하나로 우리 연구단은 2000년 신학기부터 격주간으로 ‘월요세미나’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원 학과장 할 때에 추진한 ‘월요세미나’에 이어 두 번째 기획이었다. 학문은 독백이 아니다. 이 세미나를 통해 교수들은 자신이 추진하는 연구프로젝트에 대해 중간점검을 할 수 있게 하고, 참여 대학원생들에게는 교수와 함께 참여하는 지적 경험을 축적하게 유도했다. 사실 이런 세미나는 평가에 직접 도움을 주지도 않는 일종의 과외활동과 같은 것이어서 처음에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러나 교수-학생이 함께 만나 ‘담론하는 공부 공동체’ 형성을 위해 세미나는 꼭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해를 거듭하면서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이 세미나는 2006년 2월까지 89회를 기록하고 연구단 해체와 더불어 종료 되었다. 이 월요세미나를 매개로 외국 저명인사의 초청특강도 몇 차례 실시하였다. 월요세미나를 통해 가장 보람 있었던 기획은 특수교육진흥법 제정배경(김동극 교장; 2004.11.15)), 특수교육진흥법의 제정과정과 그 후속조치(김영환 원장; 2004.12.06), 특수교육진흥법의 개정과정과 뒷이야기(김원경 교수; 2004.12.20) 등에 걸쳐 기획 시리즈 세미나를 실시한 것이다. 이 세미나 결과를 종합 정리하여 ‘특수교육진흥법의 제정과 개정과정’(김동극, 김영환, 김원경, 2005)이라는 주제로 특집형식으로 「특수교육저널: 이론과 실천」(6권 1호)에 보고하였다. 이를 토대로 나는 ‘특수교육진흥법의 제정과 개정과정: 그 역사적 함의와 쟁점’(특수교육저널:이론과 실천, 6권 1호, 449-472)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 세미나 자료는 당사자의 회고담 형식으로 정리된 1차 사료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므로, 훗날 한국특수교육 역사 정리에 소중한 자료로 활용 될 것이다. (사진10. BK연구단 월요세미나)

 

  다른 하나는 2000년부터 학술지 「특수교육저널: 이론과 실천」을 계간으로 발행한 일이다. 이 저널은 2003년 9월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등재후보학술지로 선정되어, 우리 사업단이 올린 초유의 개가였다. 이를 통해 우리 사업단은 자생적 지적 소유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저널은 2005년에 등재학술지로 선정되어 지금은 한국특수교육문제연구소(소장: 김병하)에서 계속 등재지로 간행하고 있다. 이 저널을 학술진흥재단에 등재후보지로 신청할 때, 그냥 서류로 접수할 게 아니라 직접 설명하고 접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는 당시 우리 사업단 연구교수로 일하던 민천식 교수(현재 대구교대)에게 직접 접수하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무자가 이건 학회 학술지도 아니고 대학연구소 학술지도 아니어서 심사 대상으로 접수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민 교수가 학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BK21연구단 학술지를 이곳에서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떡하느냐 면서 재차 설명하여 접수처리가 되었다. 이것은 민천식 교수가 우리 연구단에서 일하면서 기여한 숨은 공로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1차사업 마무리와 더불어 대구대 BK21 특수교육연구단은 해체되었지만, 이 저널은 등재지로서 계속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대구대 특수교육과가 소유하고 있는 중요한 지적 재산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 BK21연구단에서 일한 연구교수와 포닥연구원을 거쳐 간 사람은 민천식(대구교대), 김영숙(대구사이버대), 이근용(대구대이사), 오세웅(가야대), 조원일(경기대), 옥정달(나사렛대), 김일명(광주여대) 등이며, 우리 연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들 가운데 현직 교수로 일하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30 여명 가까이나 되고 있으며, 당분간 그 수는 늘어날 것이다. 우리 연구단 사업을 통해 7년간 모두 20억 이상 국비지원을 받았으며, 1차 사업(1999-2006) 종합평가에서는 성균관대 동아시아유교문화권연구단, 고려대 한국학연구단과 더불어 대구대 특수교육연구단이 우수연구단으로 선정되어 교육인적자원부장관(당시 장관: 김진표)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참여학생 가운데 김정현(백석대) 박사는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7년간 내리 단장을 맡아 일하면서 지방대학의 약세를 딛고 성공적으로 BK연구단 사업을 종료한 것을 지금도 나는 큰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내가 얻은 소중한 교훈은 “사람이 하는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BK21연구단 일로 인해 자존심 상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우선 내부적으로 본부에서 어렵게 따낸 BK21연구단을 제대로 지원하고자 하는 마인더가 없었다. 그래서 행정지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런저런 명분으로 제동을 걸거나 무슨 꼬투리를 잡기가 일수였다. 게다가 내부적으로 우리 연구단이 서류상으로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었다. 특히 격년으로 실시하는 정기 평가 때가 되면 지방대학인 우리 연구단을 얕잡아보고 헐뜯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평가심사위원장이 평소 지면이 있는 윤덕홍 총장에게 전화로 “대구대 특수교육연구단의 보고서가 신통찮다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식으로 귀띔을 해주었던가 보다. 총장이 단장인 나에게 외부에서 이런 좋지 않은 평이 있으니 실사과정에 특히 유의해 달라는 당부까지 하였다. 이 때 나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어디 한번 직접 만나 붙어보자는 각오로 심사를 받으러 올라갔다. 몇 가지 질문이 오가고 내가 답변하는 과정에서 취약한 인적자원을 이끌고 연구단을 이끄는 데에 현실적 어려움이 있음을 전제하면서, 우리 연구단이 하는 사업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소신 있게 내비췄더니 심사위원장을 비롯해서 심사위원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감지했다. 그 때 김용욱 교수와 민천식 교수도 함께 동행 했다. 그 후 언젠가 한 번은 총장실에 가서 연구처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행정적 협조가 제대로 되지도 않고 책임만 묻는 이 일을 나는 짜증나서 못하겠노라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6】BK21연구단 단장 일을 끝내고 나니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늘을 날만큼 자유롭고 여유가 생겼다. 내가 연구단을 이끌어 오면서 내면적으로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구미(歐美)중심의 특수교육 패러다임과 차별화되는, 그러면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한반도)중심의 동아시아 특수교육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제 외적 동기로부터 해방되어 내 스스로의 자발적 동기부여로 이 일을 위해 남은 동안의 교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BK21사업을 끝내고 나는 『대구특수교육사』(2007) 저서를 냈다. 이 책은 내가 대구대(혹은 대구) 특수교육을 구심(球心)으로 삼아 한국특수교육-(동)아시아특수교육-세계특수교육이라는 원심(遠心)으로 뻗어가기 위한 첫 발판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런 의도를 나는 이 책의 서문에서 분명히 밝혔다. 즉, “지금은 세계화 시대이면서 지방화 시대이다. 지방화가 없는 세계화는 거짓이고, 세계화에 소통되지 않는 지방화는 공허하다. 마찬가지로 대구특수교육의 ‘특수성’은 세계특수교육의 ‘보편성’과 끊임없이 소통되고 의미연관 되어야한다. 그래서 대구특수교육사는 한국 속의 특수교육역사이자 세계 속의 특수교육역사이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렇게 될지 어떨지는 대구대 특수교육학인들의 역량에 달린 일이다.

 

  『대구특수교육사』가 나오기 전에 나는 그간의 교사교육에 대한 나의 연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의미에서 『특수교육교사론』(1999)을 펴냈다. 이 책은 2006년에 개정판을 낸 후에 작년(2011)에 다시 증보개정판을 내게 되어, 정년을 앞두고 마무리 정리를 한 셈이다. 최근에 와서는 다른 강좌에 비해 ‘교사론’ 쪽 강의에 훨씬 신명이 쏠린다. 나는 막상 강의할 때는 내가 쓴 책과 별 관계없이 강의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 대표적 강좌가 특수교육교사론 강의다. 한편,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1977, 1983)에 이어 특수교육의 철학적 기초를 정리하여 『특수교육의 역사와 철학』(2002)을 새로 저술했다. 이 책은 예상보다 빨리 매진 되어 이듬해에 개정판을 내고, 금년(2012)에 다시 개정증보판을 냈다. 역시 정년을 앞두고 증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BK21연구단 일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내가 얻은 소득 가운데 하나는 조원일 교수와 홍정숙 교수의 지도교수인 나카무라(中村) 교수와 학문적 교분을 가진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조원일 교수가 우리 연구단에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두 분이 만나면 무슨 말이 오갈지 몹시 궁금하다”고 기대를 내비췄다. 나카무라 교수는 당시 일본 츠쿠바대학 심신장해학계장이자 일본특수교육학회장으로 특수교육의 역사연구에 주력해온 학자이다. 그래서 자연히 나와는 학문적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쪽 연구실 멤버들과 우리 연구단이 워크샾을 두 차례나 가졌고, 나카무라 교수는 일본특수교육학회 영문판저널(Japanese Journal of Special Education, 2006, 43호 6권, 449-457)에 내 논문을 초청논문으로 게재하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그 후 일본특수교육학회에 두 번이나 한일국제심포지움 코너를 통해 내가 발표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 때 통역을 하고 공동연구자로 조원일 교수와 홍정숙 교수도 함께 참여하였다. 당시 발표한 내용은 모두 일본특수교육학회지 영문판에 풀 패이퍼로 게재되었다.

 

  대구대 특수교육과에서 교수노릇 하면서 나는 총장선거에서 두 번이나 일을 저질렀다. 1990년대에 총장직선제가 도입되면서 나는 윤덕홍 총장이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으로 발탁되고 그 후에 치르는 8대총장선거와 이재규 총장 중도사퇴 후에 치루는 9대 총장선거(2005.09)에 출마하여 두 번이나 낙선의 고비를 마셨다. 내가 보기에 사명감만으로는 답이 없다는 게 대구대 총장선거다. 그리고 모든 선거는 선거라는 형식의 독특한 문화가 있기 마련이고 평소에 조직을 다져 놓지 않고는 나설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고 모교에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강창욱 교수는 이 시대에 대학총장하지 않는 게 오히려 축복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쓴맛이 사는 맛이랬다.

 

  대구대에서 나는 마지막 보직으로 대학원장(2006-2008)을 마치고, 그 이후로는 연구실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사범대가 대명동에서 진량캠퍼스로 옮기고 나서 나는 이곳 하양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에 더욱 여유가 생겼다. 평생 내가 살면서 잘한 일 가운데 하나는 대구에서 하양으로 이사한 일인가 싶다. 캠퍼스 가까이서 생활하니 연구실이 집처럼 친숙하다. 그리고 사범대 2호관 3층 내 연구실은 문천지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남향의 명당이다. 겨울에 햇볕이 들어오면 난방이 필요 없을 만큼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천혜(天惠)의 명당이라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이 연구실에서 나는 특수교육과 재직 중에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그간의 구상과 나름의 연구를 결집하여 『한국특수교육론: 우리나라 특수교육(학)의 정체성』(2011) 을 저술했다. 이 저서는 『대구특수교육사』(2007)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대구특수교육사’와 ‘한국특수교육론’을 문의 돌쩌귀로 삼아 동아시아와 세계 특수교육의 보편성과 소통하는 통로를 열고 싶었다. 이런 나의 구상이 우연히 인정을 받았음인지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2009년에는 Marquis Who's Who in the World 인명사전에 등재되고 이듬해에는 영국 IBC(International Biographical Center)에서 선정한 ‘21세기 저명 지식인 2000명’에 들기도 했다. 아마 이것은 내가 대구대에서 평생 특수교육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덕분인줄 안다. 이 일로 학과 교수들이 축하파티도 열어주고 축하패(2010.05.13)를 만들어 주어 고마웠다. (사진11. IBC 증서와 축하패)

 

  내가 우리 대구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있으면서 가장 보람된 일 가운데 하나는 이곳 진량캠퍼스에 ‘특수교육기념관’이라는 건물 이름을 달고, 그 속에 이영식 목사와 이태영 초대총장의 업적을 정리하고, 한국 속의 대구대 특수교육 역사를 정리한 ‘특수교육역사관’을 꾸민 일이다. 원래 이 건물은 대명동 소재의 대구맹아학교 건물을 철거하고 그것을 그대로 리모델링하여 점자도서관 뒤편에 이용두 총장 재직시에 완공하였다. 특수교육기념관의 ‘특수교육역사관’은 2010년 5월 개교기념행사에 맞추어 개관하였다. 나는 이 역사관 개관 준비위원장을 맡아 역사관 내부의 컨텐트 작성 책임을 맡았다. 여기에 한국특수교육을 이끈 이물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일단 고인(故人)들로 한정해서 세종대왕, 유길준, 로제타 셔우드 홀, 박두성, 이영식, 이방자, 윤백원, 옥보을, 유병온, 정규순, 이태영, 최병문, 이기수, 안병즙 등 열 세분을 선정해서 소개했다. (사진12. 특수교육기념관 개관)

 

  여기에 이기수 선생을 포함한 것은 미국에서 특수교육을 최초로 공부한 그의 특별한 학력과 경력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개관식 때는 미국에서 이기수 선생의 부인과 따님이 직접 참석하여 다녀가기도 했다. 안병즙 교수는 평생을 특수교육계에 헌신해 왔으며, 특히 지체부자유아교육의 대부(代父)로 일컬어질 만큼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한국특수교육을 이끈 인물을 생각하면서, 우리 대구대 특수교육과 정식 교수 1호에 해당하는 안태윤(安泰潤) 교수께서 지난 해 봄에 고인이 되어 애석하다. 선생님은 초창기(1960년대)에 우리 특수교육과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고 경북대 교육학과에서 정년을 하였다. 우리 대구대 특수교육과 50주년을 되돌아보면서 이미 고인이 된 이태영, 안태윤, 서석달, 안병즙, 그리고 초등특수교육과의 조정원 교수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두 손 모아 빈다.

 

  나는 대구대 특수교육과 50년(지금은 51년) 동안 4년은 학생신분으로, 40년은 교수노릇하며 모두 44년을 특수교육과 함께 살아 왔다. 글을 써놓고 보니 나의 회고(回顧)라는 것이 결국 내 자신의 오온(五蘊) 더미로 가득 차 있고 회개(悔改)가 없어 부끄럽다. 그것은 내 여생(餘生)의 숙제로 남긴다. (201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