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가 열반
고해의 파도를 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사바(娑婆)의 세계다. 사바세계는 참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고, 잡된 인연으로 얽혀 있는 세계다. 우리가 몸담은 세계는 사바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기신론에는 “모든 중생은 원래 열반에 들어 가 있다.”(一切衆生 本來常住 入於涅槃)고 했다. 어째서 사바가 열반인가? 이 말은 우리가 사바를 떠나서는 열반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다. ‘중생이 곧 여래’라는 말 또한 중생의 마음 안에서가 아니고는 달리 여래의 마음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땅에 걸려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 설 수밖에 없다.
이홍우는 『대승기신론통석』(2006) <사바를 열반으로>에서 “사바는 중생이 그것을 열반으로 만들지 않는 한 결코 열반이 될 수 없으며, 사바가 열반이 되는 것은 오직 중생의 노력에 의하여, 또 그 노력의 정도만큼 가능하다.”고 했다. 이때까지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하는 줄 모르면서 사바를 열반으로 만드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기신론이 말하는 ‘마음을 진여로 돌리는’ 그 일을 해왔으며, 자기 나름으로 ‘사바를 열반으로 만드는’ 중생의 노력에 동참한 게다. 이처럼 “중생은 스스로 그런 줄 모르면서도 고(苦) 속에 있듯이, 그와 똑 같은 이유에서 스스로 그런 줄 모르면서도 열반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해서 이홍우 교수는 “사바에 사는 중생이 ‘마음을 진여로 돌리는 일’에는 끝이라는 게 있을 수 없고, 또 그뿐만 아니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도 없습니다. 자신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일에 비추어 스스로 부족한 존재임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기신론은 ‘마음을 진여로 돌리는’ 발심수행(發心修行)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사바가 곧 열반이라는 발심(發心)의 갈래는 (1)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곧은 마음’(直心), (2) 일체의 선행을 쌓는 ‘깊은 마음’(深心), (3) 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는 큰 소원을 가지는 ‘자비의 마음’(大悲心) 등이다.
마음을 ‘진여로 돌리는’ 발심에서 하나의 마음인 진여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며 그리워하기만 하면 될 터인데, 어째서 또 다시 여러 선행을 실천하고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려는 큰 소원까지 실천해야 하는가? 기신론에는 ‘마니’라는 보배구슬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사람이 그(보배) 구슬의 원래성질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여러 가지 방편으로 갈고 닦지 않는다면 원래의 그 깨끗한 성질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중생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진여는 원래 맑고 깨끗한 성질(體性)을 지니고 있지만 끝없는 번뇌로 물들고 때가 끼어서 여러 가지 방편으로 오랫동안 수행(熏修)하지 않으면 원래의 그 깨끗한 성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때가 온 누리에 구석구석 퍼져 있는 만큼, 선행도 온 누리에 걸쳐 이루어져야 그것을 벗길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이 모든 착한 일을 열심히 행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여로 돌아가게 된다(이홍우, 2006, p.425).
발심수행의 중요성을 마니(摩尼) 보배구슬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다시 떠올린다. 중생이 여래이고, 사바가 열반이라는 깨침은 언뜻 오는 것이지만, 그 깨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지속적인 점수(漸修)의 과정이다. 기신론의 말미에는 불법 수행의 이익과 수행을 권유하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있어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선행(十善)을 행하도록 한다 하더라도, 한 끼 밥 먹을 동안 이(기신론)의 가르침에 관하여 ‘올바른 사색’(正思)을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후자(마음 안)의 공덕은 전자(마음 밖)의 공덕과는 비길 수조차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이 논술을 구하여 그 의미를 세밀히 살피고 그에 따라 수행(修行)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을 하면 그가 쌓은 공덕은 한도 끝도 없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설사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가 각각 무수겁의 세월을 두고 그 공덕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다.
어떤 사람이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고 여러 선행을 실행하도록 한다면 그 공덕도 무량하지만, 어떤 사람이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진여를 여법하게 사유하는 공덕은 더욱 무량하다고 했다. 이것은 진여의 지혜로 바르게 사유하는 마음 안의 자리적(自利的) 공덕인 사혜(思慧)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어서 또 어떤 사람이 기신론에서 설한 법문을 수지하고 이 법문을 깨쳐 확신하여 선정의 실천을 하루 낮과 밤 동안이라도 수행한다면 그 공덕은 무량무변하다고 했다. 이것은 수행(修行)이 가져다주는 무량무변한 수혜(修慧)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사혜(思慧)와 수혜(修慧)는 사바에서 열반으로 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기신론이 주는 사혜(思慧)는 한 끼 밥 먹을 동안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에 따른 수행으로서 수혜(修慧)는 하루 낮과 밤 동안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게다. 해서 발심수행은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줄기 있게 이어져야 한다. 결국 우리가 사바를 열반으로 만드는 데에는 그 끝이란 게 따로 없다.
우리에게 삶은 수행(修行)의 과정이고, 동시에 그것은 열반을 향한 지속적인 정진과정이다. 사바에서 조금이라도 열반에 가까워지면 그 과정에 열반은 내재한다. 나 같은 중생이 '사바가 곧 열반'이 되는 삶을 견지해야 할 불가피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