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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멸하는 마음의 통찰

평촌0505 2022. 6. 26. 14:42

 

『대승기신론』은 끊임없이 생멸하는 중생의 마음을 통찰하는 것을 종지로 삼는다. 주지하는 것처럼 기신론의 논지는 ‘일심이문’(一心二門)으로 집약된다. 원효(617-686)는 “대승법에는 오직 일심(一心)만 있고 일심 이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지만, 단지 중생의 무명(無明)이 일심을 미혹시켜 파도(번뇌)를 일으켜 (중생이) 육도(六道)에 유전(流轉)한다.”고했다. 일심은 존재의 본원이며,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법을 포섭한다. 그에게 대승불교는 바로 ‘일심’이며, 일심은 그대로 ‘중생심’이다.

 

원효는 기신론의 해석(대승기신론소/별기)에서 “본래 마음은 하나이지만 대승의 뜻이 넓기 때문에 두 개의 문을 세워서 대승을 설명한다. 진여문에 대승의 근본바탕을 두고, 생멸문에 대승 자체의 모습과 작용을 두었다.”고 했다. 이른바 ‘일심이문’이다. 기신론에는 “본래 마음은 하나이지만 그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이 맞 붙어 있다. 그것을 각각 ‘실재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心眞如門)과 ‘현상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心生滅門)으로 대별한다. 마음의 두 문은 그 각각이 ‘총체’로서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포괄한다. 해서 이 두 개의 문은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른 바 ‘이문불상리’(二門不相離)다.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 가각 포괄하는 총체는 동일한 것이므로, ‘이문불상리’는 필연적 귀결이다. 때문에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관계는 ‘사실상의 분리’가 아닌 ‘개념상의 구분’일 뿐이다. 여기 참으로 그러한 진여의 마음(즉, 일심)은 우리의 현상적 마음이 합치되어야 할 이상적 표준이며, 현상적 마음이 점차 그것에 접근하여 마침내 합치될 때(열반의 경지), 우리의 마음은 일심(진여) 바로 그것이 된다. 해서 우리의 마음이 일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음의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생멸하는 망념(상념)을 여의고 진여자성(眞如自性)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효는 “생멸문이 비록 모든 변화를 일으키지만, 진여의 본성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멸문은 진여를 포함한다.”고 했다. 이것은 마치 흙으로 질그릇을 만들지만 언제나 흙의 본성과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질그릇이 흙을 포함하는 것과 같다. 생멸하는 마음은 여래의 종자를 품고 있는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여래장’은 마음의 생멸문이 품고 있는 ‘진여’이다. 생멸하는 마음을 지켜보면서 그 현상을 알아차리는 게 시각(始覺)이자, 그것이 진여로 돌아가는 문턱이다. 생멸하는 마음을 통찰(insight)한다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해서 진여의 문으로 입문하는 과정이다.

 

중생들의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바로 지애(智碍)와 번뇌애(煩惱碍)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그 마음을 통찰하는 수행을 통하여 두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일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통찰이자 깨침의 과정이다. 하나인 마음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으로 기신론에는 시문(施門), 계문(戒門), 인문(忍門), 진문(進門), 지관문(止觀門)을 말한다. 이 오문(五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관문’이다. 여기 ‘지관문’은 '선정'(禪定)과 '지혜'를 합친 것이므로 기신론의 오문은 육바라밀과 일치한다.

기신론에서 말하는 ‘지관문’(止觀門)을 원효는 진여문과 생멸문에 배당하였다. 진여문과 생멸문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듯이 멈춤과 살핌의 ‘지관’(止觀)도 함께 닦아야 할 수행이다. ‘지관쌍운’(止觀雙運)은 기신론의 논지이자 원효의 일관된 주장이다. 기신론에서 상념의 정지와 본질의 통찰이라는 ‘지관문’ 수행은 점진적으로 동시에 실천하여, 마치 문을 바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처럼, 한꺼번에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지관쌍운’이 ‘동시에, 한꺼번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진여문과 생멸문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즉, 二門不相離)에서 따라오는 필연적 귀결이다.

 

해서 기신론에는 “걸어갈 때나 서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수행자는 늘 ‘그침’(止)과 ‘살핌’(觀)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지관쌍수’(止觀雙修)라지만, 지(止)가 체(體)이고, 관(觀)은 그 용(用)이다. 우리가 오직 ‘상념의 정지’(止)에 전념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세밀히(정확히) 살펴야한다. 그것이 생멸하는 마음을 제대로 통찰하는 삶의 자세다.

 

흔히 팔만대장경을 260자로 줄인 게 <반야심경>이고, 심경을 다시 5자로 줄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고, 이것을 한 자로 압축하면 ‘조’(照)라 했다. 한 발 물러서서 내 마음을 되비추어 보는 것, 즉 반조(返照)다. 생멸하는 마음을 통찰하는 것이 곧 ‘반조’다. 무명에 가려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을 잠시 물러서 되짚어보면, 구름에 가려진 태양의 실체를 보게 된다. 이른바 일체의 상념을 떠나 하나의 마음인 진여(마음의 본래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인 마음자리는 빈 것이면서 좋은 것으로 가득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