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적(自利的) 삶의 향기
불교의 수행에는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이 있다. 물론, 이 둘은 별개의 수행이 아니라, 자리행이 나무의 뿌리라면, 이타행은 가지나 열매와 같은 관계이다. 이처럼 자리행과 이타행은 서로 맛 붙어 있지만, 우선 그 뿌리가 튼실해야 나무의 가지가 무성히 뻗어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공부’는 자리적(自利的) 삶의 전형이다.
근데 내가 평생 교수노릇하면서 해온 공부가 본래는 자리행에 속하는 것이지만, 엄격히 그 내면을 따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설정된 강좌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외적 상황이 거의 일방적으로 내 공부를 규정해 왔다. 정년을 3년쯤 앞두고 학과에서 ‘교양전공기초’ 과목을 하나 맡아 달라기에 나는 기꺼이 그 제안에 응했다. 내가 자의적으로 설정한 강좌명(「장애․문화․교육」)에 따라 1학년 1학기 신입생들에게 신명나게 강의한 걸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내가 신나게 강의 한만큼 학생들도 좋아했던 것 같다. 이런 게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의 한 사례가 되었으면 싶지만, 그것은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몫이지 내 스스로가 할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언필칭 ‘평생학습’의 시대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지 않으면 배겨내기 어려운 시대다. 정년 후에 나는 다른 사람의 개입 없이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적 삶을 만끽하는 자유를 얻은 걸 지복으로 삼는다. 앞에서 나는 자리적 삶의 전형으로 ‘공부’를 말했다. 한자로 ‘공부’(工夫)의 ‘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이고 , ‘夫’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게다. 하여 공부란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의 전형적인 삶의 형식이다. 우리에게 공부는 곧 삶 그 자체다.
정년 후에 나는 뭣보다도 전공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어 참 좋았다. 잡식동물처럼 입맛에 당기는 대로 마구 섭렵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한 게다. 나의 독서 편력이 잡식이긴 했지만, 그 성향은 주로 고전 쪽이었고, 서양보담은 동양 쪽이었다. 그 주제는 주로 종교와 철학, 그리고 특히 ‘죽음학’(dead studies) 쪽에 많이 집중되었다. 나이 듦에 따라 내 자신을 되짚어보기 위한 ‘마음공부’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다.
근데 읽기만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기회가 따르지 않으면 책읽기가 공허해지기 쉽다. 우연치 않게도 그 공유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게 지금 생각하니 내게는 퍽 행운이었다. 정년 후 혼자 이런저런 공부를 하던 터에 선배 동료교수의 권유로 <지식과세상 사회적협동조합>(대구)에 이사로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마침 조합에는 존경할만한 지역의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어, 정년 후에 이런저런 만남을 통해 내 삶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식과 세상>이 출범(2014)하던 해에 나는 정년 후 그간 내가 읽고 정리한 것에 기반 해서, 「테마로 읽는 고전: 마음공부」라는 주제로 작은 교실을 개설하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생각해도 아직 영근 공부는 아니었지만, 그런 기회에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맛을 새삼 음미할 수 있어 좋았다. 마침 조합 측에서도 가뭄에 비 만난 듯 환영해 주었다. 그 때 테마로 잡은 고전은 『중용』, 『노자, 도덕경』, 『대승기신론』, 그리고 『도마복음』으로 이어졌다. 전공과 관계없이 정년 후에 내가 <지식과 세상>에 첫 등판을 한 셈이다.
그 후로 <지식과 세상>에서 글쓰기 교실과 책읽기 교실을 운영하는 데에 나는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 이러는 과정에서 금년부터는 조합의 운영위원회의에도 매주 한 번 씩 참석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지식기부사업에 대한 논의를 한다. 9월부터는 조합에서『금강경』교실을 개설해서 당초 4주간 정도로 잡았으나, 굳이 미리 정한 산냐(相)에 꺼들리지 않으니 10월까지 연장될 것 같다.
그리고 <지식과 세상> 출범 이후 매월 첫 주 화요일에는 ‘화요모임’에서 대구․경북지역 정년 교수들과 종교계 인사들이 함께 모여 돌아가면서 발표하고 담론을 나누면서 점심식사를 한다. 9월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한 한국 기독교의 반성」이라는 주제로 원로 목사님이 발표를 해주었다.
또, 2015년 늦가을부터는 원주에 있는 작가 친구의 권유에 힘입어 온라인 매체(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참여하게 되어, 서평과 사는 이야기 중심으로 지금까지 약 20여 꼭지 이상 송고하였다. 받은 원고료의 절반 정도는 당해 매체의 ‘10만인클럽’에 기탁하는 보람도 있다. 하지만 뭣 보담도 내가 쓴 글을 온라인으로 독자들과 두루 공유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큰 보람으로 삼는다.
정년 후의 삶은 각자 취향에 따라 다양할 수 있으나, 나는 최소한 두 가지 기준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 하나는 우선 남에게 사소한 혹은 간접적이라도 피해나 부담을 주지 않는 조심스런 삶이고자 한다. 적어도 자신에게 비추어 보아 원치 아니하는 것을 결코 남에게 베풀지 않는(己所不欲, 勿施於人) 그런 삶이면 족하다. 그러는 동안 내가 ‘자리적’ 삶에 충실한 만큼, 간접적으로 혹여나 그게 이타적 삶으로 연관된다면 금상첨화다.
다른 하나는 몸과 맘이 함께 건강하기 위해 ‘비우는 삶’을 실천하는 여유를 즐길 수 있어야겠다. 늘그막에 탐진치(貪瞋痴)의 해독(삼독)을 가능한대로 줄이기 위해서는 몸과 맘을 가볍게 비우고, ‘위대한 포기’를 즐기는 여유가 있어야 할 터. 그래서 나에게는 ‘자리적’ 삶의 형식이 무엇보다 긴요한 게다. 결국, 우리에게 삶은 끝없는 ‘공부’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 우리네 삶의 목적은 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