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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향의 삶

평촌0505 2023. 5. 26. 20:28

나이 들어가면서 내 삶은 과연 상향의 길로 가고 있는가? 신체적 성장기준으로 보면 나의 성장은 18세경에 정점을 찍고 20대 중반 이후에는 하향의 길로 접어들었다. 50대 중반이 되니 흰머리가 부쩍 늘어나고 기력이 떨어진다는 걸 느꼈으나, 그 속도는 완만했다. 회갑이 지나고 정년 무렵이 되니 할아버지가 되어 버렸다. 손녀 지현이는 나랑 꼭 60년의 차이다. 그래도 70대 초반까지는 산책할 때 걸음걸이가 빠른 편이었다. 코로나 환란이후 70대 후반이 되니 확실히 노화현상을 직감한다.

 

산책길에 나서면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걷다가 앉아서 쉬기를 좋아한다. 게다가 눈과 이빨은 진즉에 수리보수를 한 터였다. 몇 년 전부터 노화성 난청까지 진행되고 있다. 속절없이 노인이 된 게다. 신체적 하향 곡선은 어쩔 수 없지만 진행속도가 어떻게 조절되느냐가 문제다. 비교적 완만히 유지되다가 어느 지점에서 급속히 떨어질 게다. 그 변곡점이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이 그 변곡점인지도 모른다. 갈수록 평균수명이 길어질 게 분명하다. 언필칭 100세 시대라지만 노년에 오래 사는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답이 없다.

 

몸과 마음은 둘이면서 하나다. 젊어서는 몸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지만, 나이 들면 마음이 몸을 조절하는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해서 노자는 내게 몸이 없다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 했다. 그렇다고 노년에 몸을 위한답시고 너무 양생(養生) 쪽으로 기우는 것도 추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심리-철리(哲理)가 조화를 이루는 섭생(攝生)이 중요하다. 나는 젊어서 철학 쪽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과를 지원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특수교육 쪽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 덕분에 나는 평생 특수교육학 교수로 일했다. 젊어서는 심리적 갈등도 심했으나, 교수로 일하면서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었다. 항산(恒産)이라야 항심(恒心)이 가능하다는 걸 실감했다.

 

에릭슨은 노년에는 누구나 철학하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노년에 신체적으로는 내리막으로 하향할 수밖에 없지만, 삶의 지혜가 쌓여 나름 ‘의미의 수호자’가 된다고 했다. 해서 노년은 삶의 완성단계이자 지혜가 완숙하는 단계다. 나는 상향하는 삶의 피라미드를 다음처럼 위계화해 본다. 가장 밑변은 무의식계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본능과 감성-이성-영성으로 중층적 위계를 이루는 것으로 정리해 보았다. 우리 인간은 심층의 무의식계로부터 평생 영향을 벋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 무의식계는 본능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는 양면성을 지닌다. 본능은 즉각적이고 야생적이지만, 본성은 즉각적이면서도 순리적/자연적이다.

 

해서 나는 인간의 심층 무의식계가 본능의 지배를 받느냐 본성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은 천차만별로 벌어진다고 본다. 공자는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性相近), 후천적으로 길들여지는 습성은 서로 멀다고(習相遠) 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본래성은 기본적으로 착한 것이지만, 후천적 습성이 나쁜 쪽으로 물들면 그만큼 악한 쪽으로 기운다는 게다. 이 대목에서 <중용> 첫 머리가 떠오른다.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누구에게나 품부되어 있는 게 인간의 본래성이고(天命之謂性), 이 본래성에 따르는 것이 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이고(率性之謂道), 이 길을 부단히 닦는 과정이 교육이자 삶(修道之謂敎)이랬다.

 

하늘이 품부한 본래성에 따르는 삶이 상향적이기 위해서는 감성적-이성적-영성적으로 축이 이어지되, 그 과정적 양상이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이성적이기보다는 영성적인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삶이어야 할 게다. 감성은 이성과 영성을 내포하지만, 그 감성의 발현이 감정적 즉흥으로 좌우되느냐 이성적 합리로 기우느냐에 따라 우리는 감성적 존재냐 이성적 존재냐를 판가름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성의 기능>에서 이성은 곧 내율/자율(self-discipline)에 따르는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했다. 해서 내면의 나침반에 따르는 삶은 존엄한 삶이다. 그는 다시 이성의 기능을 실천적 이성과 사변적 이성으로 대별했다. 실천적 이성은 현실세계에서 즉각적‧실천적 결정에 깊이 관여하는 반면에, 사변적 이성은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이해의 증진에 기여하는 것이랬다. 해서 사변적 이성은 이해의 완성을 지향한다. 나는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사변적 이성’의 기능에서 이성과 영성의 접합/만남을 생각한다.

 

물론 영성은 감성과의 만남을 통해 돌연히 발현되기도 한다. 이른바 돈오(頓悟)다. 이를테면 종교적 경험은 다분히 감성의 승화로서 영성적 체현으로 드러날 수 있다. 수운 최제우의 종교적 체험으로 표현된 ‘네 마음이 곧 내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감성적이면서 영성적 체현의 표현이다. 나는 햇살 좋은 날 산책길에서 밖의 자연과 내안의 자연(본래성)이 소통하고 만나는 것을 감지한다. 그럴 적에는 내가 대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연이 내안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그 느낌은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른바 언어도단의 경지다.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인류역사에 기여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영적(spiritual) 휴머니즘으로의 전환이 긴요하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탈종교시대의 열린 종교를 위해 <종교에서 영성으로>(2021)의 전향을 말했다. 나는 기후위기 시대에 생태적 삶과 영성적 삶의 만남을 소망한다. 그 소망이 체현되는 과정이 내 여생의 숙제다. 나의 삶에서 정신적/영적 성장은 그 끝이 없다. 그게 인간존재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