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손녀가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보니
아이들에게 진짜 공부란?
지난 2월 13일은 손녀 지현(志炫)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손녀는 첫돌이 지나기 전부터 우리랑 함께 살았다. 하여 손녀는 자라고 우리 내외는 늙어간다. 아마 손녀가 중고등 다닐 때까지는 우리랑 함께 살겠지만, 그 이후는 어찌될지 나도 모르겠다. 손녀는 내가 회갑이던 해에 태어나 나랑 같은 닭띠다. 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내 나이 80줄에 접어든다. 그때까지 내 건강이 어떨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냥 지금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금년 3월에 손자 경현(鏡炫)이도 어멈이 일하는 대학 근처 영암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손녀가 대학 들어갈 나이가 되면 손자는 중학에 입학할 게다. 막내인 나도 바로 위 누님과 여섯 살 차이가 난다. 자라면서 누님이 내 공부에 간섭을 하는 게 참 싫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누님은 평생 내게 정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손녀 지현이랑 나와 연(緣)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하지만 집사람이 손녀에게 쏟아온 정성에 비하면 그냥 곁가지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만큼 손녀는 집사람의 분신이자 미래다. 때론 애착이 지나쳐 문제다. 손녀는 내가 근무한 대학의 부설 유치원에 3년이나 다녔다. 정년을 앞두고 우리가 하양에서 경산으로 이사한 후로는 아예 나는 손녀위주로 내 출퇴근을 조절했다. 매일 아침 일찍 손녀를 등원 시켜주고 연구실로 와서 6시경 유치원 종일반이 끝나면 다시 데리러 갔다. 그리고 함께 집으로 왔다.
어떤 때는 차 뒷좌석에서 손녀가 잠들어 버리면 깨우기가 안쓰러워 지하 주차장에서 업고 집에까지 온 적도 있다. 집사람이 다른 사람이 보면 창피하니 그러지 말라고 해서 그 후로는 업어주는 걸 그만 뒀다. 하지만 집사람은 외출했다가 손녀가 차에서 잠들면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로도 그냥 업고 들어와 잠자리에 눕힌다. 그런 힘이 어디서 생기는지 신통하다. 옛 어른들도 자식은 안아주지 않아도 손자 손녀는 안아주고 업어주며 키운다고 했다.
손녀가 초등학교 입학 후에 등교할 때 태워주는 것도 나의 첫 일과가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먼 거리에서도 모두 걸어 다녔다. 걸어 다니며 이런저런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기도 했는데. 요즘은 웬만하면 차타고 다니고 가까이서도 혼자 걸어가기 일쑤다. 문화가 엄청 달라졌다. 등하교 때 친구랑 함께 어울려 다니기보다 시간절약을 우선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교 시에는 아예 학원차가 와서 아이들을 바로 학원으로 데리고 가는 게 일상화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뛰고 놀아야 심신이 건강해지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기조차 쉽지 않다.
손녀는 단군이래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물질이 풍요로운 만큼 정서적으로도 풍요로운지 가늠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에 손녀는 솔직하고 담대한 면이 있다. 그림과 글쓰기에 그런 면이 보인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지만, 대부분 만나는 기회는 그나마 손녀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손녀는 놀 줄 아는 아이다. 잘 노는 아이가 나중에 공부도 잘 할 수 있을 게다. 아마노 히데아키(일본 모험놀이터 전문가)는 아이들의 놀이시간 부족과 자유의 축소가 만들어 낼 암울한 미래를 이렇게 경고한다.
아이들은 놀지 않으면 죽어요. 마음이 죽어요. 아이들이 놀면서 “아, 너무 제미 있어.”라는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눈에서 벗어나 그렇게 놀기가 힘들어요. 아이들에게 놀 자유를 빼앗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인체실험’이에요. 아이들이 놀지 못하면 그런 상태가 됩니다. 지금처럼 아이들이 놀지 못하면, 스스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이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아이가 늘어날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이유를 못 느끼는 것이죠.(한겨레, <양선아의 베이비트리>, 2018.05.09)
그렇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자기창작 활동이자 일이다. 아이들에게 노는 자유를 빼앗는 건 ‘인체실험’용으로 아이들을 구속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기회를 풍부히 가지는 만큼 아이들은 남을 배려 할 줄 안다. 그래야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질적․양적으로 심화․발전되는 게다. 우리에게 삶은 관계망의 구축과정이다.
우리 내외는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는 나머지 해외여행을 갈 적에도 꼭 함께 간다. 집사람은 손녀를 돌보면서 모든 걸 손녀 중심으로 산다.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다. 어찌 저렇게 빠질 수 있는가 싶다. 남은여생도 손녀 때문에 건강해야 한단다. 물론 집사람이 손녀에게 그리 정성을 쏟는 데는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손녀를 위하는 길일까 의문이 들 적도 있다. 특히, 개성이 강한 손녀와 집사람의 집념이 부닥치는 경우에 그렇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공부 문제로 서로 갈등을 야기할 때가 나로서는 참 난감하다. 공부는 그런 게 아니란 걸 잘 알지만, 내 말이 먹혀들 여지가 없다.
공부는 자기가 좋아서 해야지 다른 사람이 간섭하고 강요하면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나는 체험으로 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렇다. 이제 손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니 내가 보기에 두 가지 면에서 확연히 변화가 감지된다. 손녀는 6학년이 되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 할머니가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한다. 손녀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는 우리와 함께 대화하는 기회가 훨씬 줄어들 정도로 거기에 빠져 있다. 어차피 손녀세대는 디지털 세대이니 그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너무 어른 입장에서 통제할 일이 아니라 잘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게 현명할 것 같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드는 손녀가 자기 외모에 엄청 관심을 보인다. 그렇다고 외모를 꾸미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얼굴 표정을 스마트폰에 담아 보는 걸 큰 낙으로 삼는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거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그냥 놓치질 않고 뚫어지게 본다. 손녀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미리 집에서 교복을 입어보고 거울 앞에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옛날 내 생각이 난다. 외모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사춘기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내 경우 초등학교 시절에는 노는 게 공부였다. 근데 중학교에 들어가니 공부하지 않고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특히, 영어와 수학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딴에는 공부하기 다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내 인생 경험에 의하면, 공부는 그 끝이 없다. 그리고 공부는 스스로 좋아서 해야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물론 공부가 부담스러워도 참고 인내하는 것조차 오롯이 자기 몫이다. 하여 공자는 아는 것보다는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거워하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즐거우면 저절로 몰입된다. 공부는 몰입이다.
근데 손녀가 중학에 들어간 후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고역이다. 시험 치는 날은 전쟁터에 가는 것처럼 비장하다. 이렇게 요즘 아이들은 클수록 격심한 경쟁의 전쟁터로 내몰린다. 그들은 단군이래로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각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시달리고 있다. 손녀가 중학에 들어가서도 차로 등교시켜주는 일은 내차지다. 초등학교 때보담 무려 한 시간가량이나 빨리 나서야 한다. 내가 슬쩍 손녀에게 중학교 생활이 어떠니? 라고 물어 보니, 내 예상과는 달리 제미 있단다. 참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자라는 그들에게 제미 있는 구석이 없으면 말이 안 된다. 손녀가 느끼는 제미를 나 같은 늙은이가 어찌 제대로 짚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이 향유하는 재미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 재미라는 게 내가 보기에는 시답잖은 것일 테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오아시스이자 성역(聖域)일터. 그들이 짬짜미 느끼는 사소한 재미를 어른들은 존중해주고, 그 재미를 바르게 키워주고 안내해줄 책임도 있다. 사실 그들에게 공부해라, 밥 먹어라, 손 씻어라 하는 말은 그냥 늘 듣는 잔소리일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 키우기가 어려운 게다. 그럴수록 할아버지 할머니의 조건 없는 내리 사랑과 지혜가 절실한지도 모른다. 세상은 살아본 만큼 보인다.
손녀가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발을 디딜 무렵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우리에게 미래는 늘 불안하다. 손녀 세대에는 평균 수명이 늘어나 대충 60년은 일해야 할 게다. 내가 40년간 현직에서 일하고 정년한지 벌써 6년째다. 손녀가 사회에 진출할 무렵 내 나이는 80대 중반을 넘어설 게다. 그 무렵 우리사회는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 터.
아마 손녀 세대에는 안정된 직장에서 평생을 보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게다. 어떤 사람은 평생 기본적으로 세 번은 직장을 바꿔야 한다고 보는가 하면, 열 번까지 바뀔 수 있다고 내다보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손녀 세대)에게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나처럼 같은 직장에서 40년간이나 교수 노릇한다는 건 그들에게 먼 옛날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손녀와 나는 삶의 양식은 물론 그 무게의 추가 엄청 달라진다. 손녀에게는 앞으로 사회에 발을 딛고 살아갈 방도가 절실하겠지만, 노년 후기에 접어드는 내게는 죽는 일이 절실한 현안 문제가 될 터. 내가 회갑이 되던 해에 손녀가 태어났으니, 손녀랑 나랑 띠 동갑내기로 꼭 두 세대 차이가 어김없이 유지된다. 세상은 쉬지 않고 변한다. 그 변화의 간격이 두렵다. 그래도 나는 그 간격을 관조(觀照)하는 노년의 여유를 즐기고 싶다. 하여 손녀는 끊임없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노자는 되돌아보는 것이 도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랬다.
이 시대는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가르치는 ‘격대(隔代)’교육의 가치가 훨씬 절실한 때다. 물론 조부모의 역할은 부모의 역할을 보완해 주는 정도이지만, 질적으로는 그 차원이 달라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자기세대가 겪는 경쟁적 갈등과 스스로의 졸급증 때문에 자녀들을 차분히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맘으로 가르쳐내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자식에 대한 공부 욕심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고 넘쳐 있다. 게다가 자기 스스로는 학교공부가 얼마나 지겨웠던가를 철저히 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 손녀에 대한 교육은 질적으로 당대 부모세대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우선 손자 손녀에게 절대로 공부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 진짜로 ‘공부’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건지를 무언중에 깨치게 하는 데에 이런저런 모습으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부모 세대 삶의 지혜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어야 할 터. 하여 불가에서는 말로하지 않는 교육(無言之敎)이 최상이라 했다.
지금까지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키워왔는지 되돌아 볼 때다. 21세기 문명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공부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들은 가혹한 노동을 통해 가족경제에 육체적으로 기여하도록 강요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공부하는 일에 지나치게 시달리고 있다. 그들에겐 공부가 중노동이 되어 버렸다. 못사는 나라 어린이들은 가정경제를 위해 학령기에도 학교에 가질 못하고 노동착취를 감수해야 하지만,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성적 올리기의 압력 때문에 가혹한 인격 착취를 당하고 있다.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랬는데, 과한 것은 부족한 것만도 못하다.
공부는 스스로 즐겁게 몰입하는 것이어야지 강요에 의해 혹은 성적이라는 외적 압력 때문에 시달리면서 하는 게 아니다. 본래 공부(工夫)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직립 보행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활동이다. 하여 그것은 내면적으로 가장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 그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손녀가 즐거운 맘으로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우리에게 공부의 즐거움은 여전히 유토피아일지 몰라도, 나는 그 이상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손녀도 나도 자기 삶의 행복을 포기할 수 없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자 굴에는 사자만 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