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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나에서 얼나로

평촌0505 2022. 1. 22. 09:16

다석 유영모 선생은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몸나와 얼나는 별개의 ‘나’가 아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몸나 속에 얼나를 모시고 있다. 그래서 ‘시천주’(侍天主)다. 다만 우리가 정신적 성장을 중시하는 측면에서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걸 강조할 수 있다. 인간의 성장과정은 <몸나-제나-뜻나-얼나>의 과정으로 위계화 할 수도 있다. 어린 아이는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잔다. 그야말로 몸이 시키는 대로 산다. 아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중심적인 제나가 강하게 표출된다. 인간성장의 자연스런 과정이다.

 

 '제나' 중심의 나는 학습의 과정을 거치면서 '뜻나' 중심으로 성장한다. 대개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기가 세운 뜻 중심으로 살고자 한다. 이른바 입지(立志)를 고민하는 시기다. 해서 율곡은 학문에 뜻을 두는 사람은 먼저 ‘입지’를 분명히 하랬다. 하지만 성장과정에서 뜻을 바로세우기도 어렵지만 뜻대로 살기는 더 어렵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고민이 많은 때가 청년기다. 나는 청년시절에 ‘입지(立志)의 장(章)’이라는 노트를 따로 만들어 나름 메모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나는 청년시절에 위궤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지 못하고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게다. 내 스스로 해결할 능력은 없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가고 있었던 게다. 지금 생각하니 내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고3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20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철학과에서 특수교육 쪽으로 전공을 바꾸고,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름 공부의 틀이 잡혀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뜻나’의 입지 틀이 잡혀 가기 시작한 게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용케도 모교(대구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마침내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나름 고생 끝에 안정을 찾아 이듬해에 결혼을 했다. 그 때 내 나이 29세였다. 어렵게 신접살림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도 그나마 차차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우리나라에서 압축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세대가 된 게다. 대학 교수로서 내가 '뜻나'를 얼마나 안정되게 성장‧관리해 왔는지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 진정한 평가는 내 제자들과 내가 활동한 학계의 후배들 몫이다. 그래서 후학이 두려운 게다.

 

'뜻나'에서 '얼나'로 성장하는 것은 일생의 과제다. 내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숙제다. 그러나 상대적인 중심축을 놓고 말한다면, 나는 회갑이 지나면서 내 정신을 차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참 늦되는 사람 축에 속한다. 솔직히 내 심정은 그렇다. 그리고 내가 '뜻나' 중심에서 '얼나' 쪽으로 정신세계를 열기 시작한 것은 정년이후부터이다. 정년이후에 나는 동양고전에 관심이 쏠렸고, 그와 더불어 자연히 종교와 죽음학 쪽으로 공부가 쏠리고 있다. 지성과 더불어 영성 쪽으로 나름 기울기 시작한 게다. 특히 기후위기 시대에 나는 세속적 휴머니즘으로부터 생명중심의 영적 휴머니즘으로의 이행에 공감이 간다. 그런 울림을 어떻게 꾸준히 점수(漸修)하느냐가 내 여생의 숙제다.

 

하지만 나는 세속에 몸을 담고 겨우 한 발을 '얼나' 쪽의 문턱에 걸치고 있는 형국이다. '얼나'를 향한 삶의 상승과정은 내게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다. 해서 내게 얼나의 삶은 곧 얼나를 향한 됨(becoming)의 과정일 뿐이다. 내게 삶은 끝없는 점수(漸修)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