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自足)과 자리(自利)의 삶
대개 60에서 65세까지는 현직에서 일하는 시기다. 그(정년) 이후 인생은 얼마나 길고 어찌 살아야 하나? 정년 이후 삶의 길이는 개인에 따라 다양할 게다. 언필칭 100세 시대에 내 경우 짧으면 20년, 길면 30-40년은 더 산다. 길어진 노년을 어찌 살 건가? 해방둥이인 내 경험에 의하면 70대 중반까지는 하는 일도 맘먹은 대로 할 수 있고, 건강에도 별 문제 없이 지날 수 있었다. 근데 70대 후반에 접어드니 이래저래 다르다. 우선 안경 도수부터 새로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이빨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말소리조차 놓쳐버리는 노화성 난청이 동반된다. 이른바 노화현상을 속절없이 체감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인이 된 게다. 한 밤의 도둑처럼 찾아오는 게 노화다. 노년에 내게 남은 삶은 10년일지 20년일지 혹은 그 이상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노화현상은 어김없이 깊어만 질게다. 노구(老軀)를 유지하는 데 이런저런 수리보수비가 늘어날 게다. 의료비 지출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평상적인 삶의 질이 얼마나 유지 되느냐다. 최소한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식사와 수면을 일상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노자는 내게 몸이 없다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 했다. 나이 들수록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노화는 자연의 순리다. 거역할 수 없다.
해서 나는 노년에 자족(自足)과 자리(自利)를 삶의 내면적 나침반으로 삼고자 한다. 나의 둘째 형님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마지막에는 의사가 6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기면서 10년 이상 자기 스타일대로 살다 병원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운명하셨다. 나는 형님의 죽음에 대한 강인한 자기결정권 행사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형님은 건강도 건강이지만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편이었다. 그럼에도 늘 ‘수분지족’(守分知足)을 말하면서 태평스러웠다. 나이 들어 포기하는 만큼 자유로워진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신 게다.
하지만 나는 노년에 스스로 생각해도 이만하면 ‘자족’ 할만하다. 무사히 정년하고 아들딸도 모두 자기 앞 가름은 하고, 아직은 내게 특별한 기저질환도 없어 그런대로 지날만하다. 평생 교수 노릇을 무려 40년이나 하면서 일도 할 만큼은 했다. 정년 후에도 저서를 두 권 냈고, 논문도 5-6편은 발표했다. 그리고 정년 무렵(2010.08)부터 블로그(김병하넷, 티스토리)에 올린 글도 330 꼭지가 넘는다. 요즈음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의 조회 수를 확인해 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다. 많을 때는 30회가 넘고 적을 때는 5회도 겨우 채운다. 이제는 굳이 책을 출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내 블로그(티스토리)의 누적 조회 수가 4만 2천을 넘어서니 나름 지적 재산을 사회적으로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자위한다.
80줄을 내다보면서 내가 남은 노년의 화두를 ‘자족’과 ‘자리’로 삼는 데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노년을 가능하면 ‘소욕지족’(少欲知足)으로 살고자 한다. 추하고 무서운 게 노욕(老欲)이란다. 지금은 성취욕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도 좋을 나이다. 현직에서 일할 때는 성취욕구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게 ‘성취욕망’ 자체가 그냥 ‘노욕’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스스로 현실에 만족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게 지혜로운 삶이다. 노년에는 비본질적인 것(주로 물질과 명예에 관련해서)을 포기하는 만큼 본질적인 것(정신적 가치; spirituality)을 놓치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될 터이다. 비워야 좋은 것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기신론에서 ‘진여’(眞如)는 공(空)이면서 불공(不空)이랬다.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自利)는 불가의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 ‘자리’는 ‘이기’와는 구분된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게 ‘이기’다. 그러나 ‘자리’는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지 않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삶이다. 해서 ‘자리적’ 삶의 전형은 공부하는 삶 혹은 수행(修行)의 삶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할 게다. 가족에게는 물론 주변의 모두에게 그렇다. ‘이타’는 ‘자리’의 부산물로 따라 붙는 것이다. 나이 들어 세상을 구하겠다고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잘 돌아가는 세상에 공연히 공해를 보태지 말아야 한다.
노년에 자족과 자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내가 늘그막에 자족과 자리를 다시금 내면의 나침반으로 삼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