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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 상생의 길: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2021)를 읽고

평촌0505 2021. 11. 15. 11:31

지금 우리에게 밀어닥친 절체절명의 문제는 기후위기다. 이 문제를 어떻게 조정․극복하느냐에 인류의 운명이 갈린다. 인류가 공생하느냐 공멸(멸종)하느냐가 달린 문제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위급하고 절박한 문제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설마 하는 맘으로 태평스럽다. 왜냐하면 기후변화는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한 지점을 지나 지렛대가 기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게 기후변화다. 그래서 기후위기다. 기후위기 시대에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위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체계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2021)가 나왔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했는데, 저자는 SDC(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야 말로 현대판 ‘대중의 아편’이랬다.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는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기에 대처하려면 그 근본 원인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저자는 그 원인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라 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급속히 늘어난 시점이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이후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파리기후협정이 설정한 ‘2050년’ 전후에 서서히 일어나는 게 아니다. 위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종래 기준으로 ‘100년 만에 한 번꼴’ 있을까하는 이상 기후현상이 매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비가역적인 기후변화가 급격하게 확산되어 더 이상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 기후행동추적이 2020년에 발표한 예상 수치에 의하면, 현재 상태를 방치하면 지구온도가 4.1-4.8도 상승하고, 파리협정 기준으로 해도 2.7-3.1도 상승이 불가피하고, 탄소중립 정책이 낙관적으로 전개되어도 2100년에는 2.1도 상승에 이른다고 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 상위 5개국(중국, 미국, 인도, 러시아, 일본)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퍼센트에 이른다. 게다가 파리기후협정의 1.5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최상위 1% 부유층은 현재 탄소 배출량을 97%로나 줄여야 한다. 이 보고서는 세계인구 소득 하위층 50%는 2030년에도 여전히 ‘1.5도 탄소예산’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탄소를 배출할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가장 부유한 상위 1%는 기준의 30배, 상위 10%는 9배가 넘는 탄소를 배출할 것으로 분석했다(한겨레, 2021.11.11).

 

저자는 ‘글로벌 사우스’에서 반복되는 재앙을 말한다. ‘글로벌 사우스’란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피해를 받는 지역과 주민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자본주의 전개과정에서 선진국의 풍요로운 생활 이면에 남북문제를 포함하여 지금은 자본주의 모순이 글로벌 사우스에 응축되어 있다는 게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노동력을 착취하고 천연자원을 수탈하지 않으면 우리의 풍요로운 생활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해서 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함으로써 성립되는 선진국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국적 생활양식’이라 했다. 선진국은 ‘외부화 사회’라는 외부성을 만들어 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번영을 지탱하고 있다.

 

이메뉴얼 월러스턴(I. Wallerstern)의 ‘세계체제론’에 따르면, 노동력의 ‘부등가 교환’에 의해 선진국의 ‘과잉발전’과 주변부 국가들의 ‘과소발전’이 재생산된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착취하는 것은 주변부의 노동력뿐 아니라, 지구환경 전체를 파괴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자본축적의 도구로 사용하는 동안 자연 역시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해서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한 지구환경은 파멸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결국, ‘외부화 사회’라는 것은 어딘가 먼 곳의 사람과 자연환경을 착취하면서 그 진정한 비용을 떼어먹는 것을 능사로 삼는 잘못된 사회다.

 

그러는 동안 제국의 생활양식은 한층 단단히 늘어나고 그에 따른 위기대응은 후순위로 밀렸다. 어쩌면 우리 한 사람마다 이런 식으로 불공정 게임에 자신도 모르게 가담해 온 게다. 하지만 그 업보가 마침내 기후위기라는 재앙으로 중심부에까지 미치고 있다. ‘인류세’의 도래는 수탈과 전가를 위한 ‘외부가 모두 소진된 시대’라는 걸 알아차리라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자본은 무한한 가치 증식을 목표로 삼지만, 지구자원은 유한하다. 이게 ‘인류세’ 위기의 본질이다. 유한한 세상에서 성장의 지속성을 믿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거나 경제학자이거나 둘 중 하나다.

 

저자는 “실제로 자본주의는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세계화와 금융시장의 규제완화 덕에 생겨난 돈벌이 기회를 좇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기후변화 대책을 세울 수 있었던 귀중한 30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고 지탄한다.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사용한 화석연료 중 약 절반 이상이 1989년 냉전종식 후에 소모되었다.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는 게 입증되었으니, 시스템 그 자체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지 않고는 대안이 없다.

 

현재 선진국에서 내놓는 대안인 ‘그린 뉴딜’은 과연 희망일까? 최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정책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의 하나가 ‘그린 뉴딜’이다. 미국에서 토머스 프리드만(T. Freedman)과 제러미 리프킨(J. Rifkin) 같은 지식인이 그 대표적 주자다. 그린 뉴딜은 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 등을 보급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공공투자를 벌인다. 그들은 호경기가 또 다른 투자를 불러일으키면 지속 가능한 녹색경제로 이행하는 속도가 빨라지리라 기대한다. 저자는 이것은 녹색 케인스주의, 즉 ‘기후 케인스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과연 기후 케인스주의가 말하는 새로운 성장과 지구의 한계가 양립할 수 있을까? 녹색성장도 성장은 성장이다. 경제성장과 환경부하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반감하고 2050년까지 제로(0)베이스로 유지한다 하더라도 이미 배출된 탄소 때문에 향후 10년에서 20년 동안 위기는 결코 감소되지 않는다. 해서 저자는 “녹색성장이 잘 풀리는 만큼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증가”한다는 게다. 이른바 ‘경제성장의 함정’이다. 기술혁신이 기후변화를 멈춰줄 것이라는 ‘단순한 상정’은 순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까지 경제성장을 떠받쳐 왔던 대량생산과 소비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전 세계상위 10퍼센트 부유층이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반면에, 소득 하위 50퍼센트의 사람들은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 중 불과 10퍼센트만 차지한다. 그럼에도 하위 소득계층이 기후위기에 가장 먼저 노출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자신이 당사자로서 제국의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을 확증하는 데이터가 있다. IEA(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현재 200만 대인 전기자동차가 2040년에는 2억8000만대까지 늘어날 것이란다. 그런데 그로 인해 줄어드는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불과 1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게다. 왜 그런가? 전기자동차의 배터리가 커지고 그 수가 늘어나면서 제조공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환경위기에 맞서 경제성장을 억제하려면 우리 손으로 기존의 자본주의를 멈추고 탈성장형 포스트 자본주의로 대전환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탈성장’은 지구의 한계에 주목하면서 경제적 격차해소, 사회보장 확충, 여가증대 등을 중시하는 경제모델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탈성장은 평등과 지속 가능성을 그 목표로 삼는다.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빈곤의 심화를 초래했다. 게다가 개인 간의 경쟁을 끊임없이 격화시킨다. 그는 기술 이데올로기야말로 현대사회에 상상력 빈곤의 원천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탈성장 코뮤니즘’은 그런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주목했다.

 

마침내 저자는 <결핍의 자본주의, 풍요의 코뮤니즘>을 말한다. 그는 “상위 1퍼센트가 아니라 99퍼센트인 우리에게 결핍을 주는 게 자본주의가 아닐까.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우리 대부분은 가난해지지 않았는가?”라고 되묻는다. 자본주의가 낳은 결핍의 전형적인 예는 바로 ‘토지’다. 자본주의는 토지를 매개로 끊임없이 결핍을 재생산 했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인공적 희소성에 맞서는 대응책으로 ‘커먼’(공공성)을 복원시켜 ‘근본적 풍요’를 재건하자고 했다.

마르크스는 ‘필연의 나라’와 ‘자유의 나라’를 구분했다. 그에게 ‘필연의 나라’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생산․소비활동을 가리킨다. 그에 비해 ‘자유의 나라’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진 않아도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영역이다. 이를테면 예술, 문화, 우정, 스포츠 등 여가활동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성장만 좇아 사람들을 장시간 노동과 제한 없는 소비로 떠미는 시스템을 해체해야 한다. 설령 총량을 보았을 때 지금보다 생산이 줄어든 다고해도, 전체를 보았을 때는 행복하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한 ‘자기억제’를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마구잡이로 생산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제를 하여 ‘필연의 나라’를 축소하면서 ‘자유의 나라’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이 책, p.271).

 

자기 절제가 ‘좋은’ 자유라는 사고방식은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저자는 자기 억제/절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혁명적’ 행위라 했다. 이런 절제의 사회야말로 ‘자유의 나라’를 확장하여 탈성장의 상생적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다. 저자는 “탈성장이 세계를 구한다.”고 했다. 토마 피케티(T. Piketty)도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자본주의 극복의 대안으로 “잘 길들여진 자본주의가 아니라 ‘참여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참여사회주의’는 자치와 상호 부조하는 시민의 힘을 뿌리로부터 길러냄으로써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탈성장 상생주의’라는 입장에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구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즉, 시용가치 경제로 전환, 노동시간 단축, 획일적인 분업 폐지, 생산과정의 민주화, 필수노동의 중시 등이다. 그는 지난 150년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탈성장 사상을 인류세에 맞추어 업그레이드하고자 했다. 핵심은 경제성장을 감축하는 만큼 탈성장 상생주의가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을 촉진한다는 게다.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의 순환과 속도를 맞춘 생산이 불가능하다. 해서 ‘가속주의’가 아닌 ‘감속주의’야 말로 혁명적이라는 게다.

 

그가 제안하는 탈성장 상생사회의 주춧돌은 다섯 갈레로 나뉜다. 그 첫째는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이다.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경제로 전환하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서 벗어나자는 게다. GDP 증대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하는 데 중점을 두자는 게다. 현재와 같은 소비지상주의를 탈피하고, 사람들이 공유하는 데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며, 동시에 자기억제를 하는 것이 인류를 살리는 길이다.

 

둘째는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노동시간을 가능하면 줄이고 생활의 질은 높이자는 게다. 셋째는 획일적인 분업폐지다. 노동을 획일하게 만드는 분업을 폐지하여 노동의 창조성을 회복시키자는 게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미래사회의 과제다. 넷째는 생산과정의 민주화다. 생산과정에서 민주화를 진행하여 경제를 감속시키자는 게다. 여기 생산과정의 민주화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 관리를 뜻한다. 끝으로, 사용가치경제로 전환하여 노동집약적인 필수노동을 중시하자는 게다. 돌봄 노동은 ‘감정노동’이기에 자동화하기가 매우 어렵다. 돌봄과 소통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 ‘역사를 이어가기 위하여’에서 저자는 자본주의를 좌지우지하는 1퍼센트의 초부유층에 맞서기위해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3.5퍼센트라는 수치의 위력이 있다고 했다. 허버드대의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E. Chenoweth)에 따르면, ‘3.5%’의 사람들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들고 일어나 진심으로 저항하면 반드시 사회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다시 저자의 말에 기대어 보자.

 

자본주의와 기후변화 문제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참여할 사람들을 3.5퍼센트 확보하는 것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듯하지 않은가.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환경파괴에 분노하고 미래세계의 글로벌 사우스를 위해 투쟁할 상상력이 있는, 함께 싸워 줄 사람은 분명 3.5퍼센트보다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 이유 때문에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몫까지 대담하게 결의하고 먼저 행동하면 된다(이 책, p.358).

 

지금까지 우리가 무관심했던 탓에 1퍼센트의 부유층․엘리트층은 자기들 기준으로 규칙을 바꾸고 자신들의 가치관에 맞춰 사회구조와 이해득실을 주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외칠 때다. 그래야 지구가 살고 우리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