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는 삶
요즘 검찰총장이 징계대상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서 사람은 겉 다르고 속 다르게 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법치주의를 내세워 강변하겠지만, 남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지도자로서 흠결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사람이 자기 양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건 참 어렵다. 해서 “겉 다르고 속 다르다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참 무서운 말이다. 재미 불교철학자 박성배 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2007)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의 청산은 누구에게나 시급한 일이다. 겉과 속이 다르면 앞과 뒤도 맞지 않게 되어 있다. 거짓과 속임수를 청산하지 않으면 위선자 또는 이중인격자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몸짓 문화의 결정적 한계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몸짓 문화와 결별하고 몸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지도자들, 특히 정치인들 가운데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인격자가 많다. 제 앞 가름도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노라고 팔 걷어 부치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이다. 이즘 나는 정치인들이 나대는 꼴이 보기 싫어 뉴스도 잘 보지 않는다. 그 대신 한겨레신문과 인터넷 매체 중에 마음에 드는 기사(기후위기, 코로나 환란 등)를 골라 집중적으로 본다.
근데 박성배 교수가 “나는 몸짓 문화와 결별하고 몸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좀 더 심층의 도덕적․종교적 함의가 깔려 있을 터이다. 아마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체용론’(體用論)에서 몸짓인 용(用)에 꺼들리지 않고 몸통인 체(體)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일 게다. 원불교를 창도한 소태산 박중빈 선생은 약 100년 전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선언했다. 물질적으로 퍽 궁핍하던 그 시절에 어찌 이런 선언을 할 수 있었는지 참 놀랍다. 세상을 멀리 내다보는 선지자의 눈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는 물질문명의 풍요에 길들여져 사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게다. 그만큼 정신세계가 천박해 졌다는 의미다. 기후변화가 인류생존의 실존적 위기가 되었고, 지금 세계가 코로나 환란의 재앙에 시달리는 것도 결국은 물질문명의 끝없는 탐욕이 가져온 결과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생태적 문명의 복원을 말하지만, 이미 우리는 물질문명이 안겨준 안락에 푹 빠져 있다. 풍요로운 물질문명이 우리 삶에 내면화되어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말았다. 이른바 본말전도의 삶이다.
성철 스님은 정신적 안정과 지혜를 위해서는 가능하면 물질은 최소 필수량으로 줄이라 했다. 절제의 기술은 그만큼 정신세계를 고양시켜 준다. 행복은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데 달렸다. 중생은 본래부처이지만, 거울에 때와 먼지가 끼어 거울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을지라도, 거울의 본질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거울에 겹겹이 끼어 있는 때와 먼지를 걷어내기만 하면, 명경의 투명한 본래기능이 살아난다. 이른바 본래성의 회복이다. 그 때 우리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자기모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불교 최초 경전인 <숫타니파타>(2006)를 우리말로 옮긴 법정 스님은 이 책갈피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 오두막의 한쪽 벽에는 이 책(숫타니파타) 안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 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글귀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두런두런 외우고 있으면 내 속이 한층 깊어지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지낼 수 없다.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이른 바 신독(愼獨)하는 수행의 전형을 보여주는 삶이다. 성철이나 법정은 모두 산중의 수승한 스님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와 먼지가 가득 끼어 있는 세속에서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런 삶의 과정이 곧 열반이자 여래의 길이다. 길은 닦아야 길이 된다.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는 삶, 그것은 우리에게 지난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