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 (4) 중고등학교 시절(1958-1964)
초등학교 시절(1952-1958)에는 노는 게 일이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니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영어와 수학은 공부하지 않고는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영어공부는 집에서 병모 형님이 챙겨주면서 무조건 문장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중1 영어책에 나오는 1과의 “Winter is over. Spring is here again."이라는 문장이 내게 입력되어 있다. 그리고 집에서 5킬로 이상이나 되는 구미중학교에 걸어 다니면서 영어단어를 외우곤 했다. 내게 영어공부의 기초는 이런 식으로 다져졌다. 수학은 담당(성정경)선생이 잘 가르쳐 주어 제미 있게 따라 갈 수가 있었다. 늦게나마 공부라는 걸 조금씩 익혀 갔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보담 한 해 선배인 이웃동네 지득용이라는 친구와 가까이 지나면서 함께 공부하곤 했다. 득용이는 공부도 잘 했지만 품성도 좋았다. 그의 성실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나는 한 동안 아예 득용이 친구 집에 가서 공부를 하곤 했다. 그는 한양공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결혼 후 서울서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세월이 훨씬 지나고 내가 1990년대 말 즈음에 미국 출장을 갔다가 워싱턴DC에서 만나 그의 집을 방문한 게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는 미국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변했다.
중학 2학년이 되자 덕순 누님이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가 힘든데 부산 큰형님(병태 형님)에게 편지로 자전거를 사달라고 부탁하라는 게다. 시키는 대로 편지를 보냈더니 마침내 큰형님이 부산서 자전거를 구입해 주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에서 몇 차례 넘어지기도 했지만 쉽사리 자전거 타기를 익혔다. 그때부터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중학교를 다녔다. 들길로 다니며 영어단어를 외우던 게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는 같은 구운초등학교의 동기 여학생인 유하주와 박강옥의 가방도 실어주곤 했다. 때로는 앞뒤로 두 사람을 같이 자전거에 태워주는 호기도 부렸다. 지금 생각하니 참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나의 옛 여친이 되었다. 9년 동안 같은 교실과 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니 성장과정에서 별난 인연이었다. 특히 나보담 나이가 한 두 살 많은 하주는 내게 옛 여친인지 연인인지 평생 그 정체성이 애매하다. 그는 내가 대학 다닐 때 결혼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중학교 시절에는 그래도 공부하는 학생 축에 들었다. 한 번은 지리과목 시험을 치루고 학생들이 문제가 어려웠다고 하니 지리 선생이 느닷없이 내 이름을 들이대면서 만점이라고 했다. 중2때는 영어선생(노상태)이 담임이었다. 한 번은 공부도 잘하고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유성자라는 여학생이 노상태 영어선생 집에 놀러 오라고 해서 간적이 있다. 그리고 세계사를 가르친 곽도규 선생이 개인적으로 내게 관심을 보여 주신 게 기억에 남는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교문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데, 왼손으로 하니까 “왼손으로 경례하는 놈이 어디 있냐!”고 꾸지람을 했다. 후에 곽 선생님은 내가 오른 손을 다친 걸 알고 미안하게 여겼던 같다.
나의 여친 하주는 유성자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부터 가톨릭에 입문하였다. 그만큼 유성자는 공부도 잘하고 나이가 많아 여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게다. 그는 내게도 앞으로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일러주었다. 그야말로 큰언니였다. 어떤 계기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3때 우리는 남녀학생 19명이 모여 써클을 만들어 우리끼리 가끔 만나 놀기도 했다. 졸업할 때는 대대장을 맡은 배성근의 고향 마을인 비산 나룻 터에서 함께 배를 타고 논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 나는 내 꽃 이름을 ‘아카시아’로 했다. 5월이면 길가의 아카시아 향기가 참 좋았다. 중학교 때 가까운 친구들은 지금도 나를 ‘아카시아’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수업마치고 오후에는 남학생들끼리 어울려 배구시합을 하고 찐빵내기를 한 게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찐빵과 국화빵이 그렇게 맛있었지만, 그걸 배불리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나는 순진하고 배짱이 없었다.
1961년에 구미중학을 졸업하고 나는 부산 큰형님이 계시는 부산 동래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동래고등은 부산에 있는 전통 있는 공립학교였다. 구미중학을 졸업하면 대부분은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때 나는 부산으로 갔고, 박도라는 친구는 서울 중동고등학교로 간 것을 훨씬 뒤에 알았다. 박도의 아버지 박기홍 선생은 이승만 정권 때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그때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선거구호가 참 인상적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박도는 아버지가 정계에 발을 디뎌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서울서 고등학교를 4년이나 다니면서 엄청 고생을 했다. 박도는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서 중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는 정년하고 원주로 이주해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즈음도 나랑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중학동기다.
나는 평촌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까지 전형적인 시골에서 자랐다. 사춘기에 고향을 떠나고 보니 고향이 무척 그리웠다. 고향은 내게 태생적 원형이었기 때문이다. 부산 큰형님 집이 문현동이었는데, 도시의 빈촌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고루 가난한 시대였다. 겨울철에는 연탄을 절약하느라고 내가 잠자는 방은 거의 냉방이었다. 그나마 내게 공부하는 방이 따로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었다. 어쨌든 당시의 부산생활은 내게 낮 설고 가난한 환경이었다. 문현동에서 동래에 있는 동래고등까지는 비교적 거리가 먼 편이어서, 기차통학을 하기도 했다. 전차나 버스를 타면 등하교시에 너무 복잡해서 힘들었다. 이처럼 도시생활은 내게 따분하고 불편한 게 많았다. 속으로 늘 고향이 그리웠다.
그나마 나는 동래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구미중학 시절보다 좀 더 학구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동래고등은 교사진도 좋았다. 구미중학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동안에도 부산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긴 선생이 있었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곧장 시골 고향으로 갔다. 방학을 고향에서 보내는 동안 옛 친구들도 다시 만나서 무척이나 좋았다. 한 번은 같은 마을에 중학을 다니는 매화라는 여학생이 지나가는 데 참 예쁘게 보였다. 그리고 방학 때 이웃마을에 노래자랑을 하는 자리에 올라가서 ‘해운대 엘레지’라는 노래를 부른 기억이 난다. 이런 게 내게는 사춘기의 까마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방학을 마치고 다시 부산에 내려오니 이래저래 고향생각이 더 간절했다. 추석 때는 학교에 결석계를 내고 당일 고향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내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매화라는 소녀를 그리는 생각이 얽혀 있었다. 평생 처음으로 나는 고향마을의 그 소녀에게 ‘연애편지’라는 걸 보냈다. 고향은 사춘기를 보낸 곳이라는 그 말이 딱 맞다. 당시에 내밀한 연애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나의 글쓰기 기초가 다져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학과 공부에 비교적 성실했다. 한 번은 시험공부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벽에 날이 밝아지는 때가 있었다. 내 평생 공부하느라 밤샘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잠자는 걸 우선적으로 잘 챙기기 때문이다.
고2 때 나는 뜻밖에도 우리 반(2학년 2반) 실장을 맡았다. 그때만 해도 담임선생이 그냥 지명하면 실장이 되는 게다. 아마 당시에 특설반을 한 학급 만들고 우리 학급에서는 내가 성적이 제일 좋았던가 보다. 그러니 시골에서 온 촌놈이 졸지에 급장이 된 게다. 내가 교무실에 우리 반 출석부를 가져다주고 가져오기 위해 가면, 어느 선생님이 2반 담임은 복도 많다면서 나를 잘 보아주었다. 그리고 문현동에 있는 보영극장을 운영하는 사회과 선생은 내가 문현동에서 다니는 걸 알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고는 극장표도 그냥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선생님들에게 온순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보인 게다. 아닌 게 아니라 동래고등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동기회 합동 칠순잔치(2015)에 참석했더니 일본서 교수로 일하던 이경민이라는 학우가 나를 보자 “병하! 자네는 퍽 온순한 사람이었잖아.”라면서 용케도 나를 금방 알아보는 게 아닌가. 고2때 한 반이었던 학우다. 그게 인연이 되어 이 교수는 자기 저서도 보내주고 지금도 내게 일본서 연하장을 매년 보내온다. 이렇게 사람의 인연은 우연한 계기로 다시 이어진다.
고등학교 시절 나랑 가까운 친구로는 조현준, 강상중, 김상문 세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조현준은 부산중학을 나와 나랑 함께 공부했다. 아버지는 4.19때 마산 경찰서 간부였는데 돌아가시고 전포동에서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남향집이 좋아 보여 가끔 놀러가곤 했다. 우리는 범일동 학원에도 함께 다니면서 길가에서 오뎅을 사먹곤 했다. 때론 소주 한 잔도 걸쳤다. 그는 고려대 법대를 들어가고, 나는 연세대 철학과를 들어가 서울서도 만나곤 했다. 내가 서울서 철학과를 그만 두고 대구대(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에서 특수교육과에 다닐 때, 현준이는 방학 때 부산가는 길에 일부러 대구에 내려 강상중과 세 사람이 함께 만나 어울려 놀기도 했다.
강상중은 고향이 김해인데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한 번은 여름에 상중이 집에 현준과 함께 놀러갔다. 나는 낙동강 구포다리의 길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되질 않을 정도로 강 하류가 넓었다. 내 고향 고아 평촌에서 본 낙동강과 그 위용이 너무 달랐다. 그 후 나는 봉화 쪽에서 낙동강을 보고 냇물처럼 폭이 좁은 걸 보고 상류의 낙동강이 이렇게 초라한가 싶었다. 김해 강상중 집에서 농사지은 도마도를 시도 때도 없이 난생 처음으로 푸짐하게 먹어봤다. 그리고 밤에 강둑을 거닐며 마을 처녀들과 어울린 기억도 난다. 게 중엔 내게 누님뻘 되는 아가씨가 나를 동생처럼 다정히 대해 주기도 했다. 이래저래 김해 상중이 집에 가서 놀다 온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상중이는 경북대 농대 수의과에서 공부를 해 대구에서 두 사람은 주말에 자주 만나곤 했다. 상중이가 겨울 방학 때는 우리 집에 놀러와 고향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는 신암동 누님 집에 거처를 두고 조카들 공부도 시키곤 했다. 한 동안은 내가 상중이 방에 가서 함께 잠자고 돌아오곤 했다. 졸업하고도 고등학교 동기 중에 그래도 강상중이가 가장 꾸준히 내게 연락을 해주고, 동기들 모임 소식도 가끔 전해 주었다. 그는 마라톤을 잘해서 선수가 아닌 일반시민 자격으로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초청을 받은 경력이 있다. 몇 해 전(2018)에는 내가 운전을 해서 상중이랑 양평 쪽에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현준에게 가서 모처럼 칠순이 지나 세 사람이 회동을 했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가 어느 사이에 노인이 되어 가고 있으니, 가는 세월 어찌하랴!
김상문이는 밀양 친구인데 나랑 인연이 좀 특별한 면이 있다. 그는 범래골에 집이 있었는데, 걸어서 문현동 형님 집에까지 내게 놀러오곤 했다. 내가 철학과 쪽으로 진로 방향을 잡자 그는 자기 큰형인 상기 형이 부산대 철학과를 졸업했다면서 철학 쪽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곤 했다. 간접적으로 상문이는 내가 철학과 쪽으로 방향을 굳히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 게다. 상기 형은 한때 계명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그만 두었다. 계명대에 계실 때 사택에서 그 형님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게 기억에 남는다.
나는 한 때 해양대학 쪽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내가 문과 체질인 걸 알고 아예 ‘문사철’ 가운데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로 했다. 내 나름 소박하지만 학문에 대한 관심이 있어, 지혜(지식)를 사랑하는 ‘철학하기’를 택한 게다. 당시 큰형님은 대학도 그냥 부산에서 계속하라고 했지만, 나는 굳이 서울 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철학과 쪽으로 진로를 굳히고는 자연히 교과공부는 등한시하고 인생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고민은 늘어나고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감당하지도 못할 고민이 그 끝이 없었다. 그리고 고2 후반부터는 여름방학 때 호기심으로 고향친구들로부터 배운 담배를 조금씩 피우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고 담배 피우는 친구들 끼리 담배 피우는 비밀공간에서 함께 만나기도 했다. 어떤 학우는 네도 담배 피우느냐면서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식으로 탈선의 쾌감을 맛보곤 했다. 성실하면서 좀 삐딱한 구석을 가지고 있었던게 고등학교 시절 내 모습이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