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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학문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길

평촌0505 2023. 3. 15. 14:59

지눌의 <수심결>을 다시 읽고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 삶과 학문에 반추해 본다. 일전에 <수심결>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내 블로그(김병하넷)에 「무엇이 나의 ‘본래면목’인가: <수심결>의 가르침」을 올렸다. 그 연장에서 교수로서 평생을 살아온 내 삶과 학문에서 ‘돈오점수’가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를 반성 겸 되짚어(반조; 返照) 보고자 한다. 나는 회갑이 지나(2006) <대승기신론>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연장에서 정년 후(2012)에 <수심결>을 만난 것으로 기억된다. 사람과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내게는 책과의 만남도 소중하다.

 

삶과 공부의 과정에서 깨침은 어느 순간 담박에 올 수(頓悟) 있지만, 그 깨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한 수행(漸修)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해서 불가에서는 ‘돈오’와 ‘점수’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같이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맹자는 항산(恒産) 이후에 항심(恒心)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나는 회갑이 지나서야 내 정신을 차리겠더라고 지인들에게 말하곤 했다. 삶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제 정신을 차릴 수 있다.

 

나이 들면서 ‘여유’를 가진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세삼 느낀다. 사람은 외적 성취욕에 휘둘리지 않아야 제 정신으로 살 수 있다.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곧 ‘존엄한 삶’이다. 해서 <수심결>에는 마음을 깨쳐 닦는 길로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을 말했다. 비어서 고요한 채로 영명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게 곧 자성(自性)이자 본래면목이랬다. <중용>에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품부되어 있는 게 본래성(天命之謂性)이고, 이 본래성에 따라 사는 게 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率性之謂道)이며, 이 길을 꾸준히 닦는 과정이 곧 교육이자 삶(修道之謂敎)이랬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자식 교육열의 덕분에 대학교육까지 받았다. 해방둥이인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만해도 졸업 후 중학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남자는 절반을 좀 넘었지만, 여자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 시절에 나는 나무로 치면 곧게 자랐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초등학교 동기들 모임에서 어느 학우가 내게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결혼해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기본 도리를 하고자 했고, 교수로서도 나름 도리를 지키고자 했다. 여기 도리(道理)는 사람이면 마땅히 가야할 길이기에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당초에 결혼한 마누라와 평생을 살고, 한 직장에서 무사히 정년을 맞는 게 기실은 예사 일이 아니라는 걸 나이 들어보니 알겠더라.

 

사람으로서 기본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의 연장에서 ‘돈오점수’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다운 삶의 과정은 ‘본성회복’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여기 ‘본성’(本然之性)은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품부한 바로 그 본래성이다. 자라는 과정에서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본래성이 시키는 대로 살기도 했지만, 무심코 관성 혹은 습기(習氣)에 따르다 보니 본래성에 어긋나기도 했을 게다. 이게 사람 사는 일상모습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내 ‘본래면목’을 확인해 보고 싶은 자각이 일어남에 따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돈오’(頓悟)라는 것이 따라 올 수 있을 게다.

 

나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대승기신론>을 만난 과정에서 얻어진 것 같다. 그 때의 ‘깨침’은 언어도단의 것이어서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그 깨침이 그리 영글지 못한 채로 살아오던 중에 <중용>과 <수심결>을 만나서 ‘점수’(漸修)의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마침내 새가 두 날개로 나르듯 ‘돈오점수’가 맞물려 돌아가는 계기를 만난 게 아닌가 싶다. <중용>은 ‘성’(誠)의 철학이다. 해서 성(誠)해 있는 것은 하늘의 길이요(誠者, 天之道也),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라(誠之者, 人之道也) 했다. 이어 <중용>은 천하의 지성(至誠)을 말했다. 그것이 진기성(盡己性)에서 출발해 진인성(盡人性)으로 발현되고, 다시 진물성(盡物性)으로 발현됨에 따라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중용>이 말하는 ‘점수’(漸修)의 장엄한 과정이다.

 

한편, 지눌은 <수심결>에서 깨친 다음 소를 길들이는 목우행(牧牛行)을 강조하면서 “깨친 뒤에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관조하고 성찰하여, 홀연히 일어나는 망념에 따라가지 말고 덜고 또 덜어내어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다. 지눌은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定慧等持)을 강조했다. 이것은 자기 성품의 체(體)와 용(用) 두 가지 뜻에 불과하니, ‘공적영지’(空寂靈知)가 바로 그것이랬다.

지눌에 따르면 선정은 곧 ‘체’요, 지혜는 ‘용’이다.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 ‘선정’이요,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성의 ‘지혜’다. ‘공적’과 ‘영지’를 자재하게 굴려 막음(遮=선정)과 비춤(照=지혜)이 둘이 아니게 되면, 이것을 ‘돈오’한 이후 '정'(定)과 '혜'(慧)를 동시에 닦는 것이랬다. 결국 지눌에게 ‘점수’(漸修)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과정이다.

 

삶의 과정에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문하는 과정에서 ‘돈오점수’는 스스로 뭐라고 말하기가 거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학문세계에서 ‘돈오점수’를 고백하는 것은 교수로서 하나의 책무가 아닌가 싶다. 나는 대학에서 교수로 일해 오는 동안에 학문적으로 조동일 교수(국문학)와 이홍우 교수(교육학)의 저술에 많은 공감을 얻었고, 국외로는 T. Skrtic 교수(특수교육학)로부터 공감한 게 많았다. 사실 <대승기신론>의 만남도 이홍우 교수의 <대승기신론통석>(2006)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종동일 교수는 국문학 쪽이지만 <우리학문의 길>(1993)에서 <창조하는 학문의 길>(2019)에 이르기까지 학문하는 방법론에 대해 내게 많은 공감을 주었다.

 

인문사회학문에서는 내용과 방법론에서 이런저런 공감을 얻는 과정에서 거기에 기대어 한 소식을 얻을 수 있다. 조동일(2019)은 “사람은 다 창조의 능력을 고루 지니고 있어 누구나 돈오(頓悟)가 가능하다. 이것이 창조의 비결이다. 만인 공유의 창조력은 비결이 아닌데, 모르고 있고 알아차리기 어려워 비결이라”한다고 했다. 그는 말로만 하지 말고, 창조력이 ‘돈오’로 나타나는 실제 상황을 알아차리라고 했다.

그 자신은 새벽에 잠을 깨려고 할 때 창조를 위한 발상이 다가오는 것을 이따금 경험한다고 했다. 한 소식이 오면 언제나 얼른 일어나 메모를 하고 글을 써야한다는 게다. 해서 쓰면서 읽어야 내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기신론에는 ‘발심수행’(發心修行)을 말했는데, 학문에서는 한 소식이오면 즉시 글로 써서 남겨 놓아야 한다. 이른바 ‘문도기필’(聞道起筆)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이론물리학자 장회익 교수는 아침에 도를 깨치면 낯에 글로 쓰고난 다음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공감한다. 깨친 것을 글로 남겨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게  마땅하다.

 

내 경우 공부하는 과정에서 창조적 발상과 글쓰기가 조동일 교수처럼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내가 꼭해야겠다는(혹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일종의 사명감에서 <대구특수교육사>(2007)를 기필했고,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정년 직전에 <한국특수교육론: 우리나라 특수교육(학)의 정체성>(2011)을 맘먹고 정리했다. 그리고 정년 후에 한국특수교육 담론의 뿌리(體)를 찾기 위해 <유학‧불학‧프로테스탄티즘의 한국특수교육론>(2013)을 썼다.

 

그 후 논문을 통해 내 나름의 ‘점수’(漸修) 과정으로 「한국특수교육철학의 정립: 희망과 존엄의 교육」(특수교육저널: 이론과 실천, 20(3), 2019)를 발표하고,「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한국특수교육 담론」(특수교육저널, 21(2), 2020)에 이어, 「우리나라(대구대)에서 특수교육 ‘철학하기’」(특수교육저널, 22(2), 2021)를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내 나름 특수교육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돈오점수’의 한 표현으로 쓰고 발표한 것이라 해도 좋을는지 모르겠다. 그 수용여부는 후학들의 평가에 따를 뿐이다. 후학들의 반응이 두렵지만 궁금하다.

 

부족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 나름 삶과 학문하는 과정에서 ‘돈오점수’에 접근해 온 족적을 정리해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간의 내 삶과 공부를 반조(返照)하는 기회로 삼고자한다. ‘돈오점수’는 내 삶과 공부에서 그 끝이 없는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삶과 공부의 성장은 그 끝이 없다.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