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지독한 역설

평촌0505 2021. 8. 7. 12:10

나이 들어가면서 나를 비롯해 인간존재가 참 모순 덩어리이고 역설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해 인간존재는 퍽 신비한 존재라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다. 왜 그런가? 『중용』에 “하늘이 명하는 것이 이른 바 성”(天命之謂性)이랬다. 여기 성(性)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인간에게 품부되어 있는 본래(본연의) 성이다. 그래서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랬다.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살아 있는 나라는 존재는 그 본래성에 따르는 게 아니라 생존욕구(욕망)인 본능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욕망의 덩어리다. 존재해야 할 나와 현존하는 내 모습 사이에 괴리가 너무 크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의 양면성이 하나의 지독한 역설이라는 게다. 어느 것이 나의 진짜 모습인가?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어쩔 수 없는 내 모습인가? 헷갈린다. 재미 불교학자 박성배 교수는 체용론(體用論)을 말하면서 체(體)는 몸통이고 용(用)은 몸짓이랬다. 그는 몸짓에 현혹되는 삶을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이랬다. 마음 안은 본래성에 따르고자 하지만, 마음 밖은 탐진치의 삼독에 꺼들리는 게 우리네 삶이다. 나라는 존재의 삶 자체가 패러독스다.

 

나 자신의 삶을 회고해 보니 어릴 때의 나는 그냥 천진무구했으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철들면서 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쪽으로 한 발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춘기 때는 심신이 그냥 안정을 찾지 못하고 외적 욕망에 끌려 이랬다저랬다 하기 십상이었다. 내 스스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지만, 그러는 중에도 내가 부끄럽고 내 자신이 후회스런 적이 많았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 건가? 외적 욕망에 끌려 실제로 이런저런 일을 저질렀지만, 심층에서 나의 본연/본래의 성(性)은 그런 나를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던 게다. 해서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내 양심은 속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런 게 내 존재의 지독한 역설이다. 본래 나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착한 본성이 내재해 있음에도, 성장과정에서 왜 허다한 자기모순을 되풀이했는가? 사람이란 게 결국 그칠 것을 다 그치고 난 다음에야 조금씩 사람다워질 수 있는가? 예수나 석가도 그랬는가? 모르긴 해도 그들도 자기 나름의 방황과 정신적 고통을 남다르게 지독히 치룬 연후에 비로소 큰 깨침을 얻었을 게다. 그리고 깨침을 얻은 후에는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지독히 노력했을 게다. 그런 끝에 이른 바 천인합일(天人合一) 혹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삶을 철저히 체현한 성인이 되었을 게다.

 

그들도 나랑 똑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그들은 성인의 반열에 들고 나는 그냥 범인(凡人)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나는 성인과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 간의 차이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 상대적 차이라는 게 기실은 천차만별이다. 본래 성인(聖人)이라는 건 개념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공자,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 같은 사람은 성인의 모델이긴 하지만, 그들조차도 개념적으로 완벽한 성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나랑 꼭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다.

 

그러고 보니 내 존재성 자체가 하나의 역설이다. 하지만 최근 나는 길희성 교수(비교종교학, 서강대 명예교수)의 『영적 휴머니즘』(2021)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고, 이 역설의 범위와 정도를 줄이는 데에 큰 도움을 얻었다. 내게는 일종의 지적․정신적 구원이다. 그는 영성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신의 속성이 우리 본연의 성품에 내재해 있다는 게다.

해서 그의 신관은 자연적 초자연주의이자 범재신론(凡在神論)이다. 이런 신관에 입각해 그는 진화적 창조를 말한다. 그는 유일신론을 넘어 포월적(包越的) 신관을 제기한다. 신은 우리를 감싸고 있으면서 초월하는 존재라는 게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세속적 휴머니즘을 넘어 영적 휴머니즘으로의 상승을 말하고,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의 상승을 말한다.

 

내 존재의 이런 역설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이 들면서(좀 더 정확히 말하면 회갑이 지나고서야) 내 자신의 인격적․영성적 상승의 계기로 불학의 『대승기신론』과 유학의 『중용』을 만났고, 그 후 유불선을 회통하는 동학의 『동경대전』을 만나 좀 더 확실한 상승 계기를 가졌다. 나무는 타는 속성을 본래 지니고 있지만, 외부로부터 불을 댕겨주는 계기를 만나야 탄다.

『대승기신론』은 내게 중생이 곧 부처라는 큰 믿음을 일으키게 했고, 그 부처의 씨앗이 내게 내장되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심어주었다. 『중용』은 그 첫머리에서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내게 본래(본연) 성(性)이 품수되어 있고, 이 성(性)에 따르는 게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道)이고, 이 길을 닦는 과정이 교육이랬다. 여기 교육은 공부하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을 총칭한다. 『중용』은 내게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목적과 그 과정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제시해 주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1824-1864)는 『동경대전』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천인합일’을 말했다. 수운은 하느님을 내 몸속에 모시고 있으니(侍天主), 하느님의 조화가 내속에 자리 잡아(造化定), 일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면(永世不忘) 만사에 깨침이 온다(萬事知)고 했다. 수운은 모심의 ‘시(侍)’에서 “내 속에는 신령한 영성이 있고, 밖으로는 우주의 기운과 하나로 통하는 기화(氣化)가 있다”고 했다. 수운의 가르침을 이어 실천한 해월 최시형은 사람이 곧 하늘(人是天)이므로,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事人如天)하랬다.

 

해월은 인간 존엄의 극치로 천인합일을 재천명했다. 나아가 해월은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삼경(三敬)사상을 통해 우주만물과 하나가 되는 생명공동체를 강조했다. 해월은 동학하는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들랑 사람이 왔다하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했다고 해라.”고 가르쳤다. 길희성 교수는 『영적 휴머니즘』(2021)에서 인류역사에서 영적 휴머니즘을 실천한 대표적 인물로 예수, 마이스터 에르크하르트(1260-1327),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 그리고 해월 최시형(1827-1898) 등 네 사람을 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동학하기를 실천한 개벽종교인으로 해월이 영적 휴머니스트 4인방에 든다는 것에서 큰 자긍심을 얻는다.

 

도올은 동학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철학사에서 오메가 포인트라 했다. 그는 『동경대전2』(2021) 역주에서 ‘우리가 하느님이다’고 부제를 달았다. 내가 보기에 동양철학자로서 도올의 『동경대전1,2』역주는 하나의 봉우리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내가 70줄에 동학을 만나 수운과 해월의 가르침을 접하게 된 것은 평생을 통해 정신적․영성적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게 된 소중한 계기이자 경험이다.

 

내 삶의 여정에서 부닥치는 또 하나의 역설은 최근 지구적 재앙으로 제기되는 기후위기와 내 삶의 실상이 빚어내는 모순이다. 최근 세계인의 자원소비(생태용량) 평균치가 이미 지구 1.7개 어치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지금 내가 지구에 남기는 생태 발자국은 어느 정도나 될까? www.footprintnetwork.org에 들어가 육식정도, 주택유형과 크기, 동거 가족, 재생에너지 사용, 쓰레기배출량, 주당 자동차사용 거리, 대중교통 이용정도, 비행기 여행시간 등에 걸쳐 체크를 해본 결과 3.2 개 어치가 나왔다. 결국 나는 지구가 제공하는 연간 생태용량을 4월 초순까지 모두 다 써버리는 사람으로 판정되었다. 월수입이 200만원인 사람이 매월 600만원 넘게 지출하는 겪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기후악당 국가의 성원이 되고 말았다. 기후위기와 내 존재의 역설이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에 따른 기후위기에 대응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결국 두 가지로 집약 될 것 같다. 그 하나는 기후위기의 과학적 정보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문명사적 문제를 심층적으로 해석․비판하는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한 지적 자극은 내 경우 해밀턴(C. Hamilton)의 『인류세』(Defiant Earth, 정서진 옮김, 2018)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로부터 나는 좀 더 포괄적으로 인류세의 문명사적 함의 혹은 역사철학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최근에는 <기후위기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고등학교에서 특강할 기회도 가졌다.

 

다른 하나는 내 자신부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삶의 변화를 실천하는 일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구의 생태용량에 비해 과잉 에너지 소모를 하고 있다. 정년 후에 집안 쓰레기 처리에 관심을 가진 덕분에 쓰레기 줄이기와 분리수거에는 집사람과 함께 비교적 잘 수행하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도 그 전에 비해 많이 활용하는 편이고 장거리 해외여행도 절제하는 편이다. 하지만 식생활에서 육류를 줄이는 일은 가족 전체와 관련된 문제여서 쉽게 실천되지 않는다. 집사람은 냉난방 문제에 관해 나더러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면서 집에서 에너지 절약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준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소비절약은 당대 문명인의 미덕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내 존재와 삶의 역설을 줄이기 위해서는 몸과 맘이 함께 그간 쌓인 관성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그야말로 껍질을 벗겨내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몸과 맘은 뗄 수 없는 것이어서 마음을 바꾸기도 어렵지만, 살아보니 몸의 관성을 바꾸기는 더욱 어려운 것 같다. 노자는 내게 몸이 없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했다. 몸의 관성 가운데 그 대표적인 게 식습관이다. 음식은 가족공동체문화에 녹아 있는 것이어서 내 맘대로 이리저리 바꾸기 어렵다. 그나마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이어서 다행이지만, 우리가 육류 가운데 일차적으로 소고기 소비는 가능하면 줄이는 게 지구를 위해서 좋다.

 

노자는 “도(道)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고 했다. 노자에게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 곧 늘 그러한 상도(常道)다. 결국 내 몸과 맘이 함께 역설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차적으로 합자연(合自然)의 삶을 내면화하는 데에 있다. 이른바 마음은 본연의 성(性)을 따르고, 몸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그런 삶이다. 내게 삶은 멍에이지만 또한 거기에 길이 있다. 해서 그 길은 잠시도 나를 떠날 수 없고 떠날 수 있다면 이미 길이 아니다. 나는 내 존재의 역설을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그 역설을 초월하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그게 사람의 아들인 내 존재의 패러독스이자 운명이다.

 

<추기>  최근 나는 <지식과세상> 지리산책 교실에서 '먹고사는 문제와 죽고사는 문제'라는 주제로 강의할 기회를 가졌다. 여기 '먹고사는 문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경제문제이고, '죽고사는 문제'는 80억 인류가 공멸하느냐 살아 남느냐를 가름하는 기후문제이다. 두 가지 문제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그래서 '인류세'(anthropocene)는 곧 '자본세'(capitalocene)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내 강의의 방점은 '기후위기' 문제에 따른 지속 가능한 미래의 불확실성에 있다. 기후위기의 극복과 적응에 따른 이중과제가 노년의 내 삶에서 절박한 과제다. 기후위기 앞에서 내 삶의 지독한 역설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는 이유다. (2023,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