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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생일 즈음에

평촌0505 2022. 2. 19. 16:03

내일은 광주에 있는 딸(태영, 46)의 생일이다. 그냥 넘기기가 아쉬워 오늘 만나 점심이나 함께하자고 제의를 했다. 처음에는 사양을 하더니 다시 전화로 제어머니에게 남원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자고 하고 식당을 정해 연락하라 했다. 마침 날씨도 화창하고 드라이브하기에도 좋은 날이다. 집사람과 준비를 해서 광주행 고속도로로 운전해 가면서 내가 앞으로 얼마나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쩜 내가 직접 운전할 수 있을 때라야 여행도 하고 가족들과도 편안히 만날 수 있을 게다. 그렇잖아도 코로나 때문에 이동이 제한되는 시절이다.

 

나이 들었다고 소극적으로 움츠리거나 포기하면 정말 늙은이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나이든 부모는 이래저래 부담이 될 터이다. 아직은 우리 내외가 중년의 딸에게 능력 있는 부모라는 걸 이참에 확인해 주고 싶은 게다. 광주에서 출발한 딸은 우리보담 약 20분 이상이나 먼저 도착해 있었다. 미리 산나물 정식을 주문해 두라하고 우리 내외는 오후 1시 반 경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 구정 때 딸이 우리 집엘 다녀갔으니 만난 게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보니 반갑다.

산나물 종류가 약 20개나 올망졸망 올라와 놀랐다. 아마 지리산 자락에서 나오는 산나물이 주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찹쌀생술을 시켜 반주로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늦은 점심을 맛나게 먹고 광한루 근처 양지바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멀리 지리산 봉우리에 흰 눈이 보인다. 대구에서 볼 수 없는 경관이다. 딸과 집사람이 주로 수다를 떨고 중간에 잠깐 내가 끼어드는 그런 분위기다. 카페에서 나와 햇살이 좋아 광한루 앞 큰 천변 다리를 건너 공원 언덕 쪽으로 산책했다. 경사가 비교적 완만해 집사람도 비교적 잘 걸어 올라갔다. 작년부터 집사람은 계단 오르내리기에 좀 불편한 편이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산책길에 광한루 서편 쪽에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광한루원>이라는 큼직한 표식이 보였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61년 겨울 경주에서 피신차 남원까지 와서 오작교 주변 서형칠(徐亨七)의 약종상에 머물면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 여기서 수운은 『용담유사』의 <도수사(道修詞)>를 지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남원 교롱산성 덕밀암(德密岩; 일명 ‘은적암’이라고도 함)에서 <권학가(勸學歌)>를 지었다.

 

여기 ‘학’은 동학을 의미한다. <권학가>는 <동학론>의 서론 격으로 기필되었다. 도올은 현재 우리말로 옮긴 『용담유사』(2022)에서 동학을 권하는 <권학가>는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견하고 절망에 빠진 민중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쓴 것이랬다. 이것이 호남에 동학이 전파된 단초가 된 게다. 그 후 광한루원은 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가 된 게다.

 

오늘 나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대구에서 여기까지 두 시간 남짓해서 왔지 만, 160년 전에 수운 선생은 아마도 경주에서 남원까지 걸어서 왔을 게다. (뒤에 확인 된 바로는 당시 수운 선생은 해로를 통해서 순천을 거쳐 남원으로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로서는 대장정이었다.) 내 생각에는 당시 수운 선생은 말 타고 다닐 형편도 아니었을 게다. 오늘 산책길에 광한루원이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임을 처음 확인하게 된 것은 이외의 성과다. 동학을 매개로 전라도와 경상도는 진즉에 이렇게 이어진 게다.

 

산책을 마치고 오후 5시 경에 딸과 헤어져 우리 내외는 동쪽으로 딸은 서쪽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코로나 와중에 딸 생일을 핑계 삼아 모처럼 나들이를 했다. 올 봄에는 좋은 날 택해 구례에서 한 번 만나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