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합일의 삶: 이상과 현실
천인합일(天人合一)은 동양에서 삶의 이상이자 교육의 목적이다. 이상과 현실은 원칙적으로 하나일 수는 없지만 목적으로서 그 접근은 가능하다. 우리에게 ‘천인합일’은 동양적 삶의 이상이지만, 현실적으로 삶의 목적으로 내면화 되는 만큼 그것은 실현가능하다. 이홍우 교수는 『성리학의 교육이론』(2000)에서 ‘성리학’은 성(性)과 이(理)에 관한 철학적 논술이상으로, 또는 그 이전에 하나의 교육이론이라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리학의 마음과 세계에 대한 이론을 (1) 중층구조의 아이디어: 이(理)와 기(氣), (2) 내외동형의 아이디어: 성(性)과 정(情), 그리고 (3) 천인합일의 아이디어: 성(誠)과 경(敬)으로 집약했다. 그 내용이 좋아서 내가 거듭 읽고 인용했다. 좋은 책은 다시 읽을수록 맛이 우러난다. 이제 『성리학의 이론』(이홍우)은 내게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 성리학 이론은 하나의 유기적 통합을 이루고 있기에 위에서 말한 중층구조, 내외동형, 천인합일 아이디어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나눈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을 이해할 때는 언제나 상호연관성에 유의해야한다.
그 중에서도 중층구조의 아이디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어서, 이홍우 교수는 우리가 성리학 이론을 올바로 이해하는가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이 중층구조의 아이디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했다. 주역에 의하면, 현상 이전에 존재하는 궁극적 원인은 태극(太極)이다. 태극을 원인으로 하여 음양과 만물이 생긴다는 게 주역의 골격이다. 여기서 태극이 만물의 ‘원인’이라는 것은 나무에 대한 씨앗의 경우처럼 인과적 원인이 아닌 ‘논리적 원인’이다. 논리적 원인은 과학적 발언이 아닌 ‘형이상학적’ 발언이다.
성리학자들이 태극을 ‘理’로 표현한 것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언어적 방편이었다. 여기 理는 옥(玉 )의 무늬로 비유된다. 옥의 무늬는 옥과 함께 그 속에 들어 있다. 옥에 흙이 묻으면 옥이 옥인 줄 모르거니와 옥의 무늬도 묻혀버린다. 중층구조 아이디어의 핵심을 이홍우는 이렇게 말한다.
태극을 理로 바꿈으로써 성리학은 주역이 자아낼 수 있는 횡적 연결(인과적 연결)의 연상을 불식하고 그것을 종적 연결(논리적 연결)의 연상으로 대치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중층구조의 아이디어다. …(중략) 理(즉, 만물의 논리적 원인)와 만물을 이와 같이 ‘중층’으로 파악함으로써 성리학이 이룩한 이론적 성과는 그것이 인간의 삶과 교육에 대하여 가지는 거의 무한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막대한 시사를 드러냄으로써만 비로소 확인될 수 있다(이홍우, 2000, p.14).
위에서 그는 만물의 논리적 원인인 理와 만물 그 자체를 ‘중층’의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그것이 인간의 삶과 교육에 대해 거의 무한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막대한 시사를 함의하는 것이라 했다. 대체 그 막대한 함의라는 게 뭘까? 불학의 <대승기신론>은 하나인 마음이 가지는 중층구조의 아이디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래 마음은 하나이지만 그것은 두 개의 상이한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게다. 그 하나는 참으로 그러한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다른 하나는 현상적으로 파악되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개의 문은 그 각각이 ‘총체’로서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포괄한다. 해서 두 개의 문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二門 不相離)는 게다.
이 두 측면이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두 개의 문이면서 둘이 아닌 문(不二門)이기에,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이것이 마음의 중층구조다. 해서 우리에게 수행의 목적은 참으로 그러한 진여의 상태로 마음을 돌리거나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의 목적으로서 ‘심성함양’은 곧 ‘본성회복’이다.
이홍우는 “기신론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불교의 세계관은 성리학자들이 주역의 아이디어를 성리학의 체계로 해석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뿐만 아니라 “성리학자들은 가변의 생멸계로부터 불변의 진여로 마음을 돌리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 불교사상에서 그들 자신의 관심사인 교육에 관한 굉장한 시사를 발견하고 매료되었을 것”이라 했다.
중층구조 아이디어의 연장에서 성리학에서는 성(性)과 정(情)의 관계를 내외동형(內外同形)의 아이디어로 개념화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도 세계(만물)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중층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리학의 이론에서 보면, 중층구조의 아이디어는 이기론(理氣論)의 기본주장을 드러내는 데에 비해, 내외동형의 아이디어는 성정론(性情論)의 주장을 반영한다. 내외동형의 아이디어를 이해하는 데에 『중용』첫 장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이홍우는 『중용』첫 장을 이렇게 옮겼다.
性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며(天命之謂性), 道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性이 가시화된 형태로 드러난 것이며(率性之謂道), 敎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道를 제도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修道之謂敎)이다. 道라는 것은 잠시도 (사람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 군자가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삼가고 남에게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장 은밀한 것만큼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가장 미미한 것만큼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군자는 홀로 아는 그곳을 삼간다(愼其獨).
희로애락이 표현되기 이전을 가리켜 中이라고 하며, 희로애락이 中에 맞게 표현된 상태를 가리켜 和라고 한다. 中은 천하가 따라야 할 궁극적 표준(天下之大本)이며, 和는 천하에 道가 두루 퍼져 있는 상태(天下之達道)이다. 中과 和의 원리가 완전히 실현될 때 천지는 제자리에 서며 만물은 성장한다(이홍우, 2000, pp.18-19).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사람들에게 품부되어 있는 게 성(性)이며, 이 성(性)에 따르는 게 곧 도(道)이고, 이 도(道)를 부단히 닦는 게 곧 교육이라는 게다. 이홍우는 道라는 것은 性이 가시화된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 했다. 해서 性은 가시화되기 이전의 ‘미발의 표준’이며, 이 점에서 그것은 理와 같은 성격이다. 주희가 性卽理(性은 곧 理이다)고 한 것은 性이 곧 ‘마음에 들어 있는 理’라는 게다.
이어 『중용』에는 희로애락이 표현되기 이전을 가리켜 中이라 했다. 여기서 中은 性과 동일한 ‘미발의 표준’이다. “性이 中으로 특징 지워진다는 것은 곧 性은 희노애락 등 우리가 경험적으로 의식하는 심리상태(즉, 情)의 이전을 가리키지만 희노애락이 올바르게 표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따라야 할 표준이라는 게 있다. 性이라는 것은 情과 함께, 情 속에 있지만 그것은 또한 情에 앞서서, 태어날 때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性과 情은 성리학이론에서 내외동형의 아이디어를 대변한다. 성리학에서 ‘심통성정’(心通性情)은 마음의 내외동형 아이디어를 핵심적으로 집약한 말이다.
마지막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아이디어는 성리학의 교육적 인간상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중용』에서 말하길 교육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인, 도를 닦는 것(修道)이랬다. 이홍우는 性과 관련하여 교육의 과정을 “마음의 핵심부를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다듬는 데에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이랬다. 해서 교육의 목적을 “마음이 (中으로 특징 지워지는) 性을 따르도록 하는 것(率性)으로 규정했다.
그러면 마음이 性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게 ‘천인합일’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이 ‘천인합일’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묻는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중용』1장의 첫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는 게다. 즉, “敎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敎의 내용으로 들어와 있는 道가 추론되며, 이것으로부터 다시 道에 의하여 가시화되는 性이 추론된다. 그리고 그 性은 하늘의 명령”이라는 게다. 우리가 敎를 하늘의 명령인 性에 연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敎의 근거를 性에서 찾는 것은 인간이 敎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바꾸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라는 게다.
『중용』21장에는 1장 첫 머리에서 언급된 性과 敎의 관련성을 誠과 明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중용』 전체 내용 중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난해한 부분이 21장이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이 구절을 도올 김용옥은 이렇게 옮긴다. “誠에서부터 明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性이라 일컫고, 明에서부터 誠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敎라고 일컫는다. 誠하면 곧 明해지고, 明하면 곧 誠해진다.” 여기서 性과 敎가 동일한 과정의 반대쪽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誠이 性을 특징짓는다는 건 誠은 의미상 性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誠은 하늘이 명하는 性과 마찬가지로 중층구조의 위층에 해당되는 ‘표현되기 이전의 표준’ 또는 ‘미발의 기준’을 가리킨다.
유학에서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표준이다. 마찬가지로 유학의 성인(聖人)은 구체적인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관념상으로만 존재하는 완전무결한 인간을 지칭한다. 그래서 “하늘은 바로 성인의 경지요, 성인은 하늘의 의인화(擬人化)”이다. 『중용』20장은 이것을 다음처럼 잘 시사해 주고 있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中略) 從容中道,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誠 그 자체는 하늘의 道이며, 誠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道)이다. 誠은 떠들썩하게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中의 길을 걷는다. 이것이 바로 聖人의 경지다. 誠해지려고 노력한다(誠之者)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가려내어 시종 그것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중용』에서 誠은 ‘천인합일’을 완전하게 구현한 인간의 태도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천인합일’은 오직 관념상으로만 존재하는 聖人에게나 가능하다.
이홍우는 “성인의 誠과 범인의 誠을 각각 ‘개념으로서의 誠’과 ‘표현으로서의 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두 수준 사이의 현상적 동일성은 바로 성인과 범인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볼 근거”가 된다고 했다. 우리 범인은 성인과 완전히 동일한 인간은 아니지만, 자기 속에 다소간 성인의 속성을 품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는 誠해지려고 노력하는 동안 바로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중용』에서 지극한 정성은 하느님과 같다(至誠如神)고 했다.
‘천인합일’에 이르는 삶의 태도로서 성리학에서는 誠과 敬을 말한다. 誠과 敬은 표현의 수준에서는 구분되지만, 개념의 수준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 여기 敬은 자아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 敬의 태도는 誠의 태도와 함께 자아가 세계를 내면화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우리 범인은 그 자신의 세계에서 사는 동안 성인의 誠과 敬을 표현의 수준에서 다소간에 구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사람으로서 살기 위하여 짊어져야 할 마땅한 의무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성리학에서 ‘誠과 敬’은 ‘性과 情’에 의해 규정되는 교육의 목적을 방법의 측면에서 재천명한 것이다. 이홍우는 우리가 ‘천인합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誠과 敬으로 표현되는 교육적 노력을 다음처럼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천인합일’에서의 ‘하늘’은 미발의 표준이다. 인간이 誠과 敬으로 대표되는 온갖 교육적 노력을 기울여 그 ‘미발의 표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는 그만큼 그 표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종교적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성리학의 교육이론에는 이러한 종교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진정한 교육에는 종교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이홍우, 2000, p.38).
필자는 정년기념 세미나에서 내가 지도한 제자들 앞에서 <심층종교와 특수교육의 만남>을 말했다.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교육이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특수교육 실천을 어떻게 교육답게 구현 할 것인가를 거듭 숙고하고 그것을 체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특수교육에 대한 하늘의 지엄한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