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의 잔혹사: 한국전쟁의 유산
19세기에 아시아에서 가장 끔직한 제노사이드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 학살일 게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일축했다. 왜 우리 한민족은 고난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를 되풀이해 왔는가? 그 이유가 뭔가? 민족 내부의 갈등 때문인가, 아니면 주변 강대국의 패권다툼 때문인가. 아마 그 이유는 좀 더 중층적이고 복합적일 게다.
우리가 ‘고난의 역사’를 외부 탓으로 그냥 쉽게 돌려버린다면, 그 고난은 밑도 끝도 없이 되풀이 될 게다. 한 민족에게나 개인에게나 먼저 ‘내 탓이오’라는 재귀적 성찰이 없으면 ‘개선’(改善)이라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동학농민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조정에서 일본군이 개입할 명분을 아예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엄청난 제노사이드의 비극이 초래되지 않았을 수 있다. 물론 일본은 호시탐탐 그런 기회를 진적에 노리고 있었다. 제나라 백성을 제압하기 위해 외국 군대의 힘을 요청하는 정부(왕권)를 과연 정부라 할 수 있는가. 나라 말아먹기를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리할 수 없을 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우리는 일제치하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지만, 미국이 느닷없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허리를 반동가리 내고 남북을 미소가 각각 분할통치하는 것으로 합의함에 따라 분단 상황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일제치하에 우리 민족이 내부적으로 좌우로 대립하지 않고 하나로 뭉쳐 힘을 모았더라면 분단이 75년간이나 이어지고,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역사는 면하지 않았을까?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한반도에 분단을 고착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그 뒷배를 봐주는 가운데 동족상쟁의 비극은 진즉에 잉태되었다. 어쩌면 모든 전쟁은 오판의 산물이다. 모택동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원해 준 것은 미국이 금방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을 앞세워 제 빨리 그리고 적극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그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다시 인민군은 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전쟁은 3년간의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그러는 가운데 남북 모두에 의해 잔인한 민간인학살이 자행되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봤고, 참전하더라도 별 위력이 없을 것으로 오판했다. 중공군은 항일투쟁과 중국 내전의 과정에서 막강한 전투력을 축적해 왔던 사실을 간과했다. 이렇게 북에서 남으로 밀려오고, 남에서 다시 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세상은 손바닥 뒤집듯 요동하면서 엄청난 학살을 초래했다. 마침내 한국전쟁은 ‘세계적 내전’이 되었고 전란 속에 좌우익 갈등은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되풀이해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동족상쟁의 비극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해서 벌써 끝났어야 할 전쟁이 결국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로 남아 있다.
지금도 우리는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상대방을 ‘빨갱이’로 몰아세운다. 대통령도 맘에 들지 않으면 ‘빨갱이!’로 덮어씌운다. 한국전쟁 여파로 누구든 빨갱이로 지목되면 그냥 골로 보내 총살시켰다. 해서 ‘골로 보낸다.’는 건 곧 골짜기로 끌고 가서 그냥 죽여 버린다는 게다. 골로 갈래! 참 무서운 말이다. 한국전쟁 때는 한 마을 사람끼리라도 미운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지목만하면 그냥 골로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박완서의 『배반의 여름』(1999)에 나오는 <겨울 나들이>(1975)에 6․25 동란 통에 발작한 시어머니의 도리질은 25년 동안이나 자는 시간만 빼고 지속되고 있는데 그 연유인즉 이렇다.
동란 당시 젊은 면장이던 그녀의 남편은 미처 피난을 못 가서 숨어 살다가 어느 야밤에 그녀 친정으로 피신을 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구구셈을 익혀주듯이 끈질기게 시어머니에게 ‘모른다’를 가르쳤다. “어머님은 그저 모른다고만 그러세요. 세상없는 사람이 물어도 아범 있는 곳은 그저 모른다고 그러셔야 돼요. 아무도 믿으시면 안 된다구요. 네, 아셨죠. 어머님?”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무슨 도척의 영신이라도 씐 것처럼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되풀이 하던 시절, 어느 날 시어머니가 별안간 찢어지는 소리로 인민군들이 묻기도 전에 “몰라요, 몰라요. 정말 난 몰라요.”라고 외쳤다. 그 와중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는 평생 도리도리 질하는 할머니가 됐다는 게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2017) 말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결국 한국전쟁은 20세기의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로 이해될 것이다. 30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이 사망했고, 그중 최소한 절반은 민간인이었다. 이 전쟁은 일본의 해안 가까운 곳에서 사납게 일었기에 그 나라의 부흥과 산업화를 강력히 촉진했으며, 어떤 이들은 이를 ‘일본의 마셜플랜’이라고 했다. 전쟁 이후 두 한국은 서로 마주한 채 경제개발에서 경쟁했고, 그 덕에 두 나라는 현대 산업국가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1950년대 후반까지 국방비가 거의 네 배로 증가하면서 미국의 광범위한 해외기지를 구축하고 국내에서 안보국가(군산협력)를 수립한 것도, 그리고 미국을 세계적인 경찰국가로 만든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바로 한국전쟁이었다(조행복 옮김, 2017, p.325).
아마 한국전쟁 와중에 남북한을 합쳐 민간인 사망자는 200만 명을 상회했을 게다. 커밍스는 국제정치학자로서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영향을 충분히 간파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치루고(결과적으로 성공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미국은 세계패권국가로서 지위를 확고하게 다졌고, 패전국으로서 일본은 천우신조로 경제대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전쟁에 따른 피해는 미국의 무지비한 폭격으로 북한이 훨씬 심했지만, 전후 복구는 더 효율적으로 해냈다. 물론 1970년대 이후 경제적 ‘압축성장’은 남한이 훨씬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또 한국전쟁이 중국에게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세계적 대국으로 그 위상을 굳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최근 인류학자인 권헌익 교수는 『전쟁과 가족』(2020)에서 세계적 내전이 된 한국전쟁 경험에서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을 말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한국전쟁 70년을 결코 무심하게 넘길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한반도의 전쟁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아직 역사가 되길 거부하는 놀랍도록 예외적인 사건이다. 남북관계에서도, 북미관계에서도 아직도 진행 중인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넓은 환경에서 규정했던 동서대결의 냉전이 종식된 지도 어언 한 세대가 지났음을 상기하면 놀라움은 더하다. 세상은 탈냉전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되었는데도 한반도만 유일하게 아직 과거에 매여 있다는 의미에서 한반도를 ‘냉전의 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지금 급증하는 미중 간의 갈등을 두고 신냉전 혹은 냉전II 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현재가 과연 신냉전의 환경인지는 모르겠지만(왜냐하면 이는 냉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지긋지긋하게 끈질긴 생명력은 이 환경(신냉전)의 영향력을 분명 받을 것이다(권헌익, 2020, p.05).
저자는 한국전쟁을 ‘세계내전’에서 가장 명료하게 대표적인 내전, 가장 폭력적인 전쟁으로 정의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전쟁의 경험 속에서 경험주체로 다가서고자 했다. 해서 경험하는 역사적 주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 존재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는 이 주체의 모습을 ‘관계’로 설정했다. 권 교수는 이 책에서 하나의 ‘관계’로서 가족․친족․마을공동체를 말했지만, 그는 이 관계의 세계가 어떻게 일상의 관계와 정치적 관계를 함께 포함하는 입체적 세계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시대에 생명과 인륜의 존엄을 지켜내고자 했던 이 경험주체들의 기적적인 삶에 경의를 표하고자 이 책을 기필했다는 게다.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200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3년간의 전쟁에 투입된 여러 국적의 전투 군인들의 총 전사자 수를 넘는 수)은 한국전쟁의 실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남한정부에서 전쟁초기부터 선제적으로 적에 동조하는 인물이나 잠재적 협력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벌인 정부 차원의 행동은 이후 전쟁의 혼돈 속에서 민간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악순환을 촉발했다. 이런 남한정부의 행동은 북한군 점령시 남한체제의 조력자로 분류된 개인과 가족에 대해 더욱 가혹한 처벌을 가져왔고, 다시 전세가 역전되었을 때는 북한군의 협력자(부역자)에 대한 보복적 폭력이 남한정부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런 가혹한 민간인 살해를 보고 무수한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로 고향을 버리고 남으로 혹은 북으로 대이동을 감행했다. 권 교수는 바로 이 때문에 전후 한반도의 인간조건과 관련한 아주 중대한 쟁점이자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문제로 이산가족의 곤경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게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적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의심되거나 반정부적 동조자의 혐의가 있는 희생자들은 살아남은 가족 전체가 감당해야할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산가족 문제와 그 연대책임이라는 두 현상은 두고두고 가족과 친족 내에 극심한 존재적․도덕적 위기를 초래했다.
박찬승 교수는 『마을로 간 한국전쟁』(2010)에서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에 관한 미시사를 구술증언 중심으로 서술했다. 전쟁이전부터 한국사회는 신분제, 지주제, 씨족 간 갈등, 마을 간 갈등 등으로 갈등요소가 대단히 많은 사회였으나, 한국인들은 이런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로 그 결과가 한국전쟁기에 반복적인 학살로 이어졌다는 게다.
그는 한국전쟁기 신분 간의 갈등은 마을 내부에서 양반층과 천민 신분이었던 머슴․고직(庫直)․산직이나 백정․무당 간의 갈등으로 많이 표출된 것으로 본다. 게다가 지주와 소작인 간에 또는 부농과 빈농 간의 계급갈등도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게다. 해서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후유증이 남긴 어두운 그림자는 아직도 마을에 드리워져 있다.
게다가 동맹과 적, 민간인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해 겪었던 미군들의 잔학성이 민간인 학살을 더 늘어나게 했다. ‘노근리 사태’는 미군 사령부가 한국전쟁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보호하는 일에서 참담하게 실패했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대전 근처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하나로 1990년대 중반에야 두루 알려지고 이후 국제적으로도 널리 관심을 끌었다. 사흘 만에 몇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사건은 미군 전투기가 피난민 행렬에 총격을 가하면서 시작되었다. 철로 굴다리 아래로 피신해 그 안에 발이 묶인 피난민들은 그 지역에 방어선을 치고 있던 미군 기갑부대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사흘 동안의 사격 끝에 400명 정도로 추정되었던 피난민 중에서 단 10명이 살아남았고 피해자는 대부분 아이와 여성과 노인이었다. 사건을 조사하던 연합통신 기자단은 이 사건이 군사작전 중에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후방에 침투한 적군과 진짜 민간인을 분간하기 어려워 일어난 단순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비무장 민간인과 무장 전투원을 구별해야 하는 의무를 완전히 무시했던 군사령부의 조직적 실패의 결과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권헌익, 2020, pp.49-50).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1950년 7월 당시 피난민의 대이동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피난민에 대한 공습 때문에 피난민의 이동은 위험했다. 피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아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은 일화가 한국전쟁 관련 증언록에 흔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필자도 여섯 살 때 고향(구미 고아 평촌)에서 낙동강을 건너 군위 효령에서 영천을 거쳐 청도까지 고된 피난행렬에 끼었다. 피난길에 흰옷 입은 사람들이 길에 지천으로 깔렸고 오가면서 잃어버린 가족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인상 깊게 들렸다. 그 피난길이 내개는 얼마나 무리였던지 돌아와서 약 한 달간이나 걷지를 못하고 방에 누워 있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북의 적대적인 두 국가권력이 마을 공동체 깊숙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다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전선이 이동하면서 반복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에게 ‘대살’(代殺)로 기억되는 끔직한 방책에 따라, 제거 대상인 개인의 가족이 희생자가 된 경우도 흔했다고 한다. ‘대살’이라는 논리에 따라 이미 준비된 혐의자 목록의 인원수와 처형된 인원수가 일치해야 하므로 혐의자 본인이 없을 때는 가족 누군가가 대신 그 벌을 받아야 했던 게다. 참으로 잔혹한 학살의 역사다.
『전쟁과 가족』(권헌익, 2020)에서 한국전쟁은 “이념적 상호부정이라는 전지구적 차원과 배타적 주권이라는 민족적 차원이 민간인에 대한 폭력이라는 장에서 치명적으로 결합되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야만적인 분쟁을 초래해 수많은 공동체들의 도덕질서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정치적 분단선 양쪽으로 가족이 흩어졌고, 그 비극은 지금까지도 가장 오랜 한국전쟁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이 전쟁에서 양민 학살이라는 무고한 죽음의 근거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 또한 숙제로 남겨져 있다.
제주도 남서부 상모리 공동묘지를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고도 부른다. 백명의 조상이 살던 공동체에 어떻게 한사람의 후손만 남게 되었단 말인가? 권헌익 교수는 “‘백조일손’은 가계가 거꾸로 선 이례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고인을 애도하는 친족의 규범이 대량학살이라는 현실을 맞아 가계의 협소한 단위를 넘어서 공동체 유대를 확장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절박한 요구로 읽힌다.”고 했다.
해서 한국에서 정치민주화의 역사는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 희생자를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 권리의 표현이기도하다.
현재 한반도에는 ‘한 민족 두 국가’라는 역사적 사실이 ‘한 민족 한 국가’라는 역사적 부인과 더불어 존재한다. 해서 우리에게는 ‘평화공존’이 우선이고 ‘통일’은 그 다음의 과제다. 『전쟁과 가족』에는 “한국전쟁 서사에서 나타나는, 원초적이고 전(前)정치적인 가족공동체의 이미지는 압도적인 국가주권의 정치세계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둘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한국전쟁사의 친족이 긴 냉전시기 내내, 역사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깊은 상처를 입은 존재라는 사실이 그냥 가려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제주에서 4․3 희생자 70주년 추모식에 이어 ‘해원상생(解寃相生)큰굿’이 일주일간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을 위해 열렸다. 4․3 추모제는 희생자의 혼령을 부르는 것으로 이렇게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삼춘,
조캐, 나 왔네.
삼춘!
조캐!
오늘은 저승의 모든 삼춘과 이승의 모든 조캐가 한자리에 모였네.
추모의 현장에 청배된 모든 망자의 영혼은 살아 있는 제주인 모두에게 삼촌인 것이다. 권헌익의 『전쟁과 가족』은 이렇게 마무리 짖는다.
코리아에서의 학살 이후 친족의 정치적 삶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친근한 존재로 기억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뒤르켐이 영혼의 권리(the rights of soul)라고 정의했던 그 권리를 찾기 위한 길고 지난한 싸움이었다. 영혼의 권리란 죽은 이에게는 친족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이고, 살아 있는 이에게는 정치적 사회 내의 시민권 회복과 동일한 의미다. 내전의 무시무시한 손님이 문을 두드려댔던 그 순간으로부터 두 세대가 흐른 지금 이 섬에서는 친족의 에머티(우애)를 되찾으려는 수많은 열망이 일구어낸 평화를 향한 긴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 이 환경에서 친족의 평화는 평화로운 사회의 이상과 동일하다(권헌익, 2020, p.265).
남북, 북남 간에 헤어진 친족의 평화는 곧 민족의 평화일 터이다.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이 반드시 ‘해원’(解寃)으로 끝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남남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 누구 탓인가? 뭣 때문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