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문화 단상
금년부터 큰댁에 제사 지내려 갈 일이 없어졌다. 큰댁 장조카가 조상제사를 그냥 한 날로 모아 모시겠단다. 사실상 제사 날을 없애겠다는 의중일 터. 조상 제사 의례는 중국보다도 우리가 더 엄중히 지켜왔으나, 근래에 와서 우리나라도 사정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한 다리가 천리라고, 큰댁에서 편리한 대로 제사문화를 정리한다고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제일(祭日)까지 내가 그냥 따라 넘길 수는 없지 않는가. 속으로 어찌할까 망설이던 차에 간밤에는 어째 아버님이 현몽하셨다. 이상하다 싶어 집사람에게 아버님 제일을 확인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음력 섣달 보름)이란다. 해서 약식으로 집사람이 차려주는 대로 술 한 잔 올리고 북향재배를 드렸다. 그리고 손녀 지현에게도 따로 증조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리게 했다. 말하자면 손녀에게 조상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싶었던 게다.
흔히 사람은 하늘의 은혜와 자연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지만, 그 은혜를 느끼게 하는 연결고리로서 부모의 은혜를 빼놓을 수 없다. 해서 원불교에서는 4은(四恩) 가운데 천은(天恩)과 부모은(父母恩)을 든다. 부모의 선택은 자의적인 게 아니지만, 이즘 세태에서는 부모 선택도 신중하게 하란다. 부모의 계층지위가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막중하기 때문일 터.
그런 기준으로 보면 나는 부모 선택을 그리 잘한 것도 아닌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것으로 자평한다. 왜 그런가? 본래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특별히 물려받은 사회경제적 지위란 게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아홉 살 때 돌아가시어 할머니는 어렵게 아버지를 키우셨다. 아버지는 1899년 생으로 조선왕조 말기에 태어나 일제치하에 5남매를 낳아 길렀다. 그 5남매의 막내(해방둥이)로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오던 터에 일 잘하는 어머니와 손발이 맞아 광복 후에 실시된 농지개혁법에 큰 덕을 본 행운을 누리셨다.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조봉암을 앉혀 그가 주도한 토지개혁은 아시아지역에서 성공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기실은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의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저력은 토지개혁의 성공에 따른 파급효과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세대에 속하는 행운아가 되었다.
농지개혁 덕분에 아버지는 소농에서 중농으로 자수성가한 모범 농사꾼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높아 1950년대에 형님은 마을에서 대학생 1세대가 되었다. 60년대에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만해도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인구는 엄청 늘어났다. 그래도 내 또래의 학령기 학생들 중 대학교육을 받는 비율이 20%를 넘지 않았다.
내가 대학 졸업을 할 무렵 아버지는 69세를 일기로 고단한 삶을 접으셨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아버지가 내 앞으로 남긴 문전옥답을 처분하여 대학원 공부를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모교에서 평생 교수노릇하며 살아왔다. 지금 되짚어보니 우리 집 4형제 중 내가 아버지 유산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인 내가 회갑을 넘길 때까지 장수하셨다. 어머니는 평생 막내아들인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냥 나를 우리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2010년에 어쩌다 내가 Marquis 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가 되어 그 첫줄에 영문으로 Hong Sang Kim(아버지), Bong Seuk Park(어머니) 아들이라고 표기된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두 분은 영어 알파벳으로 당신 이름이 세계인명 사전에 오를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 게다가 어머니는 한글조차 제대로 해득하지 못한 문맹이었다.
이제 내 나이가 70대 중반이다. 나도 나이 들어가니 아버지의 은혜,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이 훨씬 진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해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아버지 어머니 제사는 편안한 대로 그냥 모시기로 작정했다. 그게 늘그막에 막내아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일 게다. 또한 그게 바로 나를 위한 것일 터. (2020년 구정을 앞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