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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과 노자

평촌0505 2010. 9. 14. 13:19

중용(中庸)과 노자(老子)

 

  지난 여름방학에 김충열(고려대 명예교수) 교수의 「중용대학강의」(2007)와 「노자강의」(2004)를 더위 속에 감명 깊게 읽었다. 나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동양고전에 빠져든다. 이미 중용과 노자는 읽은 적이 있고, 특히 중용 첫 구절은 강의에서 내가 즐겨 인용하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이번에 김충열 교수가 강의형식으로 정리한 ‘중용’과 ‘노자’는 어느 때보다 진한 맛이 우러나는듯해서 내리 두 번이나 읽었다. 물론 두 번째는 밑줄을 치거나 나름대로 표시하고 메모 해 놓은 것을 중심으로 다시 음미했다. 역시 고전은 밥 먹듯이 읽고 되씹어야 제 맛이 나는가 싶다.

  예로부터 사서(四書: 즉 論語, 孟子, 中庸, 大學) 중에 중용이 가장 깨치기 어렵고 단단하다고 해서 ‘차돌 중용’이란 말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초에 문교정책 수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고향에 내려와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어려운 중용의 내용을 쉽고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입학도설」(入學圖說)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입학도설’은 작도(作圖)를 통해 난해한 중용 내용을 시각적으로 쉽게 요해(了解) 해놓은 중용 해설 교재였던 셈이다. 그 대표적 도설이 ‘天人心性合一之圖’이다. 즉, 天人과 心性의 合一하는 원리를 작도해서 설명해 놓은 것이다.

 

  내 나름의 이해에 기초하여 중용과 노자의 기본적 차이를 들라치면, 중용은 하학상달(下學上達)을 강조하고, 노자는 상달(上達)을 지향하는 입장이라고 보고 싶다. 왜 그런가? 주지하는 것처럼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공자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철학서이다. 공자는 10대에 배움에 뜻을 세워(立志) 50대에 지천명(知天命)하여 하늘의 뜻(명령)을 깨친 사람이다. 공자 스스로 하학상달(下學上達)의 모범적인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 셈이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 후기에 몸서리치는 난세를 겪고, 그로부터 한 발 물러나 살아남기 위한 처세의 도(道)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내세웠다. 그래서 노자는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것이 으뜸 되는 삶의 지혜라고 봤고, 자연의 섭리(攝理)를 가장 높은 이(理)의 경지이자 도(道)라고 봤다. 공자가 인(仁)으로 점철된 성인군자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삼았다면, 노자는 물러남(겸양)과 자연의 섭리를 강조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얼핏 중용의 가르침과 노자의 가르침은 대척(對蹠)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서로 회통(會通)하는 길을 찾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하에서는 중용과 노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각각 살펴보도록 하자. 뭐니 해도 중용의 백미(白眉)는「중용」제1장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護徵, 故君子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性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이 명령한 것이며, 道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性이 가시화된 형태로 드러난 것이며, 敎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道를 제도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다.

  道라는 것은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 군자가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삼가고 남에게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장 은밀한 것만큼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가장 미미한 것만큼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군자는 홀로 아는 그 곳을 삼간다.

  희노애락으로 표현되기 이전을 가리켜 中이라고 하며, 희노애락이 中에 맞게 표현된 상태를 가리켜 和라고 한다. 中은 천하가 따라야 할 궁극적 표준이며, 和는 道가 천하에 두루 퍼져 있는 상태이다. 中과 和의 원리가 완전히 실현될 때 천지는 제자리에 서며 만물은 화육한다.

 

  위의 글은 원문과 함께 소리 내어 한 번 읽기만 해도 숙연해진다. 원문의 방점은 김충열 교수가 찍은 대로 하였고, 해석은 이홍우(2003) 교수가 해놓은 것을 가져왔다. 김충열 교수의 의역에 의하면, ‘天命之謂性’은 “하늘이 인간 만물을 낳고 그 생명들에게 각기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능의 씨앗을 심어준 것을 性(선천적 본성 자체)이라”고 했다. 이어 ‘率性之謂道’는 “그 가능한 씨앗을 잘 가꾸고 길러 문명세계를 이룰 수 있는 방법과 과정을 道(길, 도리, 법칙 같은 것)”라고 했다. 그리고 ‘修道之謂敎’는 “그러한 방법과 과정을(이는 성인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형태와 질서 같은 것)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을 敎(후천적 훈습이나 공부)라 한다”고 했다.

위에서 性은 송나라 유학에서 말하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두 면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性’으로, 주희는 이 ‘性’을 ‘理’(性卽理)라고 정의했다. 주희의 이 말만 가지고 보면, “性과 理는 각각 마음과 세계가 가시화된 형태로 표현되기 이전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며, 다만 마음과 세계라는 각각의 所在 또는 적용대상에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性은 ‘마음에 들어 있는 理’라는 것이다”(이홍우, 2003). 그러나 김충열 교수에 의하면, 이는(性卽理) 성리학자(특히 주리논자)들의 생각일 뿐 공자 때는 아직 이기(理氣) 개념이 성론(性論)에 끼어들지 않았다 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자의 ‘성’(性)은 교육적으로 볼 때 가르침과 거듭 익히는 것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성, 말하자면 변화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성이지 이미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는 고정불변의 理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性 을 후천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은 맹자도 마찬가지다. ...(중략) 이렇게 볼 때 자사(子思)의 性, 즉 ‘天命之謂性’의 性은 변화가 필요치 않은 온전한 선, 구중리(具衆理)의 리가 아니라 변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는 성으로 보아야 한다(김충열, 2007, p.119).

 

  그래서 이 性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다음의 솔성(率性)에서 ‘率’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고 그는 보았다. 주희는 性을 理로 보았기 때문에 ‘率’을 ‘순’(循)으로 보아 이미 있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순종의 의미다. 이에 김충열 교수는 “하지만 性을 완전한 理로 보고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면 궁리진성(窮理盡性)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런(궁리진성) 공부 과정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率’은 ‘循’이 아니라 정도(正道)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이끄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性을 理로 率을 循으로 본다면 이때의 道는 天道냐 人道냐 하고 따져 물으면 이는 天道가 되고 만다. 그러나 性을 후천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확이충지’(擴而充之)하는 ‘率’로 볼 경우 이는 인위의 몫이며, 그를 담당하고 교화하는 이가 성인이므로 이때의 道는 人道가 된다. 성인이 닦아 놓았다고 그냥 따라가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 “선비에서 시작하여 성인에서 마친다”는 말처럼 여러 단계로 하학상달(下學上達)해야 하므로 이는 오히려 과정의 길, 교육수행의 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김충열, 2007, p.120).

 

  위의 주장에 미루어 보면, ‘修道之謂敎’에서 교육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중용 첫 머리의 ‘天命之謂性’에서 性은 하늘의 명령으로 품부된 본래성(本來性)이자 후천적으로 닦아야 할 도덕성(道德性)이다. 그래서 道라는 것은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해서 교육은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로서 인도(人道)를 확충해서(소위 下學上達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중용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 내지 본질은 心性涵養 혹은 本性의 회복에 있다. 그리고 이 교육은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가 인위적인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늘의 명령이 지엄한 것처럼 교육의 길(목적) 또한 지엄한 것이다.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교육이라 해서 특별히 이 명령에서 제외되거나 벗어나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것이 용납될 수 있다면, 특수교육은 이미 교육이 아니다.

  이처럼 중용에서는 인간교육의 엄중성(당위성)과 그 무한 한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놓고 있다. 중용에 의하면,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라 하여 “誠 자체는 하늘의 길이며, 誠 되어 가는 과정은 사람의 길이다"(김충열, 2007, p.209)고 했다. 여기서 김충열 교수는 이 誠은 性(天命之性)을 실현 시켜주는 역동적인 속성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天命之謂性’이라고 할 때의 그 性은 천체(天體)․천리(天理)와 동일한 체(體)가 아니라, 그 體가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性(天命之性)을 완전히 실현되게 하는 것이 솔성(率性)이라면 솔성에서 ‘率’의 내용이 ‘誠’일 것이다. 그러니까 誠은 性이 자기실현을 하는 공능이라는 말이다. 즉 性이 천도(理)의 속성이라면 誠은 다시 그 性의 속성이 되는 셈이다. 중용 제22장에서 “오직 천하의 至誠만이 그 性을 능히 다 성취 현현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능히 진성(盡性)케 하는 것이 지성(至誠)이라는 말이다. 거듭 말하자면 誠은 性을 실현시켜 주는 性의 역동적인 속성이다(김충열, 2007, p.214).

 

  그래서 ‘率性之謂道’에서 솔성(率性)의 ‘率’이 성자(誠者) 즉 ‘誠한 것’이 아니라 성지자(誠之者) 즉 ‘誠하고자 하는 것’이 된다. 중용에서는 성하고자 해서(誠之) 誠을 이룩한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한다. 따라서 ‘誠’은 힘쓰지 않고도 道에 맞지만, ‘誠之’는 성인이 설정한 敎에 따라 널리 배우고(博學), 자세히 물으며(審問), 깊이 생각하고(愼思), 밝게 분별하며(明辯), 독실하게 실천(篤行)하는 수도(修道)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처럼 誠하면 솔성(率性)의 道가 밝아지고, 성인(聖人)의 敎에 따라 道에 밝아지면 誠之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이처럼 「중용」은 誠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는 유가의 위대한 철학이다.

「중용」에 의하면, 교육은 ‘誠之’이자 至誠의 과정이다. 그리고「중용」에서는 하늘(天)이 인간에게 품부한 性의 계발로 교육을 규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가 보기에 「중용」은 완벽한 교육이론서이다.

 

  이 정도로 하고 「노자」로 넘어 가도록 하자. 노자(老子)는 춘추전국 시대에 공자(孔子)와 같은 당대 사람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공자보다 약 100년 뒤에 생존한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노자는 공자사상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노자」는 기원전 350년에서 기원전 200년경의 집단창작으로 알려져 있다.「노자」는 모두 81장 5천여 자에 이르는 데, 상편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혹은 「도덕경」(道德經)이라 불리기도 한다. 흔히 「노자」는 그냥 읽는 책이 아니라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노자를 접하는 나의 느낌은 세상살이의 다툼에서 한 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은유자족(隱喩自足)하는 동양의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여겨진다.

 「노자」 제1장 첫 구절에 ‘道, 可道, 非常道’라고 하여 “도(道)를 도라 이르면 이미 도가 아니다”고 하였다. 즉 어떤 道를 ‘이것이 도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말하는 차원의 道이지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근원이 되고 불변하는’ 그런 道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노자의 ‘상도’(常道)는 ‘영원불변의 도’라고 풀이된다. 공자의 ‘道’는 인간의 도덕적 규범이나 당위성을 강조하지만, 노자의 ‘道’는 형이상학적인 근본원리를 강조한다.

 

김충열 교수는 道를 ‘말하고 이름 부를 수 있는 도’와 ‘말하지 못하고 이름짓지 못하는 도’로 나누어 본다면, 전자는 ‘유상유명’(有相有名)의 도이고, 후자는 ‘무상무명’(無相無名)의 도라 할 수 있어, 그는 道의 양면으로 ‘有’와 ‘無’의 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無’의 도는 도체(道體)요, ‘有’의 도는 도용(道用)이다. 우리가 道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도체(道體)가 도용(道用)으로 드러난 형상을 통해 무와 유의 양면을 모두(동시에) 파악해야 할 것이다. 노자가 내세운 ‘상도’(常道)는 지금까지 문명을 이끌어 온 ‘비상도’(非常道)를 누르고 그 위에 인간이 몸담아 온 본래의 자연환경, 인간의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상도’(常道)를 상위개념으로 내건 것이다. 노자의 출현으로 인해 중국철학사에서는 경험론적 인식방법에서 벗어나 사변적 인식방법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노자에 의하면, 내 속에 있는 광명의 등잔에 불을 붙여 그 불빛으로 무(無)의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은 바로 이런 투수(透水) 인식의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을 터득할 때 비로소 無의 道는 더욱 근원적이고 실재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간은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사변적 성찰력으로 자신의 심령세계에 불을 붙여 세계와 그것이 역사하는 공능의 세계까지도 감통(感通)할 수 있다(김충열, 2004).

 

「노자」제25장 끝부분에 보면,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 하였다. 즉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道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였으니, 자연이 道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이 때 자연은 道 자체의 자기원리로서 道가 자연의 법칙성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용에서는 ‘天命之謂性’이라 하여 인간의 도덕규범을 하늘(天)에 위탁한 반면에, 노자는 자연에 도(道)의 근원을 두고 있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유가에서 道는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없는 하학(下學)의 기준이지만, 도가에서는 상달(上達)의 표준이자 목적이다.

「노자」에서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해서, 최고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은 자기 외의 모든 것들에게 유익을 안겨다 줄 뿐 절대 그들의 이익을 뺏으려고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물은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가장 낮은 데로 스스로 임한다. 우리는 물처럼 순천응인(順天應人)하는 슬기를 배워야 한다. 노자에 의하면, 바로 물의 이런 성질이 도(道)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무수유’(道無水有)라 하여 道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道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고 보아,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도 일컫는다.

 

「노자」50장에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사이를 삼등분하여, 나의 생애에서 10분의 3은 생의 지분이고, 10분의 3은 사(死)의 지분이다. 나머지 3분의 1정도는 생과 사의 중간 거리인데, 여기서 생 쪽으로 더 가면 건강한 삶이 되고 死 쪽으로 더 가면 병약한 삶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死의 지분을 生의 지분으로 늘리려고 하는데 일컬어 양생(養生)이라 한다. 아무리 양생을 해 본들 뭣하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생의 균형을 잡아가는 섭생(攝生)이다. 노인은 노인답게 균형을 잡아가야지 양생(養生)에 욕심을 내면 그 삶이 추하게 보인다.

「노자」80장에 나오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은 노자 나름의 이상적 삶을 그린 한 폭의 풍경화와 같다. 여기서 ‘소국과민’은 농경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상국가이자 마을공동체이다. ‘소국과민’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옷 입고, 편안한 집에서 살면서 때로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그런 삶의 공동체다. 그래서 이웃마을을 바라보기만 할 뿐 서로 오가지 않고 이웃마을의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를 듣기만 할 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저 자기 마을 안에서 머문다. 목가적(牧歌的)이지만 왠지 슬픈 마음이 든다. 그만큼 노자는 전쟁과 다툼을 싫어했고, 최소한의 안락(安樂)한 삶을 동경했다. 이런 질박한 삶의 이상이 어찌 전국시대 노자만의 꿈이겠는가. 그래서 우리에게 노자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이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사상에서 유학이 지배담론이라면 노자의 도학은 비판담론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동양사상의 두 축을 형성하고 있다. 신영복(2004) 교수는 동양사상의 정체성은 「논어」」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해체주의자로서 노자는 오늘의 자본주의 모순 구조를 재조명하기 위해 생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김병하(2010.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