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혜(戒定慧) 삼학의 균형
불교에서는 삶 자체가 고생(苦)이랬다. 왜 그런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는 가운데 싫으면 화내고, 제 정신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이 뒤섞여 지배하기 때문이란다. 이른바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번뇌 때문이라는 게다. 붓다는 그의 첫 제자들에게 ‘가르침의 바퀴를 처음 돌림’(初轉法輪)에서 고귀한 네 진리의 첫 번째로 고생이라는 고귀한 진리(苦諦), 두 번째로 고생의 근원이라는 고귀한 진리(集諦), 세 번째로 고생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滅諦), 네 번째로 고생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고귀한 진리(道諦; 八正道)를 말했다.
강성용 교수는 ‘종교문해력’ 총서 2 『인생의 괴로움과 깨달음』(2024)에서 네 갈레 고귀한 진리의 첫 번째 진리인 고생은 ‘온전히 파악되어야’ 하고, 두 번째 진리인 고생의 근원은 ‘버려져야’하고, 세 번째 진리인 고생의 소멸은 ‘구현되어야’하고, 네 번째 진리인 고생의 소멸로 이끄는 길은 ‘실행되어야’한다고 했다. 고생이 뭔지 온전히 파악하려면, 그 근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 그것을 버려야 하고, 그 버림을 온전히 알아 실천하는 데는 8단계(갈레)의 길(방편)이 있다는 게다.
붓다는 이 고귀한 네 진리 각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실제로 그 내용을 이행해서 스스로 성취했으며, 이 과정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까지 체험했단다. 즉 삶의 괴로움을 깨쳐 스스로 해탈하는 경지를 체험했다는 게다. 해서 붓다는 깨친 자라는 게다.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붓다가 진단한 인간의 삶이 고생인 이유는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이 있고, 이것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 삶이 고생인 이유 세 가지(즉, 탐진치의 삼독)를 장작 삼아 유지되는 불의 비유를 통해 붓다가 제시하는 해답은 명확하다. 불을 끄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짓들을 추가로 보태어 불을 키워가지 말라는 것이다. 불과 같은 인간의 삶이 가지는 구조적인 한계를 이해하고, 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구체적인 별도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해하면서, 그저 간단하게 불을 끄기 위해서는 불에 장작을 집어넣는 일을 그쳐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대답이다(338쪽).
우리가 ‘지금 여기서’ 붓다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2500 여년 이전에 붓다의 고민과 해답이 가진 혁신적인 전환의 힘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는 각자가 감당하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저자는 “우리 네 삶을 규정하는 별도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면서, 그저 간단하게 불을 끄기 위해서는 불에 장작을 집어넣는 일을 그쳐야” 한다는 게 붓다의 대답이랬다.
장작의 불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기 마련이다. 문제는 더 이상 불에 장작을 집어넣는 일을 그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삶에서 ‘탐진치’의 삼독으로부터 ‘계정혜’ 삼학으로의 혁신적 전환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내가 보기에 우리네 삶에서 담박에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불에 장작을 더 집어넣는 일을 그침으로써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긴요하다. 해서 ‘탐진치’의 삼독을 ‘계정혜’의 삼학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네 삶에서 ‘깨침의 과정’이다. 우리에게 삶의 과정에서 ‘탐진치’를 줄이는 일은 곧 ‘계정혜’를 늘려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승기신론>에는 ‘계정혜’로 들어가는 진여문과 ‘탐진치’에 끌려 부단히 생멸하는 마음(생멸심)의 문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이문 불상리(二門 不相離)랬다. 즉, 이 두 개의 문은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문으로 서로 맞붙어 있다는 게다. 그래서 불이문(不二門)이다. 우리는 ‘탐진치’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해탈의 삶을 완벽히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소간에 ‘계정혜’의 삶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그러한(眞如) 마음자리를 본래 내장하고 있다.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사상이다.
기신론에는 마음의 두 방향으로 ‘훈습’(薰習)을 말한다. 「‘훈습’이라는 것은 비유컨대 사람의 옷이 그 자체로는 냄새가 없지만 사람이 어떤 냄새를 오랫동안 배게 하면 그 냄새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의 마음에도 진여, 그것이 나타내는 ‘깨끗한 마음’(眞如淨法)은 원래 물든 것이 아니지만, 무명(無明)이 오랫동안 지속적인 영향을 주면 ‘물든 양상’(染相)을 띠게 된다. 무명, 그것이 나타내는 ‘물든 마음’(無明染法)은 원래 깨끗한 것이 아니지만, 진여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면 ‘깨끗한 기능’(淨用)을 나타내게 된다.」
이처럼 우리네 삶은 내 마음을 진여로 돌아가는 훈습이 배이게 하는가, 아니면 생멸하는 상념으로 훈습을 배이게 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라진다. 해서 습관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 우리에게 ‘진여로 돌아가는 훈습’의 시발점은 또한 ‘상념으로 흐르는 훈습’이 돌아가야 할 종착점이기도 하다. 해서 상념을 떠난다는 것은 곧 진여로 돌아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신론은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멀리하고 열반을 희구하도록 하며, 자신의 마음속에 진여가 내재한다는 불퇴전의 믿음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도록” 격려한다.
스스로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길은 멀리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이 들면서 우리가 ‘탐진치’의 불을 끄는 일에 정진하면서 ‘계정혜’의 삶으로 몰입하는 과정에 참된 행복이 내재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계정혜’의 진전(상승)과 더불어 윤리적 실천, 지성적 공부, 영성적 깨침에 이르기까지 삼학(三學)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면 금상첨화다. 이른바 지복(至福)의 삶이다. 노년에 내 삶에서 ‘계정혜’ 삼학의 조화와 균형을 필생의 숙제로 삼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