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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지혜: 어찌 살 건가

평촌0505 2023. 1. 3. 20:06

2023년 새해에 해방둥이인 내 나이가 팔순을 바라본다. 속절없이 노년이다. 언필칭 100세 시대라지만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간은 10년에서 길면 20년쯤 될라나. 하지만 나이 들어 건강의 배신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오래 사는 게 축복인가 저주인가? 노년이 저주가 아니기 위해 흔히 경제적 안정과 건강 문제를 든다.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건강도 잃기 쉽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건강상에 심각한 문제가 없다고 해서 노년이 행복할까? 물론 아니다.

 

하버드대 인생성장보고서인 『행복의 조건』(2010, 조지 베일런트, 이덕남 옮김)은 70여년을 종단적으로 추적한 ‘노년의 지혜’를 담은 책이다(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2022년 현재까지 무려 55쇄나 출판되었음). 총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기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이 연구가 착수되었다. 이 책의 저자 베일런트(G. E. Vaillant)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보다는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노년의 연구로부터 찾아낸 주요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우리에게 일어났던 나쁜 일들이 결코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 인간관계 회복은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이루어진다.

• 50세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다면 80세에도 행복한 노년을 누릴 수 있다.

• 알코올 중독은 분명 실패한 노년으로 이어진다.

• 은퇴하고 나서도 즐겁고 창조적인 삶을 누린다면, 수입을 늘리는 것보다 한층 더 즐겁게 살 수 있다.

• 객관적으로 신체건강이 양호한 것보다 주관적으로 건강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성공적인 노화에 훨씬 더 중요하다.

• 긍정적 노화는 사랑하고 일하며,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면서 남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는 것이다.

• 노년에도 계속해서 인간이 성장해 간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년의 발달과업은 다음 세대에게 과거의 전통을 물려주는 ‘의미의 수호자’(keeper of the meaning)가 되는 것이다. 노년의 발달과업으로 ‘통합’(integrity)이라는 과업을 완성함으로써 개인의 삶은 물론 세상의 평온함과 조화로움을 얻는다. 에릭슨은 “세상의 이치와 영적 통찰에 도달하는 경험”이 바로 ‘통합’이랬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며, 한 번 태어나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여기 ‘통합’의 미덕은 바로 ‘지혜’다. 에릭슨은 “마지막 기력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지혜는 남아 있다. 노년은 지혜를 통해 통합을 꾸준히 경험하고 배우고 성취해 갈 수 있다.”고 했다. 노년에 잘 사는 것은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잘 늙는 것’이다. 미국 노년학회는 “인생에 세월을 보태지 말고, 세월에 인생을 보태라!”고 했다. 노년에는 지혜와 마찬가지로 영성과 종교적 관심도 깊어진다. 종교는 언어나 성서,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좌뇌’활동과 연관되지만, 영성은 육체나 언어, 이성, 문화의 한계를 초월하므로 ‘우뇌’활동과 연관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종교와 영성은 따로 떼어 생각 할 수 없다.

 

우리는 나이 듦의 성숙을 통해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가치를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다. 품위 있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비본질적인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적 차이들은 바로 그 비본질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노년은 사바세계에서 열반을 만드는 삶(수행)의 과정이다. 진흙탕이 아니고는 연꽃이 피어 날 수 없는 이유다.

 

핀란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프링크 마르텔라(F. Martela)는 『무의미한 날들을 위한 철학』(성원 옮김, 2021)에서 우리에게 보편적인 인생의 의미는 없다고 했다. 각자가 선택하고 경험하는 ‘인생 안에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 했다. 흔히 철학에서는 보편적인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지만, 그는 내가 선택하고 경험하는 삶 속에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참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는 “인생은 덧없다. 매 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비법은 이 하나의 인생이 우리가 아는 한 당신이 가진 전부라는 점을 떠올리며 제한된 하루하루를 음미하는 것”이랬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몰두하면서 성찰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선호하는 성향이 있다. 몰입할 만한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내면화 할 때, 인생은 참으로 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삶의 지속적 성장과 고결함을 안내하는 ‘자기결정이론’을 말한다. 그의 자기결정이론은 기본적인 심리적 필요로 자율성, 유능감, 관계 맺음, 그리고 선의(善意)로 충족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의미 있는 삶을 회복하는 자기결정의 네 가지 도구이다.

 

나의 노년에서 의식적으로 몰두할만한 가치는 무엇인가?  ‘자율성-유능감-관계맺음-선의’를 하나로 충족할 수 있는 삶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내력과 공부로부터 연역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60대 이후에 내가 선택한 종교와 철학의 공부는 대승기신론-중용-도마복음-동경대전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궤적을 이루고 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종교다원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 다원성을 회통하는 통약성이 있을 게다. 그리고 그 통약성에 노년의 내 삶을 안내하는 ‘내면의 나침반’이 작동할 게다.

 

노년에 내 삶의 나침반은 참나(眞我)를 깨쳐 그것을 체현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대승기신론>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큰 믿음을 일으키는 논서다. 여래는 씨앗처럼 내속에 내장되어 있다.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사상이다. 어머니의 49재를 치루고 난후에 기신론은 이런 측면에서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중용>에는 ‘지성여신’(至誠如神), 즉 지극한 정성(至誠)은 곧 하느님과 같다고 했다. 해서 이미 성(誠)해 있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고(誠者, 天之道也),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誠之者, 人之道也)이랬다. 곧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상적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다.

 

살아 있는 예수의 어록인 <도마복음>에는 “진실로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느니라. 그리하면 너희는 네가 곧 살아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도마복음, 3장)했다. 하느님이 네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너희가 하느님께 알려질 수 있다는 게다. 내면적 주체의 개벽(Metanoia)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경대전>에서 하느님은 내속에 모시는 존재(侍天主)라 했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전치 시켰다. 그런 ‘모심’(侍)을 통해서 안으로는 신령(神靈)함이 있고, 밖으로는 우주기운과 하나로 통하는 신인간의 탄생(다시 개벽)이 가능하다. 해서 해월 최시형 선생은 사람이 곧 하늘(人是天)이므로,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事人如天)하랬다. 이처럼 동학은 영적 휴머니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노년에 참나를 깨쳐 스스로 설정한 내면적 기준을 체현하고자 노력하는 삶은 아름답다. 동양철학에서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했다. 이상적 표상으로서의 ‘성인’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존재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 ‘성인’은 우리의 삶속에 내재한다. 우리가 예수를 닮고자 노력하는 동안에 하느님 속성이 내속에 실재한다. 해서 최제우는 하느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하느님 마음이랬다.

 

노년에 몸은 노화 되지만, 정신적‧영적인 성장에서 쉼이 없으면 행복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년의 삶이다. 우리에게 정신적 성장은 그 끝이 없다. 노년에 정신적/영적 성장이 느리지만 조금씩이라도 좋아지는 쪽으로 상승하면 그 자체가 지선(至善)의 삶이다. 좋아지는 것이 인간존재(human being)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