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至誠)은 진성(盡性)의 과정이다
<중용> 20장에 “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道)이고(誠者, 天之道也), 성(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誠之者, 人之道也)”이랬다. 해서 성(誠)해 있는 것은 성인(聖人)의 경지라면, 성(誠)해 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경지다. 보통사람이 ‘성지’(誠之)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고 실천하는 것(擇善固執)이다. 이 ‘택선고집’(擇善固執)의 방편(방법원리)으로서 <중용>은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기한다. 이것은 품위 있는 삶의 길이자 지성인이 체득해야 할 삶 그 자체다.
두루 배우고 자세히 묻는 게 학문(學問)의 출발점이다. 질문을 통해 생각이 가지런히 정리되면 말이나 글로 사리를 분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말한 대로 돈독히 행해야 한다. 이처럼 ‘學-問-思-辯-行’이 순환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에서 상달(上達)의 삶이 드러난다. ‘상달’의 과정이 지속될수록 비록 보통사람(凡人)이라할지라도 성인(聖人)의 반열에 접근하게 된다. 여기서 ‘성인’은 보통의 ‘범인’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상이다. 따라서 개념적으로 범인은 성인의 이상태에 합치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지(誠之)의 삶을 꾸준히 실천하는 ‘택선고집’의 과정에 ‘성인’의 속성은 우리 보통사람의 삶속에 내재한다.
<중용>은 성실해지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誠之’의 삶을 ‘지성능화’(至誠能化)라고 했다. 해서 지극한 정성이라야 능히 인격적 변화와 세상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게다. ‘지성’(至誠)은 곧 본래성이 체현되는 진성(盡性)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중용> 22장에는 천하의 지극한 정성(至誠)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은 물론, 천지의 화육(化育)을 어떤 절차로 돕는지를 다음처럼 큼직하게 내 걸고 있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至誠)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盡己性), 다른 사람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가 있다.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盡人性), 모든 사물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盡物性),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천지와 더불어 온전한 일체에 이르는 것이다(<중용> 22장).
<중용> 첫 머리에는 하늘이 명하는 것이 이른바 본래성이고(天命之謂性), 이 성(性)에 따르는 게 이른바 도(率性之謂道)라 했다. 해서 솔성(率性)하여 ‘진성’(盡性)에 이르는 게 곧 ‘지성’(至誠)이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래야 진기성(盡己性)-진인성(盡人性)-진물성(盡物性)-천지화육(天地化育)으로 이어지는 변화가 순차적‧원심적으로 일어난다는 게다. 이미 성(誠)해 있는 것은 하늘의 길이지만, 성실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誠之)은 보통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이다.
또한 이것이 성학(聖學)의 길이다.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오직 ‘경’(敬)이라는 한 글자가 성인이 되는 성학(聖學)의 시작이자 마침이 되는 것이랬다. 그는 심학(心學)으로서 ‘성학’을 말하면서 “요컨대 공부하는 요령은 어디까지나 한결같이 경(敬)의 태도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라면서 ‘지경’(持敬)을 강조했다.
지성(至誠)은 곧 진성(盡性)이자 지경(持敬)이다. 그리고 내안의 본래성이 온전히 발현되어야 마침내 천지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와 더불어 온전히 일체가 된다. 지극한 정성이래야 나를 구하고 세상과 지구를 살려 낸다. 해서 ‘지성능화’(至誠能化)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론과 그 체현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