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의 공격
일전에 아파트 앞 골목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까마귀의 공격을 받았다. 집사람이 먼저 지나가다가 갑자기 까마귀의 공격을 받고, 내게 까마귀 조심하라는 전화를 해서 내가 폰을 받는 동안 뒤통수를 두 번이나 공격당한 게다. 참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일이다. 평생 조류공격을 받은 건 처음이다. 어떤 사람은 까마귀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기도 했단다. 일본에서는 어린아이가 까마귀 공격을 받아 실명하는 일까지도 있었다나.
황망히 집에 와서 아파트 관리소에 까마귀 공격 소동을 알아봤더니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까마귀 산란기가 3-6월인데, 우리 아파트 앞 큰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은 게다. 새끼를 돌보면서 나름 위협을 느껴 어미 까마귀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가끔 공격적인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공격 받은 주민들의 민원을 받고 까마귀 새끼를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더니, 까마귀의 공격성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게다. 새끼를 잃은 어미 까마귀의 본능적 반응인 게다. 전후 사정을 듣고 보니 납득이 가긴했으나, 뭔가 찜찜했다.
모든 생존공간은 생태적으로 얽혀 있다. 아파트 단지 내에도 나무가 있는 곳에는 새들이 집 짖고 사는 게 당연하다. 조동일 교수는 만물, 만생, 만인의 ‘대등’론을 말했다. 모두가 대등하게 공존하는 게 천지화육(天地化育)의 길이다. 지금은 인간의 힘이 너무 비대해져 지구생태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인류세’(Anthropocene)를 초래하고 말았다. 나는 까마귀의 공격을 받고 직접 ‘인류세’의 과보(업보)를 받은 셈이다. 까마귀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 원천적인 이유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난 지금은 어미․아비 까마귀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일단 그들의 공격성이 우리 아파트에서 물리적으로는 사라졌다. 하지만 생명과 자기 생령이 있는 까마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마도 저희들끼리 더 무서운 공격성을 벼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우리 아파트의 까마귀 공격 소동 처리가 별로 온당하지 못했다. 119에 연락해서 새끼와 더불어 어미가 다른 곳에서 둥지를 마련해 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실제로 성공 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그런 노력과 공덕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고래로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능력과 죽음이나 질병을 암시하는 불길함을 상징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우리의 정서에 자리한 조류다. 기후생태 위기를 맞아 내가 당한 까마귀 공격사태는 아무래도 불길한 조짐으로 느껴진다. 이런저런 모습으로 미래의 기후생태 위기가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게 아닌가 싶다. 기후생태 위기는 곧 인류의 실존적 위기로 이미 도래했다. 까마귀의 공격성이 내게 주는 엄중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