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교육의 목적과 교과교육의 정립
1. 문제의 제기
특수교육에서 농교육은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오늘날 농교육은 특수교육 분야에서 그 정체성 혼란과 더불어 기존의 농학교는 존립 자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찌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특수교육 전반의 공통적 문제에 기인하기도 하고 농교육 자체의 내부적 문제에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특수교육 전반의 문제와 농교육 내부의 문제는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농학교 교육은 특수교육에서 분리교육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유럽의 경우는 de I'Epee가 파리농학교를 설립(1760년)한 이래 그 전통이 250년이나 되었고, 미국은 T. H. Gallaudet가 하트포드농학교를 설립(1817년)한 이래 약 200년 가까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R. S. Hall의 도움을 받아 이익민 일가의 노력에 의해 평양에서 농교육이 시작(1909년)된지 100년을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초기의 농학교는 대부분 기숙제 중심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통합교육이 강조되면서 분리교육으로서 농학교는 점차로 그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21세기에 접어들며 테크놀로지와 의료기술의 합작으로 인공와우이식시술(cochlear implantation)이 청각장애 영유아에게 두루 확산되어 감에 따라 농학교 취학은 급격하게 추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학교는 존폐위기에 몰리게 되고, 궁극에는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떨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농학교가 특수학교로서 과거의 양적인 전성기를 회복하기는 어렵겠지만, ‘작은 학교’로서 그 명맥은 여전히 유지하게 될 것으로 본다. 양적인 면에서의 명맥 유지는 거꾸로 질적 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umacher)는 성장지상주의를 경계하면서『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라는 저서를 통해 전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이제 농학교는 지금의 위기를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구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할 때다.
우리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드러난 증상에 대한 뗌 질로 응하는 ‘대증요법’(對症療法)적 임기응변이 아니라 근본과 본질에 되돌아가 본래 목적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교육’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농교육에서 위기의 현상과 그 본질을 짚어봄과 동시에 교육으로서 농교육이 당연히 견지해야할 목적을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의 내재적 본질에 비추어 농교육에서 교과교육론이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가를 체계적으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2. 농교육 위기의 현상과 본질
최근 농학교는 분리교육과 통합교육의 틈새에서 정체성 혼란을 거듭 야기하고 있다. 통합(full inclusion)은 하나의 당위로서 교육이상세계(edutopia) 구축을 위해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 얼마나 양질의 교육을 보장해 주느냐 라는 실천적 문제와 연관해서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농학생을 공교육에서 희생의 제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통합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독수리를 까마귀로 만들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당사자 본인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만족하는 가운데 양질의 교육을 받느냐가 궁극적으로 중요하다. 특정 농학생이 농학교에 배치되느냐 일반학급에 배치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의 교육적 방편(方便)으로서의 선택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목하 우리나라 초․중등학교 교실이 농학생들로 하여금 얼마나 만족스럽게 통합교육을 받을 수 있는 문화와 환경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속에서 학교폭력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실은 근원적으로 통합교육의 실천을 암담하게 한다. 우리에게 통합은 정책적 무늬에 불과하고 학교교육의 실상은 이런저런 명분으로 서열에 따른 분리가 끊임없이 조장되고 있다. 농학교는 농학생들이 안정되게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는 삶과 교육의 장으로 여전히 독특한 존재가치를 지닌다. 특히, 농학(Deaf Studies)의 입장에서 볼 때, 농학교는 농문화의 산실로서 그 존재가치는 여전히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분리냐, 통합이냐 라는 양단의 문제를 넘어서는 농의 실재(reality) 혹은 그 정체성(identity)과 맞닿는 문제이다.
한편, 최근 인공와우이식수술의 개가(凱歌)는 농유아의 청각재활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농세계(Deaf world)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인권침해로서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청세계(hearing world) 입장에서 볼 때는 기술혁신에 따른 복음의 혜택을 왜 문제 삼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농인들에게는 그들이 구축한 농문화(Deaf culture)를 향유하면서 그 속에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농인권과 그 존엄성의 차원에서 농인들은 “인공와우이식수술은 이 지구상에서 농의 씨를 말려 쓸어내려는” 일종의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로 비판한다. 이처럼 인공와우이식수술은 전형적으로 농(deafness)을 질병과 같은 퇴치문제로 대상화한다.
게다가 인공와우이식수술이 수술적 처치로서는 성공하더라도 실제로 수술 후에 언어재활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보장되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또 최근에는 디지털 고성능 보청기가 다양하게 개발됨으로써, CI 수술을 받지 않고도 청각재활의 가능성은 훨씬 폭넓게 열려져 있다. 수술은 최후의 선택일뿐더러 혹여나 잘못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타격으로 지울 도리가 없다. 그래서 부모입장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수술 여부를 결정할 때에 의사의 권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수술 후의 예후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더불어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 윤리적 성찰이 충분히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말 평생을 두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
농학(Deaf Studies)의 입장에서 ‘농’(Deaf)은 결코 ‘장애’(disability)가 아니다. 다만 다문화사회에서 수어(sign language)를 사용하는 하나의 소수언어집단일 뿐이다. 그리고 농인들이 사용하는 수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음성언어와 언어양식만 다를 뿐 언어로서의 독립된 자질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문제는 농인들이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수화통역 지원을 얼마나 제대로 해주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장애학(disabilty studies)에서는 장애를 보는 패러다임이 개인모델에서 사회모델로 이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즉, 장애는 질병과 같은 것으로 개인의 비극으로 환원지울 문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사회가 가공한 병리 문제이므로 인간이 몸담은 사회 자체가 무장애(barrier free) 사회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존의 농교육도 그 패러다임적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3. 농교육의 목적: 무엇이 목적인가?
모든 교육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심성함양(心性涵養)이다. 이 ‘심성’을 동양에서는 하늘의 명령(天命之性)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공자는 50대에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여, 인간 본성에 품부된 하늘의 명령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꺼이 그것에 따르는 삶을 살고자 했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 심성함양을 서양에서는 흔히 도덕성 함양으로 표현했다. 물론 인간 심성의 바탕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동서양과 시대흐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18세기 중후반에 de l'Epee가 농교육을 처음 시작하면서 농아동도 일반아동과 같이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그 도구로서 수화를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레뻬가 농교육의 목적을 일반아동과 같이 도덕성을 함양하는 데에 두었다는 것이다. 수화에 의해서 교과교육을 하면 농아동도 일반아동과 같이 도덕성이 함양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화를 활용했다. 그리고 그는 수화야 말로 농인의 진정한 모국어라고 믿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아도 당시 레뻬의 농교육 목적관과 그 방법적 접근은 퍽 타당하고 옳았다. 그러나 뒤이어 독일에서 S. Heinicke는 농교육 방법론으로 구화법을 제기함으로써, 이때부터 농교육에서 소위 구화와 수화의 방법논쟁은 하나의 소모적 논쟁의 양상을 띠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그 불씨는 남아 있다.
이처럼 농교육에서 언어지도 방법논쟁에 매달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에 본의 아니게 ‘방법’이 ‘목적’으로 둔갑하는 이른바 본말전도(本末顚倒) 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교육에서 근본이 지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말이 근본인양 착각을 할 경우는 그 폐해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다. 바로 이런 본말전도 현상이 농교육에서 그 교육이 지향해야 할 내재적 내지는 본질적 목적마저도 간과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농교육은 말 가르치기 교육이 아니다. 그렇다고 농교육은 수화지도를 일삼는 교육도 물론 아니다. 모든 교육의 본질적 목적이 그렇듯이 농교육은 ‘심성함양’이다. 이 ‘심성함양’을 위해 무엇(what)을 어떻게(how)할 것인가 라는 교육내용과 방법이 도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심성함양’으로서의 교육목적은 우리가 현실적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심성함양으로서 교육목적이 우리가 임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엄한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중용(中庸』첫 머리에 나오는 性-道-敎의 연관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것은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로, “하늘이 명하는 것이 이른바 性이고, 이 性에 따르는 것이 이른바 道이고, 이 道를 닦는 것이 이른바 敎(즉, 교육)”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은 하늘의 명령으로 인간에게 품부(稟賦)된 性에 연결되어 있고, 교육은 결국 이 性이 시키는 대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꾸준히 닦는 과정이다. 이것을 현대적 교육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修道’는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에 해당하며, ‘率性’은 교육목적이고, 이 교육목적은 곧 하늘의 지엄한 명령에 의한 것이기에 우리가 임의로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농교육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인 교육목적으로서의 ‘심성함양’은 까마득히 간과한 채 오로지 ‘말 가르치는 일’에 몰두해 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구화교육’ 지상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말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하는 동안에 심성함양은 제절로 따라붙게 되어 있다”고 반론을 펼 수 있을 게다. 딴에는 그럴 듯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농아동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소리를 강요하는 것은 심성함양은 고사하고 본래의 심성을 멍들게 하는 역기능적인 면이 적지 않았다고 본다. 농인은 자기중심적이고 충동적이며,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흔히 지적하곤 하는데, 농인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청인 위주의 청세계(hearing world)가 농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농교육이 교육다워지기 위해 그 교육은 하늘이 명령한 ‘심성함양’에 연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농교육에서 그 연관성의 정립을 위한 방편적 거점으로 이하에서는 교과교육의 정립을 논의하고자 한다.
4. 농교육에서 교과교육의 정립
농교육에서 교과교육은 그 난점(難點)이 특별하다. 즉, 농교육에서 교과교육의 난점은 농학생들이 학습해야 할 교과내용을 소화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로서 ‘문해’(文解; literacy)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전형적인 의미에서 ‘교과’는 문자로 된 서책의 형식으로 제공된다. 그런데 농학생들은 교과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 문해능력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학년이 올라 갈수록 학력결손은 필연적으로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다. 농학생의 읽고 쓰는 능력이 정상적으로 회득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필수적 전제로 1차 언어능력(first language competency)이 적절히 내축(內築)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아동들은 만2-3세경에 거의 마스터해야할 1차 언어능력이 극히 부실한 상태이기에 2차 언어능력으로서 문해능력을 획득하는 데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목수가 아무리 뛰어난 대패질 능력을 지니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솜씨를 발휘할 연장이 없으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교과공부에 필요한 잠재적 학습능력은 모든 다른 아동과 꼭 같이 농아동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발휘할 연장이 제대로 확보되어 있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연장 혹은 도구로서의 언어능력이 농아동에게 원래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농아동의 특성에 맞는 적절한 언어 환경과 자극을 구성해주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다. 그 환경구성의 일차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은 자녀 양육을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부모의 몫이다. 그러나 농 자녀를 둔 부모의 90% 이상은 청인 부모이기 때문에 청세계의 구어환경 구성을 우선한다. 오늘날 농교육에서 토털 커뮤니케이션 이후에 2Bi(Bilingual/Bicultural)접근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가를 이런 측면에서 짚어 봐야 한다.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는 농교육이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구조적 난점이기도 하다.
교과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그것을 담당하는 교사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농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은 청각장애학생들이 교과학습에 실패하는 것을 전적으로 학생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위에서 지적한 1차 언어획득의 실패로 인해 2차적으로 문해능력의 획득에 실패하고 이것은 곧 교과교육의 실패로 연결되는 그런 구조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런 연결구조가 농학생의 교과공부 실패를 가져오는 중요한 원인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거꾸로 그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 쪽에는 과연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라고 자문자답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농교육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해 교과교육에서 교사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에 비추어 결코 그 책임을 면할 도리가 없음을 통감(痛感)할 수 있어야 한다.
어째서 인가? 교사의 삶은 교과를 가르치는 일과 분리시킬 수 없다. 즉, 교사는 전형적으로 교과적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는 동안 교과는 교사에게 내면화 되어 있어야 한다. 농학교 교사들은 교사로서 자신의 삶이 교과와 일원화 되어 있는가, 이원화 되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교과를 가르치는 일과 자신의 일상적 삶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로서 자기가 하는 일의 막중함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전문직보다도 교사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반조(返照)해 보는 특별한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교직은 본질적으로 성직(聖職)이고, 교육은 궁극적으로 종교와 맞닿아야 한다. 외현적 의례로서 종교와 교육은 전혀 다르지만, 내면적 심층에서 으뜸 되는 가르침으로서의 종교(宗敎)와 가르쳐 길러내는 교육(敎育)은 서로 만나야 한다. 그래야 교육은 ‘심성함양’으로서 본래 목적과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이것은 교육과 종교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다.
교사는 교과를 가르치는 동안 교과와 더불어 혹은 전적으로 교과를 통해 그의 인품이 학생들에게 전달된다. 교과내용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간접적으로 교사의 인품이 결코 긍정적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반대로 교사가 성격 면에서 다소 괴팍한 부분이 있더라도 교과교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동안 그 교사는 학생들의 존경대상으로 영향을 미치는 데에 특별한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교사의 삶은 전형적으로 교과적 삶으로 체현(體現)되어야 한다. 농학교 교사들이 교과교육의 실패를 온통 학생들에게 되돌리고 스스로는 교과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정당화한다면 진짜 농교육은 실패의 구릉에서 영원히 헤어날 도리가 없다. 흔히 말하는 구제불능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어떤 교사도 완벽한 수준에서 교과적 삶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교사 스스로가 호학(好學)의 삶을 살지 않고서는 어떤 경우에나 학생에게 공부하는 삶을 강요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과교육에 연관된 교사의 ‘호학적’(好學的) 삶은 전형적으로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으로 이어져야 한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교과를 가르치는 실제적 과정은 분명하게 설명해서 밝히는 ‘명변’(明辯)의 단계에서 드러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전단계로 博學-審問-愼思가 줄기 있게 이어져야 한다. 해서 교사는 그가 확실히 이해한 것만 가르칠 수 있다. 교과교육에서 교사의 일차적 임무는 ‘明辯’의 단계에서 일단 끝나는 것으로 보기 쉽지만, 교사는 그가 말한 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하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에서 ‘篤行’이 따라 붙게 되어 있다. 교사가 교과교육을 하는 동안 진짜 교육다운 교육을 구성하느냐 않느냐는 교사에 의해서 學-問-思-辯-行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내면화 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평생의 교직 경험을 통해 필자가 얻은 최종적 교훈이다. (대구영화학교 교사연수 특강원고, 2012.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