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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조 교수님을 추모하며

평촌0505 2021. 3. 31. 16:40

원영조(1928-2021) 교수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일찍이 우리나라 농교육 개척에 헌신해오신 분입니다. 선생님은 1956년 청각장애아 특수학교인 대구영화학교에 교사로 봉직한 것이 인연이 되어 평생을 특수교육학인으로 살아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대구맹아학교를 설립하고 대구대학교를 설립한 이영식(1894-1981) 목사님을 보좌하면서, 이태영(1929-1995) 대구대 초대총장님과 함께 한국사회사업대학 설립과정에 크게 기여하신 분입니다. 특히, 오늘날 진량벌에 대구대학교가 100만평의 캠퍼스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원 교수님은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제가 진량캠퍼스를 들려 걷노라면 이태영 총장님과 원영조 교수님이 남긴 열정과 사랑의 족적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원영조 교수님과 저의 첫 인연은 제가 1971년 대구영화학교에 교사로 입문할 때부터였습니다. 그 후 제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자 교수님은 저에게 청각장애교육 강좌를 기꺼이 넘겨주시면서 친절히 안내해 주셨습니다. 교수님은 끝까지 농교육 현장을 지키고자 대구영화학교 교장직분을 약 10년이나 유지하시다가 늦게 마지못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그 때 저는 원 교수님의 인품과 학자적 양심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원 교수님은 박봉임에도 일본에서 출판되는 농교육관련 전문서적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자비로 모두 구입한 장서 애호가이기도 했습니다.

 

교수님은 대학에서 국제실장 보직을 오랫동안 맡아 오시면서 교수들의 해외연수와 외국 교수의 초빙 등 어려운 일들을 전담해 오셨습니다. 특히 1981년부터 14년 동안 한일 양국 간의 청각장애아교육 강습회를 국가나 사회단체로부터 지원 없이 한결같은 초심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청각장애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교수님은 이런 봉사활동을 몸소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88년 이태영 총장님이 신병으로 미국서 가료중인 어려운 때에 총장 직무대행(1989-1990)을 맡아, 학내 갈등을 봉합․조정하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교수님은 1994년 대구대 명예교수 1호로 정년퇴임을 하시고 27년을 신앙생활 속에 조용히 은거해 오셨습니다. 연전에 사모님이 소천하시고도 정갈한 모습으로 평생 살아오신 주택을 의연히 지키셨습니다. 어쩌다 제가 인사차 방문하면 대문 앞까지 내려 오셔서 떠날 때까지 배송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재작년(2019) 초가을에 김정권, 이상춘, 김용욱 교수 등 다섯 사람이 만나 즐겨 가시던 초밥집에서 함께 담소를 나눈 게 마지막 회식 자리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와중에 어찌 지나시는지 궁금해 전화를 드렸더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들려왔습니다. 외아들인 원종화 선생께 알아보니 뜻밖에도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겁니다. 면회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요행히 원무과에서 잠시 기회를 허용해 주었습니다. 교수님은 병실에서 평소처럼 정갈한 모습으로 따뜻하게 저를 맞이해 주시더니, 그로부터 불과 열흘 남짓 지나 마침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봄날에 육신의 헌옷을 홀가분히 벗으시고, 부디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1년 3월 31일

후학 김병하가 지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