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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에 인간의 존재: 인류세 인문학 담론

평촌0505 2025. 2. 16. 20:18

12,000년 동안 이어져 온 홀로세는 막을 내리고 인류세(anthropocene)가 도래했다. 인류세는 인간의 힘이 비대해져 지구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킨 시대다. 인류세는 길게는 산업혁명 이후부터 짧게는 20세기 중반 이후 도래한 대격변의 시대를 지칭한다. 나는 홀로세의 마지막 세대이자 인류세의 첫 세대다.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게다. 최근 인도 출신의 역사학자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 Chakrabarty)<인류세 시대에 인간의 조건>을 번역한 인류세에 대해 인문학이 답하다(조성환, 이우진 옮김, 2024)를 접했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기후생태 위기의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온 터여서 단박에 이 책을 읽었다. 우리에게 기후생태 위기는 지구적(세계적)이면서 행성적(global-planetary) 문제다. 인류세에 인간 존재의 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 자연사 속의 지구 역사와 지구 역사 속의 인류사를 아우르는 긴 역사적 안목이 요청된다. 인류세에 기후환경 위기를 문제 삼을 때 필연적으로 우리는 서구 중심의 근대와 근대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른바 근대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지 않을 수 없다. 인류세는 근대라는 시대 인식을 새롭게 반추하게 한다.

 

근대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합작이다. 근대는 산업혁명-자본주의-국민국가-합리주의-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발전된 시대정신의 총칭이다. 하지만 인류세의 개념에는 근대의 발전이 인위적으로 기후변화를 유발한 데에 주목한다. ‘자연’(自然)은 인간과 무관하게 스스로 그러한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세계다. 하지만 근대의 과학기술은 인간이 자연법칙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기후생태 위기를 겪고 있다. 오늘의 기후변화는 인위적 힘이 자연의 질서에 균열을 초래한 탓이다. 인류세는 인간의 비대해진 힘이 지질학적 차원의 변화를 초래했다.

 

차크라바르티는 기후변화를 당대의 시대 의식’((epochal consciousness)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일종의 문명 위기의식이다. 이런 시대 의식의 차원에서 인간에 의한 글로브(globe),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의 얇은 층을 넘어서는 행성(planet)의 개념에 주목한다. ‘행성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깊은 지구’(deep Earth)의 차원이다. 지구 행성은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깊은 시공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는 기후변화는 행성의 측면과 글로브의 측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긴 사건이랬다.

 

인류세의 인문학은 지구 행성의 오랜 역사에 입각한 깊은 인문학이다. 인류세에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을 인간중심에서 지구 행성 중심으로 확대해야 한다. 인간이 주인공이고 행성이 배경이 된 근대적 인간과 자연관으로는 인류세에 대응하는 시대 의식을 정립할 수 없다. 인류세는 인간 중심의 인문학을 행성 중심의 인문학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인류세 인문학을 깊은 인문학’(deep humanities)으로 지칭했다.

 

우리는 시대 의식으로서 기후생태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기후변화는 과학적으로 합리적 진단을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복합적(과학기술-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얽힌 난제다. 지구적으로 기후변화는 공통적이지만 차별화된 책임이 따르는 난제다. 기후생태 위기는 지구 행성이 인류세에 감내해야 할 실존적 곤경이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이지만, ‘곤경은 피할 수 없는 난관이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기후생태 위기를 가능하면 완화하는 연착륙과 될 대로 그냥 밀고 가는 경착륙의 차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고 심각하다.

 

이런 관점에서 차크라바르티가 제기한 시대 의식은 인간이 집단적이자 주권적 행위자(agent)로서 자신을 세상에 투영하는 사고능력과 연관된다. 그에게 시대 의식은 사고 형식일 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장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 형식은 시대 의식을 표출하는 글쓰기를 통해 가장 잘 표현되기 때문이다. 내게 기후생태 위기의 인문학은 결국 글 쓰고 말하는 삶의 형식이다. 야스퍼스는 시대 의식의 주요한 특징으로 해결 불가능이라는 긴장 속에서 견디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체력을 수반하는 것이랬다. 여기서 체력은 긴장 속의 여유(포용성)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해서 시대 의식은 시대적 위기에 대한 해결 제시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윤리적과제다. 시대를 보는 관점의 선택은 당대를 사는 자신의 역사철학적 입장의 반영이다. 해서 시대 의식은 우리가 공통적인 과제를 구성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사고 실험이다. 인류세의 역사철학은 인간 중심적(homocentric) 세계관에서 생명 중심적(zoecentric) 세계관으로의 확장된 전향을 강조한다.

근대 인간 중심의 역사는 유럽식 확장의 역사이자 극심한 불평등을 수반하는 글로벌 자본의 역사이고 기술 혁신의 역사다. 기후변화에 대한 행성적 사고의 진전은 지질학적 지식, 지구 행성에서 생명의 역사, 생산과 소비의 세계화를 초래한 자본주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인식체계다.

 

인위적 힘으로 야기된 기후변화는 과학적 인과적 사실 이상의 차원에서 인간 존재와 윤리, 삶의 고통과 애착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인과적 차원 이상의 도덕적 윤리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기후 위기는 곧 정의 문제이자 정치적 과제가 된다. 오늘의 기후생태 위기는 인류에게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없게 한다.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는 깊은(deep) 역사, 깊은 지질학적 시간에 빠졌다. 우리가 이 깊은역사로 빠지는 것은 모종의 인식적 충격을 동반하는 것이랬다. 깊고 거대한 역사에 빠짐(fall into)은 시대 의식에 들어 있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생명 중심적 세계관 사이의 긴장과 연관된다. 인류세에서 우리는 긴장과 피로 속에서 살 수밖에 없으나 그것을 해소할 수는 없다. 인류세의 시대 의식은 지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절박한 고민이다.

 

인류세의 인문학은 인간이 기후변화를 촉발한 중심이기에 자연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분리하는 오랜 인문학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인간이 지질학적 힘으로 존재하는 인류세에서 지구화에 따른 종래의 인간 중심적 역사관은 엄정한 수정을 요한다. 따라서 인류세의 인문학에서는 전 지구적 행성의 역사와 인간종의 역사 간에 긴밀한 소통을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장회익 교수는 낱생명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온생명으로서의 우주적(행성적)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혁명이자 우주적 사건이다. 인류세에 인문학의 존재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