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교수의 병실을 다녀와서
금년에 94세인 노교수의 병실을 다녀왔다. Y교수는 우리나라 농교육의 개척자이자 나랑 함께 근무한 대구대의 명예교수 1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대학-교회-가정의 삼각 울타리 속에서 평생을 올곧게 살아오신 분이다. 정년 후에도 내 나름 한 번씩 뵙고 인사를 드리곤 했다. 몇 년 전에는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면서 손주들이 주로 돌봐준 걸로 알고 있다.
작년 여름에 낙상으로 허리를 다쳐 충주에 있는 아들 집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코로나 와중에 해가 바뀌어 어찌 지나시는지 궁금하던 차에 전화를 드리니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들려온다. 교수님의 외아들에게 전화를 하니, 약 6개월 째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고 했다. 마침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는 걸 직감했다.
병문안도 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입원해 계신다는 것을 알고도 그냥 넘길 수 없어 병원을 찾아갔다. 안내원이 외부인의 병실출입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래도 환자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어 원무과에 문의했더니, 환자와의 관계를 묻고는 잠시 면회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조금 기다리니 남자 간병원이 내려와 입원실로 안내를 해준다. 간병원이 미리 깨끗이 씻어준 탓인지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병실에 누워 계신다. 황망히 인사를 드리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하신다. 바쁜데 와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집사람 안부까지 챙기신다. 끝까지 신사다운 면모를 유지하신다.
참으로 정갈하시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신다. 그런 인품이 몸에 평생 베인 탓이리라. 간절한 맘으로 위로의 말을 전하고 두 손 모아 마지막 인사를 드리면서 병실을 나왔다.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오니 뭣보담 내 스스로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런 경우 환자에 대한 위로가 곧 나 자신에 대한 더 큰 위안으로 되돌아온다. 내가 존경하는 노교수에 대한 마지막 발걸음을 함으로써, 그나마 회한을 조금은 줄일 수 있었다.
생사불이(生死不二) 랬는 데,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건가? 노교수의 병실을 나서면서 어찌 죽을 것인가를 나 자신에게 다시 묻게 된다. 일전에 경북대 전총장인 P선생님과 함께 <지식과세상> 강의 뒤풀이로 모처럼 시내 초밥집에서 따끈한 정종을 곁들여 ‘죽음’을 화두에 올린 적이 있다. P총장은 죽음을 어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나름의 원칙과 방법론까지 당당히 말할 만큼 죽음문제에 대해 자기기준을 가지신 분이다. <죽음학>의 입장에서 볼 때, 참 바람직한 일이다.
노스님이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내가 언제쯤 입적할 거라고 알려준다. 그 무렵 죽음을 조절하기 위해 미리 곡기를 끊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예정한 그날 무렵이 죽는 날이 된다는 게다. 그게 어려우면 자기발로 걸을 수 있을 때에 목메는 방법이 가장 편한 죽음이란다. P총장은 스스로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는 데, 그 결행 장소만은 절대 비밀이란다. 말하자면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지 않기 위한 대안적 방편을 스스로 결행한다는 게다. P총장과 가까운 다른 노교수가 그건 허망한 소리라고 되받는다.
현실적으로 장담하기 어려운 게 죽음문제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철저히 방편을 세워두는 만큼, 그냥 당하는 죽음을 얼마간은(혹은 확실하게) 피할 수 있을 게다. 특히 본인도 본인이지만, 가족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도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대단히 소중하다. 그게 노년의 마지막 존엄성이다.
노교수의 병실을 다녀와서 다시 한 번 '잘 죽기'를 생각하게 된다. 죽음학에서 말하길, 잘 살면 잘 죽는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Y 교수님은 잘 살아오셨기에 편안하게 육신의 헌 옷을 벗으실 게다. 그리고 평화 속에 큰 자유를 누리실 게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