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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전설: 밤 산의 추억과 여운

평촌0505 2012. 10. 15. 21:43

  어쩌다 성주 수륜 밤 산과 인연을 맺은 게 정확히 올해로 25년이나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년하기 전 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순전히 집사람 아이디어로 얻은 밤 산이어서 주인도 집사람 이름으로 했다. 집사람이 한창 그 곳에 애정을 가지고 일하러 다닐 때는 ‘밤 산 아줌마’로 그냥 통한 적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집사람 일하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원래 집사람은 대구 토박이어서 자라면서 농사일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내가 봐도 신기한 일이다. 이 일로 나는 책을 읽지 않고도 공산주의가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 것에 대한 애착과 노동 생산력은 놀라운 괴력을 발휘한다는 걸 말이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사일은 어중이떠중이다. 나는 밤 산일을 그냥 소일꺼리 정도로 생각했지만, 집사람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뭘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집사람의 완벽성이 밤 산일에도 적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러니 나는 주말에 밤 산 갈 때는 산책 가는 정도로 기분이 가벼운 편이지만, 막상 산에 가서 일을 시작하면 금방 피곤하고 지루해서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챈다. 근데 옆에서 집사람이 일하는 걸보면 내가 봐도 가당찮다. 땅이 간지럼 타겠다고 놀려주지만, 내가 보기에도 민망하다. 그 걸 일이라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 민망함을 달래기 위해 집사람 보담은 한 수 위인 내가 함께 일을 하다 보니 그럭저럭 나도 모르게 산에서 일하는 일솜씨가 제법 늘어났다.

 

  한 번은 건강검진 결과 콜레스톨 수치가 엄청 올라가 있어 놀랐다. 평소에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 것이나 잘 먹지만 외식을 자주하면서 주로 육류를 즐겨 먹은 편이다. 그런데 밤 산에 가서 땀 흘려 일하는 게 어느 정도 몸에 베이니까 자연히 콜레스톨 수치도 하향 조정되었다. 원래는 의사가 약을 먹어야 한다는데 나는 약을 먹지 않고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건강검진 결과 무슨 수치가 좀 올라가도 별로 신경 써질 않는다. 사실 나이 들면 모든 수치가 올라가는 게 당연하다. 내가 밤 산에서 가장 힘들여 집중적으로 도맡아서 하는 일은 8월 중순경부터 밤 산 전체 풀과 작은 나무들을 베어 내는 일이다. 그래야 밤이 떨어지면 집사람이 일하기가 쉽다. 숲이 우거져 있으면 뱀이나 벌집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 근데 풀 베는 예초기를 메고 평지도 아닌 산비탈에서 작업을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사람이 서둘러 당부하기도 하고 또 은근히 강요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차피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되어 버렸다. 그 덕분에 나는 산소벌초 대행 전문가를 능가하는 정도로 예초기를 다룰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신통하고 놀랍다. 산에서 땀 흘려 일하고, 옹달샘에서 시원한 물을 덮어 쓰면 한없이 상쾌하다. 천국이 따로 없다. 산 속에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타잔처럼 자유롭다. 그리고는 시원한 막걸리를 단숨에 한 사발 마시면 당장에 허기도 면하고 몸과 맘이 공중에 떠다니는 듯하다. 사실 당시에 우리 학과 교수들은 물론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내가 산에서 그런 중노동을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게다. 그저 8월 중순이면 계절제 대학원 강의 끝내고 어디에 가서 편안히 피서나 하고 있는 줄로 여기는 게 고작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내 체력과 건강이 상당히 좋아진 게 틀림없었다. 그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8월 말경부터 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집사람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밤 줍는 일’에 들어간다.

 

  근데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일한 게 아니다. 밤 산을 사고 처음 2년 동안은 동네 사람에게 밤농사를 맡겼다. 맡은 사람은 별로 수익성이 신통찮아 그만 두고 싶어 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불편했다. 그래서 부득불 우리가 맡아 할 수밖에 없던 터에 집사람 친구 중에 농사일에 밝은 사람이 있어 밤 산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집사람과 일 잘하는 친구 두 사람, 모두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서부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고령을 거쳐 수륜 밤 산까지 가서 밤 줍는 일을 했다. 저녁때는 집에 와서 가족들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 하니 오후 3시 반 버스를 놓치지 말아야 했단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 올 때는 미친 듯이 뛰어 오다가 마을 앞에 와서는 차마 뛰질 못하고 조신하게 걸어 왔단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밤 산에 다니는 걸 보기가 안타까워 내가 집사람에게 차를 몰고 다니도록 권유했다.

 

  그러고 2년쯤 지나서 내가 몰던 헌차를 집사람에게 주고 나는 새 차를 따로 구입했다. 밤 산 덕분에 집에 차가 두 대나 되었다. 그 무렵 아들은 고등학교, 딸은 중학교 다닐 적이어서 집사람은 아침에 아이들 도시락을 두 개씩(모두 네 개) 싸주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집 사람은 밤 산에 일하러 다니는 괴력을 발휘했다. 약 한 달 반 정도는 이런 식으로 우리 집은 밤 산 일로 초비상 사태였다. 그 때는 밤 산 농막에 전기가 없어 저녁에는 촛불을 켜 놓고 그 날 주워 놓은 밤 고르기 작업을 했다. 어쩌다 달 밝은 밤이면 밤송이를 모아놓고 달빛 아래서 밤 까는 일을 둘이서 했다. 처량하다 해야 할지 보기에 좋다고 해야 할지 나도 헷갈린다.

 

  지금 생각하니 아득한 옛이야기 같다. 그래도 우리 내외는 고된 줄 모르고 일했다. 밤 산에서 달빛 아래 일한 것은 평생 두고 잊지 못할 첫사랑의 추억처럼 아련하다. 9월에도 저녁이면 밤 산에 기온이 뚝 떨어져 부엌에 군불을 지펴야 했다. 지천에 나무가 깔려 있으니 군불 넣기는 아주 쉬웠다. 부엌에 군불을 지피면 온 산에 연기가 퍼지면서 방안에까지 군불 연기가 자욱했다. 온기와 더불어 나무 타는 연기 냄새는 옛날 어릴 적에 고향 부엌에서 맡은 냄새와 어쩌면 그리도 꼭 같을까. 마치 1950년대 시골로 되돌아간 삶을 판 박은 듯했다. 이런 게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20세기를 마감하는 해에 밤 산에 기존의 농막이 허물어져 새로 조립식 농막을 지어야 했다. 전기도 없고 차도 올라오지 못하는 골짜기에 막상 집을 지으려고 일을 벌려 놓으니 예사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간에 업자가 부도가 나서 하던 일을 중단하는 바람에 그 조립식 농막은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천년을 넘기고 겨우 마무리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집짓고 사는 사람이 하늘처럼 위대하게 보였다. 천년을 넘긴 조립식 농막에 대해 지금도 집사람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바깥주인으로서 나의 무능함이 집짓는 일로 인해 무참히 폭로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공사 마무리 단계에서 집사람과 나는 대판으로 싸웠다. 그 일로 집사람은 속으로 아직 앙금이 남아 있을 테고, 나는 평생 무능한 남편으로 낙인 되고 말았다. 이처럼 수륜 밤 산은 우리 내외의 삶에 애증(愛憎)이 얽혀 있는 ‘역사 현장’이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 2006년부터 집사람은 할머니가 되어 손녀 지현(志炫)이를 맡아 키우게 되었다. 그 때부터 집사람은 손녀 키우고 돌보는 일에 온갖 정성을 들여 밤 산보다는 사람(후손) 키우는 게 훨씬 중하다는 기준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나도 손녀를 엄청 귀여워하지만, 이제 손녀는 집사람의 분신(分身)이 되었다. 이러고 살다가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마누라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이래로 누가 집사람보고 요즘 밤 산일은 어찌하느냐고 물으면, 밤농사보담 손녀 농사가 소중하다면서 밤 산에 발을 딱 끊고 산다. 한 번 포기하면 칼로 무 자르듯 하는 사람과 내가 평생을 살아왔으니 나도 어찌 보면 끈기 있는 사람인가 싶다.

 

  이제 손녀도 웬만큼 자랐고 나도 40년 교수노릇 마감하고 정년하고 보니 밤 산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요즘은 내가 밤 산에 가자고 몇 번 졸라야 집사람이 겨우 미동하는 식이다. 지금도 집사람은 산에 가면 일을 좀 해야겠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전처럼 일하기에는 집사람이나 나나 어느덧 늙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저 산에 가서 편안히 쉬면서 삼림욕(森林浴)이나 즐기고 싶다. 근데 집사람은 아직도 밤 산에 가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끊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다. 지난 추석 전에 모처럼 밤 산에 갔더니 태풍 상흔으로 길이 엉망으로 파헤쳐져 지형이 달라보였다. 이제는 전처럼 포크레인 작업 할 엄두도 못 낸다. 밤 산이 남긴 여운을 내 여생에서 어찌 받아들이게 될지 살아가면서 두고 볼 일이다. 산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겠지만 살아 있는 우리네 맘이 문제라면 문제다. 김병하(201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