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와 동사(同事)
줄탁동시(줄啄同時)와 동사(同事)
공교육으로서 교육의 국가관리가 강화되면서 교육받는 기회의 양적 확대에 많은 진전을 가져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보편화가 교육의 질적 변화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라는 질문은 좀 복잡하다. 공교육은 일차적으로 집단중심 교육이기에 개별화(individualized)는 하나의 이상이자 스스로에게 맡겨질 뿐이다. 게다가 오늘날 학교교육은 학업성취 중심의 줄 세우기로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키는 가운데 교육다움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교육은 ‘깨침’이다. 껍질이 찢어지는 ‘깨짐’의 아픔과 인고(忍苦) 없이 결코 ‘깨우침’은 얻어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줄탁동시’라는 말은 교육다움의 극명한 경지를 함의하고 있다. 김충열(2007) 교수가 「중용대학강의」에서 인용한 ‘줄탁동시’ 라는 말의 해석을 직접 들어 보자.
선교육(禪敎育)의 명언 중에 ‘줄탁동시’(줄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부화되기를 기다린다. 달걀 속에 병아리는 부화할 때가 되면 어미 닭에게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 때 어미 닭은 이 신호를 정확히 전달 받아 알을 콕콕 쪼아 병아리를 돕는다. 그런데 문제는 병아리의 신호와 어미 닭의 응답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줄’은 병아리의 신호요, ‘탁’(啄)은 어미 닭의 파각(破却)이다. 만일 ‘줄’의 신호가 있었는데도 제때 탁(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아리는 부화(孵化)하지 못하고 죽는다. ...(중략) 그러므로 ‘동시’(同時)라는 계기는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문제겠는가? 아마도 이론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이론이 교육이론이 아닐까 한다(김충열, 2007, p.191).
어찌 ‘줄탁동시’가 선(禪) 교육에만 해당되겠는가? 국립특수교육원 벽에 이 말이 걸려 있다고 들었다. 윗글에서 김충열 교수는 “이론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이론이 교육이론이 아닐까 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론대로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교육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 같다. 교육 중에도 가장 어려운 교육이 특수교육이기에 ‘줄탁동시’는 더욱 절실한 난제로 닥아 온다. 여기서 ‘동시’(同時)라는 계기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특수교육을 비롯해서 모든 교육은 곧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여기서 죽고 사는 것의 당사자는 곧 학습자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사활의 열쇄는 교사의 손에 쥐어져 있다.
불교의 사섭(四攝) 가운데 하나로 ‘동사’(同事)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 네 가지 교육적 자세로 사섭(四攝)은 (물질이나) 가르침을 배푸는 보시(布施), 친절한 말씨로 격려하는 애어(愛語), 올바른 행동으로 이끄는 이행(利行), 상대방과 동일한 수준에서 행동을 같이하는 동사(同事)를 일컫는다. 이 때 ‘同事’는 교사에 의한 교육적 자세를 깍아지른 듯이 반영하고 있다. 특수교사는 교육의 과정에서 장애아동과 동일한 수준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법으로 교수(teaching)에 임해야 한다. 우리가 의사 중의 의사를 명의(名醫)라 하듯이 특수교사는 교사 중의 교사이어야 한다. 특수교사가 교육의 과정(특히 교과교육)에서 장애아동과 더불어 이 ‘同事’를 하나의 방편(方便)으로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특수교육은 진정 ‘교육’의 반열에 든다.
모든 나무는 불타는 속성을 지니고 있듯이 모든 장애아동에게는 교육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 나무에 불을 붙여야 나무가 타듯이 누군가에 의해 어미 닭의 파각(破却)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래서 특수교사가 하는 일은 지난(至難)하다. 이것이 특수교사의 운명이다. ‘줄탁동시’와 ‘동사’는 교육본질을 절묘하게 반영하는 언어의 극치이지만, 함부로 운위(云謂)할 수 없는 무서운 말이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우리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말을 지어 냈다. 김병하(2011.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