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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촌0505 2020. 11. 23. 05:40

주말에 딸이 알려주어 TV에서 강경화장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보았다. 강경화장관이 유창한 영어로 <총․균․쇠>의 저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와 화상 인터뷰하는 내용이 보기에 좋았다. <미래수업>이라는 프로그램에 걸맞게 강 장관이 코로나 환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긴요하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자신의 철학 담론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라는 어법을 즐겨 구사한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였다. 칸트는 계몽적 이상주의자로서 우리 인간은 현실적으로 많은 자기모순을 안고 있을지라도 끊임없이 순수한 이성적 판단에 자기를 위탁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유일한 동물이랬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인간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의 왕국이므로 어떤 경우에나 결코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즉, 현실적으로 인간은 이런저런 이유로 수단적 도구로 취급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론적 존재로서 존엄성을 갖는다는 게다.

 

그러고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지금까지 동서양 철학담론을 가로지르는 접속사의 구실을 톡톡히 해온 어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굳이 따지자면 서양철학보다는 동양철학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법은 훨씬 자연스럽게 통용되어 왔다. 이를테면 개념적으로 음과 양은 상반적(양은 발산적이고, 음은 수렴적이기에)이지만 결국 서로 상생하는 관계로 엮여 있다. 해서 조동일 교수는 ‘생극론’(生克論)에서 상극이 상생이요 상생이 상극이랬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와 상통하는듯하지만 다르다. 음양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변화의 과정 자체다.

 

노자의 <도덕경> 첫 머리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있는 그러한 도가 아니다)에서 핵심은 늘 그러한 ‘상’(常)이다. 늘 그러한 도(道)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자체이므로, 변화 그 자체만이 변하지 않는 늘 그러한 도(常道)의 길이라는 게다. 해서 인간존재는 그냥 ‘being'의 존재가 아니라 끈임 없이 형성되고 진화하는 'becoming'으로서의 존재가 그 본질이다. 인간만이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양기독교에서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로서 섬김의 대상이고 인간은 구원의 대상으로 규정되지만, 동양에서는 하느님의 속성이 우리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고 본다. 해서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人是天)이랬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인간존엄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중용> 첫 머리에도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인간의 본래성(天命之謂性)이요, 이 본래성에 따르는 것이 인간이 가야할 마땅한 길(率性之謂道)이고, 이 길을 부단히 닦는 과정이 이른바 교육(修道之謂敎)이랬다. 인간에게 교육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인간사의 현실적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짜깁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공교육은 이래저래 상처투성이로 구겨져 있다.

 

불교에서 인간은 본래부처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왜 고해(苦海)를 헤어나지 못하는가? 이른바 욕망의 바이러스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탐진치(貪瞋痴), 즉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을 삼독(三毒)이랬다. 해서 본래부처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탐진치’의 삼독으로부터 해탈해야 한다. 지눌 스님은 “땅에 걸려 넘어진 자는 반드시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생멸하는 마음에 끌려 넘어진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게다.

 

<대승기신론>에서 인간의 마음은 개념적으로 참으로 그러한 진여(眞如)가 드나드는 마음의 문과 부단히 생멸하는 마음이 드나드는 문으로 구분되지만, 그 두 마음은 단지 개념적으로 구분될 뿐이지 실재로는 하나의 총체로 서로 맞붙어 있기에 ‘이문 불상리’(二門 不相離)라 했다. 즉 개념적으로는 두 개의 문으로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그 두 마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맞붙어 있기에 ‘불이문’(不二門)이랬다.

 

지금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법은 주로 부정적인 조건일지라도 그것을 긍정적인 쪽으로 전환하는 데에 무게를 두고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접속해 보면, 참으로 난감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절체절명의 문제인 ‘기후위기’를 놓고 보자. 산업혁명 이후 경제성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 중심의 경제체제는 우리에게 여전히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날이 갈수록 부정적인 쪽으로 기운다. 그게 현실이다. 과학기술 문명의 순기능은 과연 그 역기능을 상쇄할 수 있는가?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역기능의 문제가 심각한 부담으로 안겨지고 있다.

 

지금 인류는 공멸이냐 생존이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인류세가 저질은 공멸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류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 갈 지혜를 과연 발휘할 수 있을까? 풀리지 않는 숙제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성 자체를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미래는 존재하는가? 거듭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