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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점(본래성)으로 돌아가기

평촌0505 2020. 11. 19. 17:57

내 존재의 원점은? 나의 본래자리는? 해방둥이인 내가 70중반을 넘어서며 새삼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난 회갑이 지나고서야 내 정신이 좀 들더라.” 그러고는 사족을 단다. 그동안은 내 앞 가름하기 바빴고 자녀들 건사하기도 벅찼다고. 지나고 보니 40년 무사히 교수노릇 마쳐 정년 했고, 40대 중반의 아들 딸 2남매도 이제 자기 앞 가름은 하게 되었다. 나이 들면서 대과(大過)없이 여기까지 온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이에 별일 없다는 건 잘산 인생이라 해도 좋을 게다. 근데 그게 정말 잘 사는 인생일까? 내심 결코 수긍하기 어렵다.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삶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노자는 “되돌아봄이 도(道)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랬다. 부단히 재귀적으로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추하는 과정에 본래의 나(眞我)가 존재하는 게다. <중용> 첫머리에는 “하늘이 명하는 것이 이른 바 본래성”(天命之謂性)이랬다. 여기 하늘의 지엄한 명령은 부단한 현재진행형이고, 그런 하늘의 명령으로 모든 인간에게 품부되어 있는 게 본래성(human nature)이다. 하느님의 속성이 내속에 품부되어 있으니,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人是天)이랬다. 해서 동학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휴머니즘의 극치를 드러낸다.

 

결국 나에게 ‘원점으로 돌아가기’는 ‘본성회복’에 다름 아니다. 해서 <중용>은 이 “본래성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인간이 가야할 마땅한 길”(率性之謂道)이랬다. 그리고 이 길은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없는 것이랬다. 그럼에도 그 길(道)에서 나는 다반사로 벗어났다. 그 길을 벗어났다는 건 단적으로 내 정신이 아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게다. 회갑 지나고서야 내 정신이 좀 들더라는 고백은 내 본래성이 엉뚱한 데로 마실 나가는 것을 나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는 자각이다. 내 자신을 향해 영혼을 팔아먹지 않겠다는 다짐일 수 있다.

 

불교에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있다. 깨침은 단박에 오는 것이지만 그 깨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게다. 근데 살아보니 ‘돈오’(頓悟)보다 ‘점수’(漸修)가 훨씬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지난하다. 그래서 도(道)라는 것은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없는 것이며, 잠시라도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道)가 아니라는 <중용>의 말은 참 무서운 말이다.

 

어쩜 우리는 때와 먼지 속에 몸을 담고 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때와 먼지도 문제지만 내 자신이 거기에 보태는 때와 먼지가 진짜 문제다. 해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내로남불이 문제다. 세상의 때와 먼지를 탓하기에 앞서 나부터 때와 먼지를 더 보태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다른 사람보다는 때와 먼지를 적게 일구는 사람이어야 할 터. 그러기 위해 적어도 나는 때와 먼지를 보태는 일보다는 그것을 닦아 내는 일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어야 할 게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이른 바, 수신(修身) 혹은 수행(修行)이 문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남긴 말도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라”는 것이었다. <중용>에도 성(誠) 자체는 하늘의 도(道)이지만, 성하고자 노력하는 것(誠之)은 사람의 길이라 했다. 해서 천하의 지성(至誠)이래야 자기의 본래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고,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다른 사람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고 했다.

 

진기성(盡己性)이어야 진인성(盡人性)이 가능하다. 그래서 ‘지성능화’(至誠能化)다. 지극한 정성이래야 자기 내면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있다는 게다. 해서 <중용>에서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을 말한다. 지성은 쉼이 없다는 게다. 쉼이 없는 것은 자연이다. 흐르는 물처럼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곧 원점(본래성)으로 돌아가기다. 아마 평상심은 곧 본성회복이고, 그게 곧 노자가 말하는 늘 그러한 도(常道)일 터.

 

공자도 “아! 진실로 도(道)가 행하여지질 않는 구나!”고 개탄했다. 이른바 ‘우환의식’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우환을 끊임없이 깔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보다. 해서 아는 게 병이랬다. ‘우환’(憂患)이라는 끊임없는 각성을 매개로 본성회복은 곧 신성회복으로 이어진다. 여기 동양의 우환의식이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 의식변혁)와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원점으로 돌아가기는 당연하지만 지난하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지독한 패러독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