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에바다학교를 다녀와서
평택 에바다학교를 다녀와서
이번에 모처럼 평택 에바다학교를 다녀왔다. ‘에바다학교’ 하면 결코 우리를 편하게 하지 않았던 ‘에바다 사태’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유종열 선생이 「에바다학교 문제의 배경 및 전개과정과 그 특수교육적 함의」라는 주제로 학위논문을 제출하여 대구대 대학원 특수교육학과 리더십전공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논문을 쓴 유종열 박사의 학위취득을 축하하고, 또 이 논문이 나오게 된 역사의 현장인 에바다학교를 직접 방문하고 싶어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일(2011년 8월 29일)을 하나 벌이게 되었다. 원래는 우리 리더십 전공학생 몇이서 조촐하게 학위취득 기념행사를 하고자 했는데, 에바다학교 권오일 교장이 학교 이사진과 학부모, 교사들이 함께 참석하는 것으로 제안하여 행사가 커지고 말았다.
소위 ‘에바다 사태’는 1996년 11월 울분에 가득 찬 농학생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된 이래, 2003년 6월까지 약 7년 동안이나 끌어왔던 우리나라 장애인 시설의 기막힌 사연이 담겨 있는 사태이다. 어째서 평택의 작은 농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장장 7년이라는 세월을 삼켰는가? 지역주민들마저 오랜 세월동안 에바다 사태가 이어지니, “그 에바다가 이 에바다냐?”라고 되물을 정도로 7년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이어져 왔다. 1998년 5월 10일 ‘국민과의 대화’라는 이름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생방송으로 에바다 사태에 대해 “이번에는 납득이 가게 충분히 조치할 테니까 안심하세요.”라고 공언하고도 5년이라는 세월을 끌었으니, 이 나라에 장애인 복지시설의 비리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난마처럼 얽혀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문제이다.
우선 나는 이 논문을 쓰고자 용기를 내어 연구에 착수한 유종열 선생의 용단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나라의 특수교육 문화에서 에바다학교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禁忌)에 해당하는 일이다. 어째서 인가? 우리나라에서 민간 독지가에 의한 장애인 복지시설이나 특수학교 운영은 일종의 성역(聖域)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에서 진작했어야 할 일을 이들이 솔선해서 장애인 복지와 교육을 개척했으므로 이들은 존경 받아야 할 자선사업가 혹은 사회사업가로 칭송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설립자들이 공적 사업을 운영해 오는 동안 대(代)를 이어가면서 가족과 친인척 중심으로 사유화하는 것으로 그들 사업을 성역화(城役化)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친인척 중심으로 비리를 저지르는 일에 묵시적으로 공조하면서 은밀하게 공생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 지도관청이다. 관례화 된 문화의 벽은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 그러니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공개적으로 사태해결을 약속하고도 5년이나 끌었다.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이런 성역(聖域)을 깨는 일에 유종열 선생이 뛰어 들었으니 일단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사실 지도교수로서 나는 진작부터 누군가 에바다 사태를 본격적으로 담론화해 줄 것을 고대해 왔으나 지금까지 아무도 선뜻 나서 주질 않았다. 또한, 이 논문이 나올 수 있기까지 핵심정보제공자로서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현재 에바다학교 교장으로 수고하는 권오일 교장이다. 그는 에바다 사태의 한 복판에서 7년간 가장 가혹한 박해를 받았기에 역사의 신은 바로 그를 오늘의 에바다학교 교장으로 소임을 맡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그의 양어깨에 주어진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다. 이 논문이 나오기까지 권오일 교장은 면담을 통한 핵심정보제공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도교수인 내 자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 논문의 실질적 지도교수였다. 다행스럽게도 권교장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은사(恩師)로 대접해 주니 나로서는 참으로 과분할 따름이다.
오전 행사에 이어 오후에는 ‘에바다투쟁’ 기록영상을 보면서 에바다에 대한 이 나라 특수교육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마음의 부체를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순서에 따라 내게 특강을 부탁하기에 채무자가 채권자 앞에서 심판 받는 심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에바다 문제를 주로 현미경을 들이대고 분석하고 담론화 했지만, 나는 한 발 물러서서 망원경으로 에바다를 해석해 보겠노라고 했다.
19세기 말 이래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은 우리나라의 신교육과 서양의술 보급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 근대특수교육의 성립과 전개과정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거시적인 역사의 망원경으로 볼 때, 거기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한다. 왜냐하면 특수교육은 시혜나 자선박애사업이 아니라 기본권으로서 보장되어야 할 인권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민주화’는 일회적 투쟁이 아니다. 특히 성숙한 시민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품위 있는 민주시민의 끊임없는 성찰적 참여로서의 프락시스(praxis)가 이어져야 한다. 목하 우리가 뼈저리게 체험하듯 민주화보다 민주화 이후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 권오일 교장을 비롯해서 함께 고생한 교사들의 에바다 살리기 운동으로서의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 날 행사의 마지막 순서에서 에바다 학생들의 탁구시범 경기를 보면서 ‘희망의 교육’을 확인할 수 있어 참석한 우리 모두는 행복했다. 나는 아직 장애학생들에게서 그런 영롱한 눈빛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에바다로 인해 참으로 유익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김병하(2011.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