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 (6) 현장 경험과 교수직 입문, 그리고 결혼
석사를 마치고 1971년 가을에 이태영 학장께서 직접 나를 불러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할 게 아니라 일본의 특수교육 현장을 직접보라면서 일본행 단기연수 기회를 주선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 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태영 학장께서는 교직원들에게 일본방문과 단기연수를 적극 활용하도록 했다. 나는 안병즙 교장을 단장으로 한 일본연수단에 뒤늦게 그냥 끼어들었다. 후쿠오카에 내려 그날 저녁 갑자기 위경련을 일으켜 큰 고생을 했다. 떠나기 전 부산 형님 집에서 먹은 회가 잘못 된 것 같았다. 물론 첫 외국 나들이에 긴장한 탓도 있었을 터이다.
일행과 동경에 약 1주간 머물다가 나 혼자 경도(京都)에 있는 노가미(野上) 교수 연구실로 가서 교토 일원의 장애인 복지시설과 특수학교를 방문했다. 그 때만 해도 일본과 우리나라의 장애인 교육수준이나 복지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그리고 내가 교토에 머무는 동안 김중근 선생께서 혼자 있는 나를 가끔 찾아와 보살펴 주었다. 노가미 교수는 원래 심리학 교수였으나, 교토 일원에서 볼런티어 지도자로서 사회참여활동을 하는 게 인상에 남았다. 나는 와세다 대학에 가서 노가미 교수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이런 게 인연이 되어 후에 나는 대구대 특수교육과 학생들의 볼런티어 서클 지도교수를 맡기도 했다.
1972년 2월에 이태영 학장께서 나를 불러 현장경험도 중요하니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대구영화학교에 가서 일하면 1년 늦어도 2년 안으로 다시 대학으로 부르겠다고 하셨다. 나도 농교육 현장 경험이 중요할 것 같아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이처럼 이태영 학장께서는 모교출신에 대한 배려가 각별한 분이었다. 대구영화학교 초등부 4학년 담임을 맡아 약 15명 정도 되는 청각장애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같은 학년에 정춘혜 선생이 다른 반을 맡아 있으면서 초임인 내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정 선생은 교생실습 할 때 나의 지도교사라는 인연이 있었다. 영화학교에 근무하면서 선배인 류상덕 선생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교분을 가진 게 인상에 남는다. 당시에 류상덕 선생은 계명대 교육대학원에서 교육사회학 공부를 하고 있던 터였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학문적 자질이 돋보였다.
1972년 1학기를 마칠 즈음에 대학에서 2학기부터 대학에 올라와서 강의할 준비를 하라는 전갈이 왔다. 내가 생각보다 빨리 대학으로 올라가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동안 초창기부터 특수교육과 학과장으로 많은 일을 해오신 안태윤(安泰潤) 교수께서 갑자기 경북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참 운이 좋았던 게다. 그렇잖아도 안태윤 교수께서 개인적으로 자기는 특수교육과에서 할 일을 어지간히 했으니, 당신 같은 모교출신이 자리 잡아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안태윤 교수는 2011년 3월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재단발령으로 전임강사가 되었으나, 주당 10시간 강사료 기준으로 월3만원을 방학 중에도 받기로 하였다. 그나마 고정 급료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1973년 3월부터 나는 권기덕 교수와 함께 교육부로부터 전임강사로 교수직 임용승인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특수교육과는 안태윤 교수 후임으로 두 사람을 채용하게 된 게다. 권기덕 교수는 맹교육 쪽으로 강의를 담당하였다. 후에 권 교수는 사회과학대학에 신설된 심리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임으로 ‘세계장애인의 해’(IYDP)를 기념해 1981년에 맹인 임안수(任安秀) 교수를 특채하였다.
정식 교수로 급여를 받으니 이제는 가정을 가지고 살 수 있겠다 싶어, 1973년 4월 13일에 서둘러 결혼을 했다. 결혼 주례는 이태영 학장께서 해주셨다. 이미 최영숙과는 대학원 시절부터 사귀어 오던 터여서 결혼하였다. 거처를 마련하는 것은 내가 해야 했기에 안태윤 교수님께 20만원을 빌려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동안 형수씨에게 눈칫밥을 먹는 데 이골이 났다. 이제 따로 독립해 살림을 차리니 나도 새로 가장이 된 게다. 가정을 이끄는 권한과 책임이 동시에 내 양어깨에 걸린 게다.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이태영 학장께 인사하러 들렸더니 “이제 고생 줄에 들었네.” 라며 빙긋이 웃으시는 게 아닌가. 당시는 그 말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으나, 살아가면서 그 한 마디가 한 번씩 내 가슴에 꽂혔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사람이 교직을 그만 두고 싶다고 했다. 본래 교직에 별로 보람을 느끼지 못한 터였고, 그때는 결혼하면 여자는 집안 살림을 맡는 전업주부로 사는 게 당연한 걸로 통하던 때였다. 나는 속으로 좀 더 현직에 있어주기를 바랬지만, 남편으로서 체면도 있고 해서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집사람은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결혼하면서 내가 은사님에게 빌린 돈부터 갚아주어 고마웠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게 실감났다. 그리고 집사람은 그때부터 내 월급봉투를 챙겨 체계적으로 살림을 꾸려가기 시작 했다.
신혼살림은 초라했지만, 결혼초기는 상호의존적이고 새롭게 일구어가는 삶이었다. 내가 야간부 강의를 할 때는 마칠 때쯤 집사람이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내가 집에서 시험성적 처리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점수 후하게 주라고 일러주었다. 그럼에도 젊을 때는 학생들에게 학점을 짜게 준다는 소리를 들었다. 결혼하고 꼭 11개월이 되자 첫아들 태균(泰均)이가 3월 12일 태어났다. 3월 중순인데도 눈발이 휘날리는 날 어머니가 미역을 사들고 동대구역으로 오셨다. 그날 어머니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결혼하고 2년 쯤 지나서 신천동 13평 아파트에 내 집이라는 걸 처음 마련해 입주했다. 결혼하면서 먼저 정서적 안정을 얻었고, 그 후에 차츰 경제적 안정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항산(恒産) 연후에 항심(恒心)이 가능하다는 맹자의 말이 실감났다. 20대 초중반까지 내가 겪었던 정서적․경제적 고난이 결혼 후에는 순풍에 돛단 듯 안정되어 갔다. 1975년에는 내가 처음으로 외부(산학연구재단) 연구비를 받아 이래저래 도움이 되었다. 그때는 연구보고서만 제출하면 모든 책임이 끝나고, 연구비 정산에 따른 번거로움이 없었다.
집사람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그나마 그때 받은 연구비가 도움이 되었단다. 1976년 2월 19일에는 나의 사랑하는 딸 태영(泰怜)이가 태어났다. 태영이는 어릴 때부터 내가 귀여워했고, 자라면서 그도 나를 좋아했다. 지금도 나는 태영이가 다녀가면 맘 한 구석 좀 허전하다. 태영이는 학부에서 유아교육을 공부하고, 박사과정은 미국서 유아특수교육을 전공했다. 박사학위취득 후에 곧장 호남대학 유아교육과 교수로 자리 잡아 일하고 있다. 나랑 전공이 비슷해 지금도 서로 이래저래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다.
우리의 신접살림은 초라했지만, 결혼 이후 하나씩 일구어가는 재미로 살았다. 그때는 매년마다 월급이 올랐다. 고도성장과 더불어 지방대학 육성책이 대학발전에 큰 동력이 되었던 게다. 당시 이태영 학장은 기본적으로 국립대학 수준으로 교수급여를 맞추겠다고 했고, 그 후에는 영남대학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당신이 총장 할 때 이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지는 못했으나, 결국 총장 직선제 도입이후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1981년 종합대학 승격이후 대구대의 발전은 괄목 할만 했다.
1977년 조교수 시절에 나는 처음으로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형설출판사)라는 책을 냈다. 당시 특수교육 분야 전문서적 출판이 절실한 터여서 내 나름 서둘러 첫 저서를 낸 게다. 우리나라에서 특수교육 분야 첫 저술은 이태영 학장의 『특수교육개론』(1963)이다. 그 후 이태영 외 공저로『특수교육원리』(1972)가 나오고, 김정권 외 편역으로 『특수교육학』(1975)이 나왔다.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는 내가 갤러뎃(Gallaudet) 대학 객원연구교수로 다녀온 후 1983년에 개정 증보판을 냈다. 이 책은 5쇄나 발행되어 후학들에게 두루 읽혔다. 나의 첫 저서에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