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적 관계망과 특수교사의 삶
통합적 관계망과 특수교사의 삶
인간존재의 경이로움
장애는 개인의 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문제다. 동시에 장애는 개인의 문제이면서 가정의 문제이자 사회적 문제다. 어찌 보면, 삶의 문제로서 장애문제는 냐냐(or/either)의 문제라기보다 도도(and/both)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딱 부러지게 정해 놓은 정답이 없는 게 삶의 문제이자 인생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2원적으로 보느냐, 1원적 통합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의 존재성 내지는 그 가치설정이 아주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몸과 마음은 다른 차원의 것이지만, 서로 맞물려 있는 불이(不二)의 통합체다. 우선 몸이 건강해야 맘이 편하고, 맘이 안정되면 몸도 편하다. 거꾸로 몸이 아프면 마음도 병들고(心弱), 마음이 편치 않은 터에 몸이 편할 수가 없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차원이 다른 것이면서 하나로 맞물려 있다.
젊은 나이에는 몸의 욕구가 강해 몸이 하자는 대로 살면 대개는 맘이 편치 못하다. 그렇지만 나이 들면 누구나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삶의 지혜로 받아들인다. 숨겨진 예수의 말씀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해 놓은 복음서로 알려진 『도마복음』(Gospel of Thomas) 7장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복이 있도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라.”
얼핏 보기에 난해한 구절이다. 오강남(2009) 교수는 “이 절에서 말하려는 것은 우리 속에 내재하는 ‘사자됨’과 ‘사람됨’이라는 두 가지 힘의 상호관계에 관한 것으로, 여기서 사자는 우리 속에 있는 길들지 않은 야수성(野獸性)-정욕, 무지, 탐욕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근데 그 야수성도 잘 길들이고 극복하면 우리의 일부로 동화(同化)되어 그 사자는 행복한 사자일 수 있다는 게다. 반대로 우리가 이 사자의 야수성에 잡아먹히면, 우리의 바른 인성이나 신성을 발현할 기회를 잃게 되니 불행해지기 마련이라는 게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은 이 구절을 접했을 때, 심한 당혹감과 함께 엄청난 희열을 느꼈단다. 희열을 느낀다니? 뭔 말인가. 우리에게 항상 사자처럼 덮치는 것은 식색(食色)의 욕정이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인간 본능/본성으로 규정했지만, 맹자는 이런 게 인간의 본래성이 아니라 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이 구절에서 “무엇보다도 사자처럼 달려드는 인간의 욕정, 그 강렬한 회화적 상상력에 찬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욕정의 극복이란 사실 달려드는 사자를 통째 씹어먹어 버리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란다. 인간의 죄악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 속에 있다. 하여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도마, 14)이랬다.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사자를 먹자! 덮치는 사자를 삼키자! 나는 이 말 속에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臨濟)의 날카로운 할성을 듣는다.” 덮치는 사자를 때려잡는 힘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용단이 ‘사람됨’의 품위이자 인격의 깊이다. 이어, 『도마복음』29장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이로다. 그러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로다. 그러나 진실로 나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 거(居)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노라.”
도올은 이 구절의 해석에서 “영혼을 부유한 것으로 보고, 육신을 빈곤한 것으로 보는 것은 모든 이원론적 사유(dualistic thinking)의 전형이지만, 여기 예수 말씀의 기조는 이 양자의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혼융에 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양자는 어디까지나 방편적으로 구분되어질 수는 있으나, 인간실존에 있어서 실체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distinguishable but not separable).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혼과 육신이 하나로 결합(통합)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이며, 그 결합된 모습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현존재인 것이다.”(김용옥, 도마복음한글역주3, 2010)고 했다. 바로 여기에 인간존재의 경이성이 도출된다.
29장 말미에 예수는 “진실로 나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즉, 영혼)이 이토록 빈곤함(즉, 육신) 속에 거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라”했다. 말하자면, 위대한 영혼이 빈곤한 육신 속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어 놓고 있다는 인간실존의 사태야말로 최종적 불가사의라는 게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을 경탄과 경외로 가득 채워주는 두 가지로, “내 위에 별들이 총총한 하늘이 있고, 내 속에 (선험적)도덕률이 있다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인간존재의 경이로움과 신비성이다. 따라서 인간존재성을 문제 삼는 교육은 곧 경이자 신비다. 즉, 교육은 과학적 절차나 통제가 아니다.
장애아동은 심신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더디거나 다르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을 뿐, 인간으로서의 신비한 존재성은 동일하다. 중생이 곧 부처이듯, 모든 장애인은 본질적으로 부처와 같은 존재다. 문제는 우리가 ‘장애’(disability)라는 개념의 틀 속에 장애인을 주조(鑄造)한 나머지 ‘장애’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데에 있다. 오죽하면 지적장애인의 ‘자기권리주장’ 운동을 일컬어 영어권에서 ‘People First'(사람먼저)로 명명했겠는가. 특정 개념의 틀 속에 사람을 가두지 말자.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감옥은 마음의 감옥이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향한 마음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 있지 않은지 거듭 자신을 반추해 봐야 한다. 동시에 장애인당사자는 스스로를 ’장애의 틀‘속에 안주시키려 들지 않는지 자신을 거듭 성찰해 봐야한다.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장애학(disability studies)에서 장애는 개인의 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당대 사회가 정치적‧경제적‧문화적‧교육적으로 구성한 ‘관계의 문제’로 본다. 장애는 원천적으로 사회적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의 짐을 사회 쪽으로만 떠넘길 수 없다. 왜 그런가? 개인과 사회는 하나의 그물망으로 얽힌 관계망이다. 인간존재로서 장애인도 존엄한 실존 가치를 지니는 만큼, 스스로 인간다움의 품위와 교양을 내축해야 한다. 장애인들이 사회를 향해 투쟁적으로 주장만 할 게 아니라, 내면적으로 인간적 품위와 지성을 견지하는 만큼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특수교육의 존재이유가 설정된다. 그리고 장애인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설득력 혹은 공감력을 발휘하게 된다. 교육본질 복원으로서 특수교육의 내재적 목적은 장애보상이 아니라, 심성함양 혹은 본성회복이다. 여기 심성함양에서 ‘함양’(涵養)은 없는 것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해서 심성함양은 곧 본성회복이다.
통합과 존재의 연기성(緣起性)
왜 통합적 관계망의 삶인가? 우주생성과 그 속에 지구의 생명체가 진화해 온 과정을 짚어보면, 우리 인간존재의 뿌리가 드러난다. 우주는 138억 년 전에 크게 폭발하면서 생겨났고, 지구는 약 45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 이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것은 약 40억년에서 37억 년 전이다. 그 뒤 생명체의 진화가 거듭된 끝에 극히 최근인 약 200만 년 전에 비로소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이 지구에 출현한 게다. 이 우주는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을 지구에 출현시키기 위해 적어도 37억년을 쓴 것이다.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는 자신의 존재성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개체로서 70년 전에 출생한 그 누구누구가 아니라, 이미 약 40억 년 전에 태어나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살아온 온생명의 주체이다. 내 몸의 생리 하나하나, 내 심성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이 40억년 경험의 소산임을 나는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 진정한 나이는 몇십 년이 아니라 장장 40억년이며, 내 개체는 사라지더라도 온생명으로 내 생명은 지속된다(장회익, 공부이야기. 2014).
여기서 장회익 교수는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생명은 낱생명 단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일체 생명의 얽힘인 ‘온생명’으로 보아야 생명의 신비성이 풀린다는 게다. 낱생명으로서 내 생명은 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태양, 공기, 물, 식물 등 나 외의 여타 생명들이 제공하는 온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된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이자 인간존재의 신비다. 따라서 낱생명으로서의 내 생명은 온생명과의 관계적 형태로만 지속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내 ‘삶’이라는 것은 온생명의 복합질서에 낱생명인 내가 주체자로 참여하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천지인(天地人)’의 삼위일체다.
그에 의하면, 존재의 주체적 참여가 없으면 ‘삶’이라는 게 성립하질 못한다. 그는 우리 인간의 세 가지 동심원적 삶을 든다. 즉, 가장 먼저 개체로서 ‘나’가 있고, 다음에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있고, 그리고 ‘온생명으로서의 우리’ 곧 ‘온우리’가 있다. 사람에 따라서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예로부터 소인(小人)이랬고, ‘우리’를 중시하는 사람을 ‘군자’(君子)라 했지만, 그 위에 ‘온생명의 몸이 곧 나다’로 여기는 사람은 ‘성인’(聖人)이랬다. ‘온생명이 곧 나다’고 자각하는 삶을 그는 ‘우주사적(宇宙史的)’ 사건에 해당하는 삶이랬다.
온생명이 태어난 약40억여 년 만에 드디어 자의식(自意識)을 갖춘 인간이 진정한 삶의 주체로 떠오르려는 시점에서, 그 주체로 기대되는 인간존재가 오히려 암세포가 되어 온생명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문명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우주사적으로 볼 때, 온생명을 의식하는 주체도 인간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인간이 암세포가 되어 온생명의 생리를 망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이것이 21세기 문명사의 위기다.
여기 ‘온생명이 곧 나다’는 생태적 존재인식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연기적(緣起的) 삶’의 자각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인드라 망인 그물코처럼 서로 얽혀 있다.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네가 넘어지면 나도 무너진다. 장애인이 있음에 비장애인이 있고, 장애인이 넘어지면 비장애인도 무너진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결코 남이 아니다. 하여 특수교사는 연기적 만남의 존재인 장애아동과 하나로 통합된 삶을 앞서 실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여기 특수교사의 ‘통합적 삶’은 장애아동과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인 만남의 삶이자, 쌍방소통적(two-way communicative) 삶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사는 것이 특수교사의 운명이고, 이 운명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자이크어린이집 교사연수회 강의자료>(201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