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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

평촌0505 2022. 5. 25. 14:40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2007)라는 책의 후기에서 저자(소노 아야코)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의 행복은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스스로의 행복을 발견하는 데에 책임이 있다. 인생의 마지막 기량을 보여줄 부분이다.” 나는 ‘노년의 행복’을 ‘존엄한 죽음’으로 대치시키고자 한다. 존엄한 죽음은 노년에 자신의 마지막 기량과 지혜를 보여줄 결정적 기회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멸의 의료체계에서 존엄한 죽음을 위한 자기결정권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최근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박중철, 2022)를 읽었다. 저자는 최근 한국에서 황폐한 죽음문화를 고발하면서 삶만큼 죽음도 존중되는 세상을 제안하고 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의 연장선이기에 삶의 완성으로서 존엄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공감이 간다. 장수시대에 누구나 품위 있는 죽음을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2020년 우리나라 전체 사망자의 75% 이상은 요양병원을 포함한 병원에서 사망했고, 자택에서 사망한 비율은 15%를 넘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임종장소는 병원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듀크대학의 정신과 의사인 앨런 프란시스(A. Frances)는 “병원 사망보다 더 나쁜 죽음은 없다. 잘 죽는다는 것은 집에서 죽는 것”이랬다.

 

2016년 미국 노년 정신의학회지에는 선행연구들을 종합 분석해 ‘좋은 죽음’의 요건들을 다음처럼 들었다.

 

• 원하는 장소에서 잠들 듯이 죽는 것

• 고통 없이 죽는 것

• 두려움 없이 평온한 상태에서 죽는 것

•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로 죽는 것

• 사람들의 존경과 존중을 받으면서 죽는 것

• 아쉬움 없이 작별인사를 남길 수 있는 것

• 종교적, 영적 평안 속에서 죽는 것

• 미리 작성한 사전의료의향서, 연명의료거부, 안락사 요청 등이 지켜짐

• 평소대로 살다가 죽는 것

 

위의 요건 중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어느 것도 보장되기 어렵지만, 다만 그렇게 죽고자 노력하고 준비할 따름이다. 저자는 “미리 자신의 죽음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한순간의 결심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는 모두 살면서 터득해야하는 결과물”이랬다. 우리에게 존엄한 죽음은 살면서 터득해야 할 결과물일 뿐이다. 저자는 노인실태조사(2020)에 기초해 한국인에게 좋은 죽음이란 (1)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 (2) 고통 없는 편안한 죽음, (3) 가족과 주변에 부담주지 않는 것, (4)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다 죽는 것 등으로 집약했다. 96세에 귀천한 어머니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죽음을 맞으셨으니 좋은 죽음이랄 수 있다.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고향 집을 그리워 하셨지만, 병원 병실에서 조용히 임종을 맞아야 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인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는 <죽음의 질 보고서>(2010)에서 영국과 호주가 10점 만점에서 7.9로 1위를 차지한 반면에 인도는 1.9점, 우간다 2.1점, 브라질 2.2점으로 최하위를 나타냈다. 일본은 4.7점으로 23위, 한국은 3.7점으로 40개국 중에 32위에 머물렀다. 우리나라는 보건의료 환경 수준은 비교적 높았지만, 임종의료체계가 미흡하고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들의 수도 적어, 말기 환자들이 사망 직전까지 중환자실에서 연명의료 처치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연명의료 없이 고통 경감에 주력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기관의 확대가 죽음의 질을 높이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생애 말기에 병원에서 기계호흡장치를 달고 인공영양을 받으며 버티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삶의 연장이 아닌 단지 죽음의 연장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면서 노인 빈곤율도 가장 높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내의 경제대국임에도 국민 삶의 만족도는 OECD 37개국 중 36위로 바닥을 치고 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기적을 이루었지만 행복을 잃어버렸다. 2003년 일본을 추월한 이후 현재까지 자살률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기적의 압축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어 냈지만, “살면서 괴로운 나라, 죽을 때 비참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저자는 생존의 의지만이 존중되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자연스런 권리가 아닌 규범과 의료진에 의해 허락되는 것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삶을 성숙시키는 실존적 과제로서의 죽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학이 양산하는 삶의 연장만 남게 된 현실에 주목한다. 범죄를 형무소에 격리하고 감염병을 음압병실에 격리하듯이 죽음도 격리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오늘날의 죽음문화를 개별화, 범속화, 의료화라는 특징으로 집약한다. 지그문트 바우만(Z. Bauman)은 “우리는 각각 존재하고, 나는 홀로 소멸한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생존경쟁을 벌이다가 어느 순간 홀로 소멸해 버린다는 게다. 죽음은 개인적 사건으로 축소되고 공동체 차원에서 죽음을 숙고하고 공유하는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

 

동시에 죽음은 ‘범속화’되고 있다. 여기 ‘범속’이란 그냥 관례적이고 속된 것을 뜻한다. 우리의 무관심이 만든 범속화된 죽음은 진부함, 무의미함, 무관심성, 세속성 등 허무한 의례로 남겨진다. 현대사회는 죽음을 단지 위험관리 차원에서 ‘의료화’한다. 해서 죽음을 삶의 숭고한 완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해야 하는 재앙으로 각인한다. 병원들은 장례식장은 확장하면서 임종실 설치는 외면하고 있다. 임종실 대신 천문학적 비용이 들더라도 첨단장비로 가득 찬 중환자실 병상 하나를 더 늘리는 게 의료화의 도그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존재이기에 존엄한 삶과 죽음을 ‘실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 할 수 있어야한다. 존엄한 삶이란 성실하게 삶의 가능성에 도전하고 후회 없이 퇴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에게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성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이어져야 하고, 의학은 무의미한 생명연장보다는 이야기의 완성을 지켜내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이 책, p.164)고 했다. 우리에게 존엄한 삶과 죽음은 자신만의 서사를 갖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가 맞이할 가능성이 가장 큰 죽음의 모습을 책에서는 ‘최빈도 죽음’이랬다. 한국인 사망자의 80% 가까이는 요양병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에서 사망한다. ‘최빈도 죽음’은 그나마 병원비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골방에서 혼자 누워 삶을 마감하는 고독사도 늘어나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최소한 내가 “최빈도 죽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되물어 본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존엄한 죽음을 위한 제안으로 (1) 종합병원 내에 임종실 설치의 의무화, (2) 연명의료결정법에서 물과 영양공급 의무조항 삭제, (3)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적극적인 확대, (4) 간병 등 생애말기 돌봄에 대한 사회적 대책마련, (5) 의과대학 교육과정과 수련의과정에서 죽음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을 들고 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사람의 훌륭함은 한때의 성공이나 뛰어남에서 오는 것이 아닌 성실한 현재진행형의 자존감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삶의 과정에서 모멸의 시대에 존엄한 삶과 죽음이 구성될 게다.

 

존엄한 죽음과 함께 우리에게 존엄한 삶은 사바에서 열반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존엄한 죽음은 곧 존엄한 삶의 과정(연장)일 뿐이다. 존엄한 삶의 내력 없이는 결코 존엄한 죽음도 없다. 해서 잘 살면 잘 죽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