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대전의 '불연기연'
불연기연(不然其然)에서 본 존재와 삶
도올 김용옥은 우리 민족에게 진정 바이블이 있다면 『동경대전(東經大全)』한 권을 들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도올심득 동경대전』(2004)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동경대전』을 눈앞에 펼쳐놓으면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 진정 바이블이 있다면 오직 이 한 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동경대전』은 한 종교의 개창자의 케리그마가 아니다. 반만년 민족사의 고난의 수레바퀴가 이 한 서물에서 응집되어 신세계의 서광을 발하는 개벽의 심포니라 해야 할 것이다(김용옥, 2004, 7쪽).
‘개벽의 심포니’라니 ‘개벽’(開闢)이 뭔가? ‘개벽’은 하늘과 땅이 새로 열린다는 게다. 수운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1860년 음력 4월에 홀연히 득도한 이후 선천의 시대는 가고 후천 개벽의 시대가 도래 한다고 했다. 하여 후천 개벽은 다시 개벽의 세상이다. 도올은 『천명․개벽』(1984)에서 자신은 동학을 바라보는 두 개의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동학은 동학이 아니라 무극대도일 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은 혁명이 아니라 개벽일 뿐”이라는 게다. 요약하면 동학의 가르침은 ‘무극대도’(無極大道)이자 ‘개벽’이라는 게다.
『동경대전』 <논학문> 말미에서 수운은 “무릇 천지의 무궁한 운수와 도(道)의 무극한 이치가 다 이글에 실려 있으니”(凡天地無窮之數 道之無極之理 皆載此書)라 했다. 말하자면 동학의 가르침은 천지의 무궁한 운수와 도의 무극한 이치인 ‘무극대도’라는 게다. 동학은 단지 유불선(儒彿仙)의 습합이 아니라 그것들을 회통하면서 서교의 충격까지도 흡수한 ‘무극대도’다. 여기 ‘개벽’은 개인의 개벽과 사회의 개벽으로 대별할 수 있다. 개인의 개벽은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밖의 기화(氣化)와 안의 신령(神靈)함이 하나가 되는 삶이다. 이런 사람을 동학에서는 종자사람 혹은 신인간이랬다. 이런 개인적 개벽이 축적되고 확산됨에 비로소 동학이 말하는 개벽의 세상인 ‘대동사회’가 구현되는 게다. 즉 개벽의 심포니가 울려 퍼지는 세상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동학의 가르침은 <논학문>에 집약되어 있다면, 철학적 논의(논리)로서 동학의 가르침은 <불연기연>에 집약되어 있다. <불연기연>은 수운이 남긴 마지막(체포되기 한 달 전인 1863 11월) 글이면서, 압축된 표현이어서 이해하기 가장 난해한 글이다. 필자가 보기에 <불연기연>에서 수운은 인간 존재를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의 신비성을 말하고자 했다. 하여 해월은 경천(敬天)과 함께 경인(敬人)과 경물(敬物)에 이르는 삼경(三敬)사상을 제기했다.
수운은 <불연기연> 서두에서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한다. “천고의 만물에는 각각 이름이 있고 그 형상이 있도다(而千古之萬物 各有成各有形). 보이는 바로 말하면 그렇고 그런 듯하지만(所見以論之則 其然而似然), 그로부터 온 바를 헤아리면 멀고도 심히 멀도다(所自以度之則 其遠而甚遠).”고 했다. 즉 보이는 형상으로 말하면 모두 ‘기연’이지만, 그 근원을 따져 헤아리면 아득해 ‘불연’이라는 게다.
하지만 수운에 의하면 인간존재를 비롯해서 모든 존재는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라는 게다. 불연은 기연과 대립적인 것이지만, 기연인 듯 하나 불연인 사태가 있고, 불연인 듯하나 기연인 것도 있다. 따라서 <불연기연>의 논리에서는 기연에서 불연으로의 길뿐 아니라, 불연에서 기연으로 통하는 길 또한 열려 있다.
이를테면 내 부모가 누구인지는 분명 확인 가능한 경험적 기연이지만, 내 존재의 본래적 근원이 뭔가를 헤아려 보면 초경험적 불연에 맞닥뜨리게 된다. 불가에서 흔히 무엇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 를 들고 화두로 삼는다. 내 본래면목의 근원은 아득한 불연의 문제이지만, 이 화두를 붙잡고 거듭 정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문득 깨침을 얻어(頓悟), 그 깨침을 놓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수행하는 가운데 그게 내 삶에 체현되면 기연이 된다.
그래서 불연이 기연이다. 하여 견성(見性)하여 자기 마음의 눈을 바로 뜨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成佛). 하지만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부처가 되는 길은 아득하고도 지난하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만 그 길을 향한 경험의 부단한 축적만이 그 가능성을 입증해 준다.
<불연기연>에서 수운은 “세상이 열려 임금은 법을 만들고, 스승은 예를 가르쳤지만, 애초에 임금은 법의 강령(法綱)을 누구에게 받았으며, 스승은 맨 처음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 없건마는 누구로부터 예의를 본받았을까?”라고 묻는다. 하여 그 모두가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할 일”(不知也 不知也)이랬다. 즉 기연이 불연이라는 게다.
불연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므로 “불연을 말하지 못하고”(不曰不然), 기연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으므로 “기연을 그냥 믿는 것”(乃恃其然者也)이랬다. 하지만 그 끝을 헤아리고 그 근본을 캐어본 즉, “만물이 만물되고 이치가 이치 된 큰 일이 얼마나 먼 것이냐”(物爲物理爲理之大業 畿遠矣哉)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그것(즉, 불연기연)을 간과하는 걸 문제 삼는다.
사계절이 어김없이 바뀌는 것, 갓난아기가 말은 못해도 제부모를 아는 것, 밭가는 소가 주인의 말을 말아 듣는 것, 까마귀 세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되먹이는 것, 제비가 주인을 찾아 되돌아오는 것. 이 모두가 기연이 불연이요, 불연이 기연이다. 하여 기필코 (단정키) 어려운 것은 불연이요(難必者不然),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건 기연(易斷者其然)이랬다. 먼데(즉, 근원)를 캐어 견주어보면 불연하고 불연하지만(比之於究其遠則 不然不然), 만물이 만들어진 것에 비추어 보면 그렇고 그런 기연(付之於造物者則 其然其然)이랬다.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은 기연이고, 선험적 형이상의 세계는 불연이지만, 모든 생명의 존재성은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신비성을 말해준다. 항차 만물의 영장인 인간 존재의 신비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여 『용담유사(龍潭遺詞)』에서는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읊는다. 한글 가사체로 지은 『용담유사』의 < 흥비가(興比歌)>에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글 보고 저 글 보고
무궁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不然其然) 살펴내어
부야(賦也) 흥야(興也) 비(比)해 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수운은 <흥비가>에서 우주 이법의 무궁한 이치를 알기위해서는 ‘불연기연’을 살펴내야 한다고 노래한다. 즉 우주의 무궁한 이치를 다만 ‘기연’으로만 보지 말고, ‘불연’으로도 살펴야 그 이치를 바로 터득할 수 있다는 게다. 하여 수운은 무궁한 우주의 이치를 ‘불연기연’으로 살핌으로써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를 깨칠 수 있다”는 게다. 풀잎 끝의 이슬(草露)과 같은 유한한 삶을 사는 ‘내’가 우주의 무궁한 이치를 ‘불연기연’으로 살핌으로써, 무궁한 우주와 더불어 내 스스로가 ‘무궁한 존재’임을 깨치게 된다는 게다. 무궁한 존재로 내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기연’의 인식 틀로는 한계가 있다.
수운에게 ‘불연기연’은 삶과 죽음을 뛰어 넘는 불이(不二)다. 왜냐하면 그 때 나의 존재성은 무궁한 한울님 속에 무궁한 나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침으로 ‘수심정기’(守心正氣)의 닦음이 내 몸과 맘속에서 체현될 때에 나로부터 개벽의 세상이 열리게 될 터. 오문환은 『다시개벽의 심학』(2006)에서 “내 마음이 하늘 기둥에 매이면 내가 하늘이 된다.”면서, “마음이 하늘에 자리 잡으면 이 사람은 영생하고, 마음이 오늘에 매이면 내일이면 죽고, 마음이 몸에 매이면 길어야 100년을 산다.”(오문환, 2006, 112쪽)고 했다. 하여 마음공부는 오직 마음 지키기(守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게다.
원래 ‘불이’(不二)라는 말은 불가에서 즐겨 쓰는 용어다. 우리가 사찰 경내에 들어갈 때, 입구에 ‘불이문’(不二門)이라는 글귀를 흔히 볼 수 있다. 여기 ‘불이문’은 원래 『대승기신론』에서 일심법(一心法 )을 말하면서 ‘이문 불상리’(二門 不相離)라고 한데서 나온 용어다. 기신론에서 말하기를 “원래 마음은 하나이지만 두 개의 문이 있다. 그 하나는 실재(實在)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문은 그 각각이 ‘총체’로서 일체의 법(總攝一切法)을 포괄한다. 하여 이 두 문은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문 불상리’((二門 不相離)다.”는 게다. 그래서 ‘불이문’(不二門)이다.
이홍우는 『대승기신론통석』(2006)에서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불이’(不二)를 마음의 ‘중층(重層)구조’라 했다. 여기 마음의 중층에서는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 칸막이가 있다든지 위층은 아래층에 그냥 가만히 얹혀 있는 게 아니랬다. 그는 기신론의 모든 설명은 이 두 층의 관계와 그 사이의 운동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 만큼 마음의 중층구조가 기신론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신론에서 중생의 마음은 경험적 사실에 기반한 세간법과 초경험적 관념에 기반한 출세간법 모두를 포함한다. 여기 중생의 마음에서 세간법은 기연이고, 출세간법은 불연이다. 존재의 인식에서 수운의 ‘불연기연’은 ‘불이’의 중층구조를 반영한다. 해서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다.
박성배는 『한국사상과 불교』(2009)에서 동양철학의 체용(體用)논리에는 항상 ‘불이’(不二)사상이 깔려 있다고 했다. 기신론에서 ‘심진여문’은 대승의 본체인 ‘체’(體)요, ‘심생멸문’은 본체의 외적 표현인 ‘용’(用)이다. 여기 ‘체용’을 나무에 비유하면, ‘체’는 나무의 뿌리이고, ‘용’은 나무의 가지와 잎이다.
우리는 나무의 줄기나 가지와 잎들을 보고 경험적으로 그게 무슨 나무인지를 식별한다. 뿌리는 가시적(경험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나무의 외현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원이자 본질이다. 그리고 나무의 뿌리-가지-잎은 하나의 연기적 생명체이어서 ‘불이’의 관계다. ‘불연기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는 ‘불연’의 세계이지만, 가지와 잎은 나무의 외양적(현상적) 존재를 규정하는 ‘기연’의 세계다. 하여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다.
윤석산은 『용담유사 연구』(2006)에서 “『용담유사』의 여덟 편 가사는 모두 이 <흥비가> 마지막 부분에 노래한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는 가르침에 이르기 위한 것이고,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 이치를 ‘불연기연’으로 살피는 것으로 모든 것을 귀결 시킨다.”고 했다. 그리고 <불연기연>은 수운이 체포되기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어서, 그만큼 절박한 심정으로 수운이 남긴 마지막 유고가 된 게다. 윤석산은 같은 책 「불연기연 연구 서설」(2006)에서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한울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나의 본성을 회복하고, 동시에 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한울님을 깨달아 유한한 존재인 ‘나’가 곧 무한한 존재인 ‘한울님’임을 깨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수운이 내놓은 ‘시천주’(侍天主)에 이르는 것이다. 즉 수운의 불연기연은 바로 ‘시천주’에 이르는 중요한 인식의 방법 또는 논리이며, 동시에 이 시천주를 통하여 후천의 새 삶을 열어가는 중요한 동학적인 방법론이라 하겠다(윤석산, 2006, 273쪽).
그는 한울님을 내 몸속에 모시는 ‘시천주’의 방법론으로 <불연기연>을 말한다. 여기 ‘시천주’의 ‘시’(侍)는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外有氣化),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깨달아 옮기지(어기지) 않는 것(一世之人 各知不移)”이라 했다. 즉 한울님을 내 몸속에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 한울님의 신령한 마음을 품부 받아 회복하고, 밖으로는 우주의 혼원한 기운과 하나가 되는 삶의 체현이다.
위에서 ‘각지불이’(各知不移)의 ‘지’(知)는 곧 깨침(覺)이고, ‘불이’(不移)는 변하지 않고(어김이 없이) 실천(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실천이 내 삶에서 체화될 때 유한한 존재인 내가 무한(무궁)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즉 내가 ‘시천주’에 이르는 길이 곧 ‘불연기연’이라는 게다. 한편, 최종성은 『동학의 테오프락시』(2009)에서 수운이 천주를 모신다는 것은 먼저 마음(內)에 신령한 영이 내접하여, 몸(外)으로 신령한 기운이 외재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랬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일회적으로나 우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一世之人 各知不移)을 강조한다는 게다.
결국, 천주를 모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심신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런 질적인 변화를 현실 속에서 꾸준히 지속시켜야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유신령-외유기화-각지불이’의 과정은 곧 수운이 말하는 ‘불연기연’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문환은 『다시개벽의 심학』(2006)에서 ‘시천주’를 ‘조화정’(造化定)과 연관 지우는 가운데 다음처럼 설명한다.
수운은 선험성을 ‘사람이 천주를 모셨다(侍天主).’고 했으며, 경험성을 ‘사람이 하늘의 조화와 합일한다(造化定).’고 하였다. ‘시천주’는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그대로 품부받은 존재라는 뜻이며, ‘조화정’은 사람이 하늘의 덕과 하늘마음과 정확하게 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시천주’와 ‘조화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면서 하나다. 전자가 도(道)의 선험성이라면 후자는 덕(德)의 실천성이다. 따라서 동학에서 선험성과 경험성은 이원적이지 않다(오문환, 2006, 192쪽).
위에서 오문환은 동학에서 선험성과 경험성은 이원적이지 않다면서, 도의 선험성인 ‘시천주’와 덕의 실천성인 ‘조화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면서 하나랬다. 이것은 불연기연 논리의 또 다른 반영이다. 불연은 선험성이고 기연은 곧 경험성이다. 하여 ‘시천주’의 선험적 불연을 ‘조화정’의 경험적 기연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곧 ‘수심정기’(守心正氣)의 화신(化身)으로서 삶 그 자체다. 동학은 ‘시천주’를 통해 내속에 내재하는 신 혹은 신성의 각성을 통해 삶의 과정에서 ‘수심정기’로 그것을 체화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른바 '동학하기'다.
수운에게 ‘시천주’는 종교적 신비(즉, 불연)의 반영이라면, ‘수심정기’는 종교적 수행 실천(즉, 기연)의 반영이다. 최종성(2009)은 수운의 ‘시천주’와 ‘수심정기’의 의미론적 연관성에 주목한다. 그는 “시천주와 수심정기의 상관적인 이해 속에서 수심(守心)은 내유신령이 구현되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고, 정기(正氣)는 외유기화의 신비를 몸으로 체화해 표출하는 것으로, 모두(즉, 시천주와 수심정기) 수도자의 몸 안팍에서 구체화 되어야 하는 실천과제”로 보았다. 우리에게 깨침은 토론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삶은 곧 신비다. 우리가 동학을 단지 사회운동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종교와 철학의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불연기연> 공부에 좀 더 천착해야 할 게다. 윤석산(2006)은「불연기연 서설」에서 “독자적인 동학 연구방법을 정립하기 위해 ‘불연기연’에 대한 폭 넓은 연구가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했다. 그는 동학을 ‘기연의 논리’ 중심으로 파악하려는 기존의 연구동향을 나무란다. ‘불연기연’의 논리와 인식 틀에 의거하여 동학의 종교적․철학적 보편성이 좀 더 촘촘히 짜여야 할 터이다.
이상의 논의에 기반 하여 필자는 ‘불연기연’의 논리와 인식체계에서 동학의 종교다움, 철학으로서 동학의 철학다움을 위해 ‘불연’을 체(體)로 삼고, ‘기연을 용(用)으로 삼는 것을 제기한다. 수운은 <불연기연>에서 뭐라고 단정키 어려운 것은 불연이요, 경험적으로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기연이랬다. 또, 존재의 근원을 캐어보면 불연하고 불연한 일이지만, 만물이 만들어진 결과를 놓고 (현상적으로)보면 모두가 그렇고 그런 기연이라는 게다.
인간 존재와 삶에서 불연은 근원이자 심층이고, 기연은 형상이자 표층이다. 하여 불연은 이론(실재)세계를 주된 문제로 삼고, 기연은 실천(실제)세계를 주된 문제로 삼는다. 하여 불연은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임에 반해, 기연은 경험적 인과에 따른 결정론에 의존한다. 좀 더 단순화하면 불연은 철학적이고, 기연은 과학적이다. 하지만 불연과 기연은 외면적으로 보면 상반적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상통한다. 하여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다.
요컨대, 불연기연의 인식논리에서 보면, 인간존재의 신비는 마음의 신비이고, 마음의 신비는 교육의 신비를 반영한다. 그리고 교육(공부, 수행)의 신비는 우리네 삶의 신비로 이어진다. 하여 인간존재와 삶은 곧 ‘불연기연’이자 신비성 그 자체다. 수운의 불연기연은 살아 있는 현존재의 경이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