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용론에서 본 수운의 '불연기연'
체용론(體用論)은 동양철학을 포괄하는 핵심개념이다. 여기 ‘체용’의 체(體)는 나무로 말하면 뿌리에 해당되고, 용(用)은 줄기와 가지에 해당된다. 또 우리 몸으로 말하면 ‘체’는 몸통이고, ‘용’은 몸짓에 해당된다. 19세기에 중국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력에 대응하여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말했다. 즉, 뿌리(즉, 道)는 중국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되, 서양의 기술은 적극 수용하여 활용하자는 게다. 같은 맥락에서 구한말 개화파는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말했다.
강진석은 『체용철학』(2011)에서 서양에서는 기나긴 존재(sein)의 역사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천도(天道)의 역사가 있다고 했다. 동양 사람들은 사계절이 순환하고 만물이 생동 화육하는 가운데 하늘의 도를 깨달았다. 동양에서 도(道)는 문자 그대로 몸소 실천을 통해 닦고 넓혀가는 ‘길’의 연장이었다. 해서 『중용』첫 머리에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품부되어 있는 게 성(性; 본래성)이고, 이 본래성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도(道; 길)이고, 이 도(길)를 부단히 닦는 과정이 곧 교육이랬다.
여기 도(道)는 천도(天道)이자 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인 인도(人道)이다. 해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다. 강진석(2011)은 이 도는 본체와 작용의 두 면을 지니는 체용(體用)의 구조로 되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체용’으로 보는 동양의 ‘도’는 형이상학적 본체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본체와 작용, 본원과 과정, 뿌리와 가지, 리일(理一)과 분수(分殊) 등의 양대 영역을 아우르는 하나의 통째(全體)이다. 따라서 이 도는 하늘의 도이자 동시에 사람의 도이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고요한 실체이자 동시에 만물을 화육하고 생성하는 작용이며, 밤하늘에 고요히 떠 있는 달 자체이자 만 갈래 강 위에 떠 있는 달이기도 하다(강진석, 2011, p.15).
동양철학에서 ‘체’는 사람의 ‘몸’이라는 원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형이상학에까지 끌어올렸다. ‘용’은 사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의미와 사물의 ‘작용’이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체용은 언제나 안과 밖의 균형을 지향한다. 해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함께 아우른다. 동양에서 철학의 황금시대는 19세기 ‘서세동점’과 함께 그 막을 내렸다. 서세(西勢 )에 대응한 방편으로서 ‘체용’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옷을 입었다. 하지만 ‘중체’는 ‘서용’과 모순을 일으켰고, 급기야는 서체(西體)에 굴복하는 형국을 맞이했다. 21세기로 넘어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굴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체에 기댄 중체가 아니라 서체와 당당히 맞서는 중체가 떠오르고 있다. 우리의 경우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서도서기’의 신식민적 과정을 거쳐, 과연 서도와 맞서는 혹은 서도를 포섭하는 동도가 언제부터 복원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불교철학자인 박성배 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2007)에서 체용론을 몸(體)과 몸짓(用)의 논리로 말했다. 그는 지도교수로서 학생들과 함께 성철 스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너희들은 정신이 용(用)에 쏠려 있구나!”라는 그 말에 자신이 타고 다니던 배는 항해 도중에 난파를 당했다고 고백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몸’을 찾는 길로 전환을 했다. 그는 ‘몸과 몸짓의 논리’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다른 질서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우주적인 질서’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개체적인 업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체가 우주 밖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체는 우주의 질서를 거역하는 경우가 있다. …(중략) 이 말은 사람의 진짜 주인은 개체적인 업이 아니라 우주적인 질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속에서 우주의 질서를 발견하고 확인할 때 사람은 달라지는 것 같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몸의 발견’이라고 부른다. 몸을 발견한 다음 사람은 달라진다. 그땐 개인의 손익을 넘어서서 우주의 질서 쪽에 무게를 두게 된다. 그러면 개체는 오히려 평화로워진다. 업이라는 이름의 고질화된 몸짓의 속박에서 벗어나 ‘몸으로 돌아가자’ 라고 외치는 것은 우리가 원래 우주의 산물이니까 우주의 질서에 따라가자고 하는 것이다(박성배, 2007, 서문 P.7).
우리는 지구에 사는 75억 인구 속의 하나이고,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 행성의 하나다. 태양은 은하수를 이루는 1,000억 개의 별 가운데 하나다. ‘별 먼지’ 보다도 보잘 것 없는 인간은 우주의 온생명 속의 한 낱생명으로 존재할 뿐이다. 해서 개체로서 몸은 가장 구체적이면서 가장 우주적인 표현이다. 우리 몸은 우주적 일체자이면서 동시에 개체자이다. 그는 우리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 몸짓 문화와 결별하고 몸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몸짓 문화에 휘둘리는 우리네 삶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즉 생각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걸 탈피하자는 게다. 해서 기존의 내가 깨져야 깨침이 온다.
본래 체용의 논리에서 보면, 몸이 몸짓이고 몸짓이 몸이어서 ‘둘 아님’(不二)이다. 뿌리 깊은 나무라야 가지와 잎이 튼실하고 바람에 쉬이 뽑히지 않는다. 나무에서 뿌리와 가지는 몸과 몸짓이 둘이 아님과 같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몸과 몸짓이 서로 떨어질 수 없듯이 동양철학에서 체(體; 몸)와 용(用; 몸짓)은 항상 그렇게 맞붙어 있다.
『대승기신론』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큰(불퇴전의) 믿음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씨앗인 여래장(如來藏)을 몸에 내장하고 있다는 게다. 해서 본래 하나인 마음(一心)이지만 바람에 물결이 일뿐 물과 물결은 둘이 아니라는 게다. 본래 하나의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참으로 그러한 진여(眞如)의 문과 부단히 생멸하는 생멸의 문이 서로 맞붙어 있다는 게다. 그래서 이문 불상리(二門 不相離)다. 즉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은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둘이 아닌 문(不二門)이라는 게다. 여기 ‘불이문’은 체용론에서 체(體)와 용(用)이 둘이 아님(不二)과 같다.
이런 체용철학의 연장선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을 이해하고 해석하자는 게 필자의 논지다. <불연기연>은 524자의 한문으로 된 짧지만 난해한 글이다. 이것은 수운 선생이 체포되기 한 달 전인 1893년 11월에 절박한 심정으로 남긴 마지막 글이다. 종교적으로 동학의 가르침은 <논학문>에 집약되어 있다면, 철학적으로 동학의 논지는 <불연기연>에 집약되어 있다.
수운은 <불연기연> 서두에서 “천고의 만물에는 각각 이름이 있고 그 형상이 있도다(而千古之萬物 各有成各有形). 보이는 바로 말하면 그렇고 그런 듯하지만(所見以論之則 其然而似然), 그로부터 온 바를 헤아리면 멀고도 심히 멀도다(所自以度之則 其遠而甚遠).”고 했다. 즉 보이는 형상으로 말하면 모두 ‘기연’이지만, 그 근원을 따져 헤아리면 아득해 ‘불연’이라는 게다.
수운은 인간존재를 비롯해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라는 게다. 불연은 기연과 대립적이지만, 기연인 듯하나 불연인 사태가 있고, 불연인 듯하나 기연인 것도 있다. 따라서 <불연기연>의 논리에서는 기연에서 불연으로의 길뿐 아니라, 불연에서 기연으로 통하는 길 또한 열려 있다.
이를테면 내 부모가 누구인지는 분명 확인 가능한 경험적 기연이지만, 내 존재의 본래적 근원이 뭔가를 헤아려 보면 불연에 맞닥뜨리게 된다. 불가에서 흔히 무엇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 라고 묻는다. 내 본래면목의 근원은 아득한 불연의 문제이지만, 이 화두를 붙잡고 거듭 정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문득 깨침을 얻어(頓悟), 그 깨침을 놓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수행(漸修)하는 가운데 그게 내 삶에 체현되면 기연이 된다. 『용담유사』의 <흥비가(興比歌)>에 이렇게 노래한다.
이 글 보고 저 글 보고
무궁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不然其然) 살펴내어
부야(賦也) 흥야(興也) 비(比)해 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수운은 <흥비가>에서 우주 이법의 무궁한 이치를 알기위해서는 ‘불연기연’을 살펴내야 한다고 했다. 즉 우주의 무궁한 이치를 다만 ‘기연’으로만 보지 말고, ‘불연’으로도 살펴야 그 이치를 바로 터득할 수 있다는 게다. 하여 수운은 무궁한 우주의 이치를 ‘불연기연’으로 살핌으로써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를 깨칠 수 있다”는 게다. 풀잎 끝의 이슬(草露)과 같은 유한한 삶을 사는 ‘내’가 우주의 무궁한 이치를 ‘불연기연’으로 살핌으로써, 무궁한 우주와 더불어 내 스스로가 ‘무궁한 존재’임을 깨치게 된다는 게다.
수운에게 ‘불연기연’은 삶과 죽음을 뛰어 넘는 불이(不二)다. 왜냐하면 그 때 나의 존재성은 무궁한 한울님 속에 무궁한 나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침으로 ‘수심정기’(守心正氣)의 닦음이 내 몸과 맘속에서 체현될 때에 나로부터 개벽의 세상이 열리게 될 터. 오문환은 『다시개벽의 심학』(2006)에서 “내 마음이 하늘 기둥에 매이면 내가 하늘이 된다.”면서, “마음이 하늘에 자리 잡으면 이 사람은 영생하고, 마음이 오늘에 매이면 내일이면 죽고, 마음이 몸에 매이면 길어야 100년을 산다.”(오문환, 2006, 112쪽)고 했다.
윤석산은 『용담유사 연구』(2006)에서 “『용담유사』의 여덟 편 가사는 모두 이 <흥비가> 마지막 부분에 노래한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는 가르침에 이르기 위한 것이고,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 이치를 ‘불연기연’으로 살피는 것으로 모든 것을 귀결 시킨다.”고 했다. 그는 같은 책 「불연기연 연구 서설」(2006)에서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한울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나의 본성을 회복하고, 동시에 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한울님을 깨달아 유한한 존재인 ‘나’가 곧 무한한 존재인 ‘한울님’임을 깨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수운이 내놓은 ‘시천주’(侍天主)에 이르는 것이다. 즉 수운의 불연기연은 바로 ‘시천주’에 이르는 중요한 인식의 방법 또는 논리이며, 동시에 이 시천주를 통하여 후천의 새 삶을 열어가는 동학적인 방법론이라 하겠다(윤석산, 2006, 273쪽).
그는 한울님을 내 몸속에 모시는 ‘시천주’의 방법론으로 <불연기연>을 말한다. 여기 ‘시천주’의 ‘시’(侍)는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外有氣化),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깨달아 옮기지(어기지) 않는 것(一世之人 各知不移)”이다. 즉 한울님을 내 몸속에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 한울님의 신령한 마음을 품부 받아 회복하고, 밖으로는 우주의 혼원한 기운과 하나가 되는 삶의 체현이다.
위에서 ‘각지불이’(各知不移)의 ‘지’(知)는 곧 깨침(覺)이고, ‘불이’(不移)는 변하지 않고(어김이 없이) 실천(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실천이 내 삶에서 체현될 때 유한한 존재인 내가 무한(무궁)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즉 내가 ‘시천주’에 이르는 길이 곧 ‘불연기연’이라는 게다. 유한한 내 존재(being)가 ‘시천주’에 이르는 무한한 과정(becoming)은 ‘불연기연’이다.
우리가 동학을 종교와 철학이 만나는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불연기연> 공부에 좀 더 천착해야 할 게다. 윤석산(2006)은「불연기연 서설」에서 “독자적인 동학 연구방법을 정립하기 위해 ‘불연기연’에 대한 폭 넓은 연구가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했다. 그는 동학을 ‘기연의 논리’ 중심으로 파악하려는 기존의 연구동향을 나무란다. ‘불연기연’의 논리와 인식 틀에 의거하여 동학의 종교적․철학적 보편성이 좀 더 촘촘히 짜여야 할 터이다.
필자는 ‘불연기연’의 논리와 인식체계에서 동학의 종교다움, 철학으로서 동학의 철학다움을 위해 ‘불연’을 체(體)로 삼고, ‘기연'을 용(用)으로 삼는 것을 제기한다. 마치 몸과 몸짓에서 몸을 체로 삼고 몸짓을 용으로 삼듯이 말이다.
도올 김용옥은 『노자가 옳았다』(2020)에서 ‘늘 그러한 도’(常道)의 인식을 통해 수운의 <불연기연>이 함의하는 역사적 맥락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연不然’이란 ‘그러하지 아니함’이요, 그러하지 아니함이란 시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인과론적 인식체계를 벗어나는 형상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 사태일수도 있고,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신비적 사태일수도 있고, 차세간을 넘어서는 피세간적인 사건일수도 있다. 그에게 이 불연이라는 개념이 주요저작의 테마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일생을 씨름하여 온 ‘서학’이라는 신문명의 성격이 새롭고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특징을 총결 짓자면 결국 ‘불연의 체계’(the System of Not-Being So)라는 것이다. …(중략) 그는 서학을 오히려 조선 문명의 위기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것을 막아내는 우리 고유의 ‘동학’(Eastern Learning)을 창안하고 유포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과업이요 사명이요 천명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김용옥, 2020, pp.55-56).
그는 ‘불연기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센텐스라 했다. ‘불연’이 주부이고 ‘기연’이 술부인 한 문장이라는 게다. 해서 불연이 곧 기연이라는 게다. 즉 “그러하지 아니함은 그러그러함이다”는 게다. 불연은 궁극적으로 기연이라는 수운의 과감한 주장은 “19세기 후반으로부터 21세기를 관통하는 모든 사상운동의 기저가 되는 통찰이이요, 케리그마(선언)인 것”이라 했다.
도올은 동아시아사상의 제1기원을 ‘주축의 시대’인 노자와 공자에서 찾고, 제2기원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신유학에서 찾는다면, 제3기원은 서구문명에 대응한 ‘동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해서 동학은 새로운 주축의 도래로 ‘다시개벽’을 제기했다는 게다. 동아시아사상사에서 동학의 ‘다시개벽’을 제3기원으로 설정한 데서 우리는 체용철학의 연장에서 수운의 ‘불연기연’을 재음미하고 성찰하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 서세(西勢)의 시대는 가고 동도동기(東道東器)가 도래하고 있다. 하여 역사는 불연이 기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