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기후생태 위기와 개벽세

평촌0505 2024. 4. 1. 08:40

우리에게 기후․생태 위기는 죽고 사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럼에도 과학기술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네 삶은 좀체 달라지지 않는다. 기술과 돈이 종교가 된 시대다. 기후변화가 절박한 위기임에도 당장에 나의 안락한 생활을 위협하는 게 아니어서 그냥 태평스럽다. 뜨거워지는 솥 안의 개구리처럼. 기후위기에 대한 정보와 보고서는 차고 넘친다. IPCC 총회에서는 <지구 온난화 특별보고서>(2018)에서 지구평균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2010년 대비 45% 탄소 감축을 주문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IPCC에서 지구온도 상승 폭을 1.5도로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즉 ‘급변점’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라면 2030년 이후에 직면하게 될 1.5도 상승부터는 위기의 가속화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이 될 터이다. 기후변화 관련 티핑 요소 중 일부는 이미 티핑 포인트에 한 발 딛고 있다. 게다가 티핑 요소 시스템 간의 상호작용, 즉 ‘티핑 연쇄발생’(tipping cascade)은 지구 시스템을 열실(hothouse) 경로로 밀어낸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택은 그나마 기후위기를 완화하는 연착륙이냐, 아니면 그냥 경착륙을 감수할 수밖에 없느냐다. 내가 보기에는 재앙의 강도 조절이 남은 과제다. 20세기에 인간이 지구에 가한 충격은 선형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하키 스틱처럼 1950년대 이후 급격하다.

 

20세기 초에 전 세계 농경지 면적은 약 800만 제곱킬로미터였다. 하지만 20세기 말에는 그 면적이 1500만 평방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인간이 지난 1만년 동안 농경지로 일군 면적만큼의 땅이 단 100년 사이에 추가된 게다. 그만큼 생물다양성 핵심지역에서 대규모 벌채가 진행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수많은 종이 사라진 게다. 1900년에 누적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약 450억 톤이었으나, 2000년에는 1조 톤으로 껑충 뛰었고, 지금은 무려 1조 9000억 톤으로 치솟았다. ‘거대한 가속’은 현실이 되었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보면, 생태계 파괴는 곧 공멸을 의미한다. 생태계 내에는 식물-초식동물-육식동물에 이르는 먹이사슬로 얽혀 공존한다. 예를 들면 숲을 호령하는 200킬로그램의 호랑이 한 마리가 생존하려면 그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은 적어도 2톤 이상 존재해야 하며, 그런 초식동물이 생존하기 위해선 그들의 먹이가 되는 식물이 20톤 이상 존재해야 한다. 이처럼 먹이사슬 최상위에 존재하는 동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식물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 대목에서 숲이 주는 생태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생태계의 가치를 따진 연구에 따르면 1995년 기준으로 지구 전체 생태계가 매년 만들어 내는 경제적 가치는 33조 달러로, 인간의 경제활동으로 만들어 낸 그해의 GDP 총량인 25조 달러보다 많았다. 그 후 2011년에 다시 생태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경제적 가치를 알아본 결과 125조 달러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생태계의 가치가 새로 발견된 것을 의미한다(강호정, 2023).

 

지금 지구는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가고 있다. 이런 위기상황은 단 하나의 생물종, 지구의 막내둥이 격인 바로 인간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그래서 안정된 홀로세(Holocene)는 지났고 지금은 인류세(Enthropocene)라는 게다. 마침내 ‘인류세’의 도래는 지구 생태적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기후위기는 과학적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지만, 그 위기대응은 인문학적이자 사회적인 과제다. 인문학적인 성찰 없이는 능동적인 기후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게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사회적 심리는 크게 세 갈레로 나뉜다. 내 문제가 아니라는 기피적 심리, 내가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방관심리, 그리고 이미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포기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게다가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하는 동안 기후위기 문제는 계속 후순위로 밀린다. 먹고사는 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절박한가?

 

기후위기는 다원적이고 복합적이다. 따라서 그 대응책도 다원적이고 복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응책이 성공하려면 다수의 사회구성원이 공감하고 함께 참여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는 『2050 거주불능 지구』(2020)에서 기후문제는 한 가지 이야기, 한 가지 관점, 한 가지 비유, 한 가지 감정만을 적용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랬다. 그는 오늘의 기후위기가 온 세계 인류가 한 사람으로써 행동하도록 촉구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는 이렇게 책을 마무리 한다. “당신은 당신이 보고 싶은 모습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살고 싶은 행성은 선택할 수 없다. 우리 중 누구도 지구 외에는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서바이벌 맨>을 제작한 레스 스트라우드는 위기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네 가지 요소를 말한다. 지식, 적절한 도구(장비), 의지력, 행운이다. 이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다. 지식과 장비가 없더라도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네 요소를 각각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지금 우리는 기후위기에 대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가 뭔지도 알고, 문제해결을 위해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적절한 도구와 장비도 이미 풍족하게 가지고 있을뿐더러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 가정에서, 마을과 도시에서 우리의 생활방식을 어떻게 바꾸어야할지 노하우도 가지고 있다.

 

목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문제해결의 ‘의지력’이다. 의지력은 믿음 혹은 긍정적 희망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믿음과 희망이 내면화 되는 만큼 실천적 행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절망하는 동안 의지력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인문학적 결단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중용>은 ‘성’(誠)의 철학이다. 이미 성실해 있는 것은 하늘의 도이지만(誠者, 天之道也), 성실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誠之者, 人之道也)라 했다.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 행운이 따른다. 지식, 장비, 의지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운이 따라야 한다.

 

우리가 좋은 날씨를 만나는 건 행운이다. 이것 말고 또 어떤 게 행운일까? 하지만 행운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손으로 행운을 빚어보자. 나이 들수록 좋은 날씨를 만나는 건 행운이자 지복(至福)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진정한(희망적) 인류세로의 전환을 위해 ‘개벽세’를 제기한다. 인류세를 구원하는 대전환으로 ‘개벽세’를 말한다. 영어로 ‘개벽’은 ‘Great/Cosmic open'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다시 개벽’을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동학을 비롯한 천도교, 원불교를 총칭해 ‘개벽종교’라하고, 이들 종교의 공통된 사상적 기반을 ‘개벽사상’이라한다. 백낙청 교수 등은 작년에 개벽사상을 공부한 세편의 좌담(동학․천도교편, 원불교편, 기독교편)을 엮어 『개벽사상과 종교공부』(2024)라는 책을 냈다. 책의 부제로 ‘K사상의 세계화를 위해’라 표기했다. 이런 개벽사상을 기반으로 나는 진정한 인류세로 ‘개벽세’를 제기한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대전환으로서의 ‘개벽세’(great/cosmic-opencene)를 여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불교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떠올린다. 기후위기를 하나의 큰 위기로 깨쳤다면, 그 깨침이 현실을 지어내도록 꾸준히 닦아(漸修) 실천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권희중과 신승철이 『기후전환 사회』(2022)에서 말한 ‘정보에서 정동(情動; affect)으로’에 주목한다. 책에서 ‘정동’은 움직이는 마음으로 돌봄, 모심, 살림, 보살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저자는 기후위기의 문제를 삶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동’으로서 움직이는 마음이 필요하다 했다.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후위기 상황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겠다는 식의 구경꾼 의식도 문제지만, 기후위기를 개인들의 책임으로 바꾸어 죄책감을 들게 하는 각종 기후환경교육도 문제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민행동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상황을 정동의 차원에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우리 삶의 위기로, 생명의 위기로, 소수자와 약자의 위기로 체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에 대한 정보과학적 접근이라기보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사회학적인 통찰을 통한 정동으로서 기후위기에 접근하는 태도이다(52-53쪽).

 

우리에게 기후위기는 마음의 위기다. ‘정동’으로 움직이는 마음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에너지원이다. 책에는 마음의 생태계를 넓이의 마음, 높이의 마음, 깊이의 마음으로 말한다. 여기서 마음의 넓이, 높이, 깊이를 동양철학과 개벽사상에 연관해 해석해 보고자 한다.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에 그 넓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부단히 생멸하는 마음을 해월 최시형 선생이 말한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삼경(三敬)으로 가지런히 일원화(一圓化)하는 게 긴요하다. 마음의 높이는 동양철학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로 극명히 제기되어 있다. 해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 마음의 깊이에서 나는 마음의 본래자리인 본성(즉, 本然之性)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심층마음의 자리는 곧 ‘본성회복’과 다르지 않다.

 

조동일 교수는 『대등의 길』(2024)에서 만물(萬物)대등-만생(萬生)대등-만인(萬人)대등의 대등론을 말했다. 이것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의 대등한 화합에 다름 아니다. 사람이 하늘이고 땅에서 나는 밥이 하늘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인류세로서 ‘개벽세’는 곧 ‘천지인’ 삼합의 길이다.

 

나는 참 인류세로 ‘개벽세’를 열기 위해 원불교 2대 종사 송규 선생이 제기한 ‘삼동윤리’(三同倫理)를 떠올리게 된다. ‘삼동윤리’는 원불교의 일원(一圓)사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 (1) 동원도리(同源道理)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그 근본은 하나의 근원이라는 도리를 알자는 것이다. (2) 동기연계(同氣連契)는 모든 생명과 인류가 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치자는 것이다. (3) 동척사업(同拓事業)은 모든 사업과 주장이 다 같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힘이 되도록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게다. 여기 ‘동척’은 중정(中正)의 정신, 중화(中和)의 원리와 통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정배 교수는 백낙천 교수와 ‘개벽사상’ 대담(2023)에서 “인류의 동척(同拓)사업을 위해 불교의 연기(緣起), 원불교의 사은(四恩), 동학의 이천식천(以天食天)사상으로 함께 인류를 구하는 길에 나서자”고 했다. 지금 인류는 공멸이냐 공존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내가 보기에 참된 인류세로서 ‘개벽세’는 생태․영성적(eco-spiritual) 삶으로의 큰 전환일 터이다. 해서 친자연적이자 영적인 휴머니즘을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