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작가의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2020)을 읽고
구미 출신의 해방둥이인 박도 작가는 구미중학에서 나랑 함께 공부한 옛 학우다. 이 땅의 해방둥이는 모두가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우리에게 광복 75주년은 참으로 굴곡진 역사였다. 같은 해방둥이이지만 개인적 미시사는 천차만별이다. 개인의 미시사는 당대 역사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길잡이가 된다. 내가 보기에 작가 박도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온몸으로 체현해온 ‘역사적 반영’이라 해도 좋겠다. 박도 작가가 자전적 이야기로 엮은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2020)은 청소년기에 그가 품었던 ‘교사․작가․기자’가 되는 꿈을 평생 어떻게 실천해 왔는가를 담은 진솔한 회고록이다.
박도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게 <명심보감>을 익히면서 이미 문사(文士)가 될 바탕을 익혀온 셈이다(『태리지』에서 본래 선산은 문사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랬다). 박도의 아버지는 일본서 공부한 개명한 지식인으로 광복 직후 대구 10․1항쟁 이후 구미에서 청년행동대원으로 참여한 이래로 평생을 야인으로 살아야 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 박기홍 선생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하에서 고향 선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때부터 박도 집안은 갑자기 기울어져 가족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나는 중학교 때 박도가 귀공자 타입이어서 그냥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고 공부한 줄로 알았는데, 그는 큰고모 댁에서 중학을 다니다가 중2 때부터는 할머니랑 남의 집 행랑에서 공부한 것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4․19 혁명 후 그의 아버지가 서울 민주당사에 적을 두고 활동하게 되자 박도는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하게 되었으나, 5․16 쿠데타 이후 아버지가 다시 구금되는 화를 당하면서 그의 가정은 또 한 차례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박도는 다니던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신문 배달고학생으로 4년 만에 겨우 졸업했다. 청소년기에 겪는 역경은 일생을 통한 자기 정체성 정립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다만 그 정체성이 어떤 쪽으로 작용하느냐에 따라 일생이 빛과 그림자로 갈린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박도는 지독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60년대 중반에만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전체 학령기 중에 상당히 낮았다. 어려운 과정에서도 박도는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장차 교사가 되고 작가가 되는 꿈을 다져 갔다. 그는 대학을 마무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ROTC 학군단에 입단해서 고되고 삭막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방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꼬박 24개월간 군복무를 했다. 박도는 장교로서 전방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분단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었을 게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릭슨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치는 전체 생애 과정을 8단계로 나눠 제시했다. 이를 좀 더 압축하면 사람의 일생은 크게 3기로 나눠 볼 수 있다. 나서 첫 20-25년은 성장기(1기)이고, 중간(2기) 30-40년은 생산적으로 일하는 시기라면, 60대 이후(3기)는 인생을 마무리하는 노년기다. 해방둥이 박도에게는 대학을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어 군복무까지가 성장기이고, 그 후 교직에서 30 여년 생활한 것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생산적이자 공적으로 일한 시기다.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원주 치악산 자락에서 글쓰기에 몰두하는 시기가 그에게는 생활연령으로 노년기에 해당되지만, 작가로서는 집중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하는 원숙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귀하고 어려운 일이 차세대를 길러내는 교직이라고 본다. 교육은 인류문명사가 시작된 이래로 그 문명을 진화시키는 데에 가장 근원적인 기능을 담당해 왔고,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내면적․본질적 가치를 지닌다. 해서 칸트는 인간을 교육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유일한 존재로 규정했다. 박도는 서울에서 중등학교 평교사로 30여년을 교실 안팎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전형적인 교사상을 구현하고자 노력한 선생이고자 했다.
박도는 초등학교 때 풍금 잘 치는 초임교사를 스승으로 평생 기억하고 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홍준수 선생님을 평생의 은사로 가슴에 담고 있다. 학교교육이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마지막 결판은 그 교육을 받은 학생이 평생 존경하는 스승을 가슴에 담고 있는지 않는지에 달려 있다. 박도는 잘 배웠기에 그의 제자들에게 잘 가르친 교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어떤 교사로 살았으며, 교단을 떠나서도 스승으로서 그의 영향력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산문집 <마지막 수업>(박도, 2019)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책 마무리에서 박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다. 제자들이 사는 세상은 참 아름답다. 나는 그들이 있었기에 늘그막에도 기쁨 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노교사의 모습이다.
작가로서 박도는 비교적 늦둥이지만 날 세는 줄 모르고 역작을 지속적으로 집필하고 있다. 그의 저작은 산문집이 주류이지만 장편소설, 역사서와 사진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두 40 여종 이상이나 된다. 나는 그의 장편소설 <약속>(2015, 눈빛)을 통해서 중학교 졸업 후 55년이나 지나 출판사를 통해 확인 후에 그를 만나, 고향 옛 학우와 인연을 노년에 되찾는 행운을 가졌다. 소설 <약속>은 6․25 전장에서 피어오른 청춘남녀의 사랑과 분단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전반부분을 읽으며 이 작품은 박도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쓸 수 없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그는 <약속>을 기필하기 위해 수년간 자료를 모으고 2010년에 시작해서 꼬박 4년에 걸쳐 이 작품에 매달렸다. 박도는 이 작품을 조국통일 제단에 바친다면서, <약속>이 한 줄기 시냇물로 통일의 큰 강으로 흘러가기를 염원했다.
박도의 실록소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만주 제일의 항일파르티잔으로 활약한 <허형식 장군>(2016, 눈빛)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허형식(1909-1942) 장군은 동북항일군 제3로군 군장이자 총참모장으로 김책과 절친한 사이였다. 박도는 허형식 장군이 구미 금오산 사람이란 걸 알고 뛰는 가슴으로 허형식 장군 희생 기념탑을 답사하고 왔다. 박도는 작가이면서 기자다. 그는 발로 현장을 직접답사하고 글을 쓰는 게 몸에 베인 사람이다. 신영복 선생은 그의 마지막 저서 <담론>(2015)에서 글쓰기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공감을 불러 일으켜야 하고, 다시 가슴에서 발목까지 이어지는 여정이어야 한다고 했다. 박도의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이어진 작품이다. 해서 그만큼 두루 읽혀지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 호치민은 임종에 임박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끝까지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자주독립의 길을 지키라”고 했단다. 같은 맥락에서 허형식 장군은 “사람은 제 힘으로 살지 못하면 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베트남이 세계 패권국인 미국을 물리치고 끝내 자주독립을 쟁취한 끈질긴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2020)의 예고편으로 나온 게 자전적 소설 <용서)(2018)가 아닌가 싶다. <용서>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고백이자 참회의 이야기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이 있기 마련이고 차마 말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열쇠 말이 작가 박도에게는 <용서>가 되었고, 그 후속편으로 자서전적 미시사로 정리된 회고록이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이다. 여기서 작가는 어머니와 생이별한 뼈아픈 사연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위해 살아 있는 자식으로서 처절한 노력을 어떤 식으로 해왔는가를 고백한다. 그런 일련의 노력 자체가 어머니의 영혼을 위무하는 자식의 도리였을 터이다.
보병장교로서의 박도, 참교사로서의 박도, 작가로서의 박도 위에 기자로서의 박도 모습이 다시 오버랩 된다. 회갑을 코앞에 둔 나이에 박도는 인터넷 종합일간지인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참여한다. 당시만 해도 기성세대들은 인터넷 매체를 거의 외면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시민기자로 참여한 이래로 지금까지 1,600 여 꼭지에 해당되는 방대한 기사를 송고했다. 놀라운 저력이다. 언필칭 21세기는 경험하면 기록하고, 기록하면 저장해서 지구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다. 박도는 전형적으로 21세기형 작가이자 대기자다. 어쩌면 작가인지 기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게 그의 장점(특장)인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참여한 게 인연이 되어 박도는 2004년에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을 찾아가 광복 후 미군정 3년과 한국전쟁에 관련된 사진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5년간 무려 네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워싱턴 DC 근교에 있는 NARA에 가서 자료를 검색하고 어렵게 사진 스캔을 떠왔다. 나라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뜻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자발적으로 이 일을 한 게다. 해서 나는 작가 박도에게 “자네는 이 일만으로도 이 세상에 온 밥값을 단단히 한 셈이다.”고 격려했다.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박도 작가에게 “앞으로 뭐 할 거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지금도 그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대부분 자판기 앞에서 글을 쓰고 있다. 아마도 그의 서재에서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는 날이 삶의 정점을 딱 찍는 날이 될 게다. 부디 꿈이 삶이 되고, 삶이 곧 글이 되는 그런 날로 그냥 이어지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