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에서 보편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통합교육
나는 오랜 세월 특수교사를 기르는 일에 종사했다. 정년하고 10년 이상이나 훌쩍 지났건만 <교육공동체벗> 편집자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다. 숙의 끝에 약 20년 전에 발표한 글을 다시 보완해서 게재하는 쪽으로 합의했다. 함께 참여한 집필자는 현장 교사, 그것도 특수교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게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제자도 있다.《특수에서 보편으로》(2025)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을 받고 보니, 윤상원(특수교사)이 대표 저자로 <머리말> 글을 쓴 게 보여 반가웠다.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능력주의(ableism)와 장애 차별주의(dis-ableism)는 암묵적으로 공생하며 강화되었다. 오늘날 통합교육의 위기는 특수를 넘어 보편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능력주의와 차별주의라는 거대한 장벽 때문은 아닐까?”라고 묻는다. 해서 이 책은 장애아동의 특수성을 개별 학생 안에 가두는 걸 넘어 인간 보편성의 측면에서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랬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구윤숙(초등 교사)은 사회를 바꾸는 장애학과 사회를 지키는 학교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이 기존의 학교에 건넨 ‘판도라의 상자’로서 통합교육을 말한다. 장애학에서는 장애인을 장애화 된 사람(disabled people)이라고 호칭함으로써, 장애는 장애인 당사자의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장애화된 결과’임에 주목한다. 장애인은 ‘장애’ 때문에 차별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는 게다.
기존의 학교에서 통합교육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아름다운 판도라처럼 좋아 보이긴 한데 덥석 받아들였다가 숨겨 두었던 온갖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기 때문이다. 본래 학교는 먼저 알아차리는 소극적 태도에 익숙한 프로메테우스적 산물이다. 하지만 통합교육을 위한 학교는 신이 보낸 선물을 덥석 받을 수 있는 에피메테우스적 용기가 필요하다. 저자는 “걱정과 핑계는 잠시 접어 두자. 일단 장애 정도에 상관없이 또래와 함께 공부하는 통합교육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들여다보자. 그 뒤에 닥치는 어려움은 뒤늦게라도 해법을 찾아보자. 학교에는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통합교육은 모든 아동을 대등하게 포용하는 적극적 과정이다.
윤상원은 손상과 발달에 대한 ‘자기이론’의 입장에서 ‘모든 개인의 특수성은 곧 보편적’이랬다. 그는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이어주는 ‘자기이론’ 형성에 주목한다. ‘자기이론’은 나를 중심으로 한 자전적 글쓰기를 통해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사회문화적·정치적 담론 속에서 보편적 의미로 전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이론’은 개인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학술적 담론으로 연관해 ‘나’라는 주체가 스스로 이론을 생성하고 구성하도록 이끈다.
자기이론적 글쓰기는 개인의 경험을 학문적 담론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그 경험이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되게 한다. 비고츠키는 “손상은 단지 결함이나 약점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는 능력의 발현, 적극적 강점의 원천”이랬다. 해서 인간 발달은 손상에 대한 지속적인 보완을 향한 노력의 결과랬다. 윤상원은 “손상이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과정이 서술될 때, 자기이론은 통합교육 현장에서 실천적 의미를 제공할 것”이랬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이론은 개인이 ‘되어 감’(becoming)을 학문적 글쓰기 속에서 실천하는 방식이다. 구체성을 잃어버린 이론이 아니라, 신체성과 경험을 기반으로 한 체화된 현실을 서술하는 것이다. 나아가 개인적 경험을 공공의 이야기로 확장하기 위해, 타인의 목소리인 이론과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개별적 특수성을 인간 보편성의 영역으로 확장한다(p.72).
손상과 발달에 관한 자기이론적 서술은 개인의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렇게 “인용은 기억 옆에 놓일 때, 개인의 삶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이 된다는 게다.
책에서 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만남으로 ‘특수교육의 정체성’을 논했다. 특수교육이 ‘교육다움’을 복원하기 위해 교육 본래의 보편성에 충실해야 하지만, 하나의 방편으로서 특수교육이 그 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특수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특수교육이 ‘특수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1) 상위이론의 폭넓은 수용, (2) 전인으로서 장애아동의 이해, (3) 일원화된 교육공동체 속의 특수교육을 논했다.
그럼에도 특수교육이 ‘특별(특수)해야 할 이유’로 (1) 교육 정의 구현, (2) 진정한 통합교육 구현, (3) 교육 이상의 지표(나침반)로서 특수교육을 각각 논의했다. 삼각형의 밑변(보편성)이 길어야 꼭짓점(특수성)이 안정되게 올라간다. 특수교육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은 단지 개념적 구분일 뿐이고, 교육 실천 과정에서는 상보적·상생적 관계로 만난다는 걸 강조했다.
이명훈(독립연구자)은 <‘불구’의 관점으로 교육을 재상상하기>에서 “장애인의 몸과 마음을 시계에 맞추는 대신, 시계를 장애인의 몸과 마음에 맞추고, 시간을 재지향(reorientation)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불구의 시간을 교육에 적용하는 것은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교육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랬다. 이런 불구 시간성에 관한 통찰을 토대로 학습자의 성장과 발달을 “타인을 향한 관계가 아닌 타인과 함께하는(with)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유동적이고 공동체적인 변화로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불구화한다는 것’은 장시간 고강도로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생산적인 몸/마음, 나와 후손들이 바라는 몸/마음을 떠올릴 때, 여기서 누락 되는 이들이 모두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상상하고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은 규범적인 정체성, 노동, 관계에서 빈번히 미끄러지는 이들을 위한 교육이다. 이들은 늘 망각과 삭제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고달픈 사람들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차별에서 평등을 넘어 상생하는 ‘대등’ 교육론을 떠올린다.
발달장애 당사자인 박경인과 김대범은 “친구들이랑 어떻게 어울려 지낼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지역사회에 나와서 살아 보니까 사람 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그런 걸 배우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래도 ‘피플 퍼스트’에서 활동하는 동안은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단다. 그들은 투쟁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싸움을 겪어야 어디서 꼬였고, 왜 싸움이 났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대범이는 다시 학교에 간다면 학생이 아니라 친구 같은 수위 아저씨가 되고 싶다고 했다.
장애 자녀를 둔 보호자로서 특수교육 활동을 돌아보며 정예현은 이렇게 반성한다. 반성 1: 개별화교육 지원회의에 보다 많은 이들의 참석을 요구하지 않은 것, 반성 2: 특수교육 대상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학부모 공개 수업을 요구하지 않은 것, 반성 3: 집 앞 학교에 특수학급을 설치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지 않은 것, 반성 4: 특수교육 대상자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교육 당국이 어련히 알아서 특수학급을 증설할 것이라고 믿은 것, 반성 5: 내 아이도 선생님 학생이라고, 통합학급 담임 선생께 각인시키지 않은 것 등이다. 한편 학교와 교육정책 당국은 이런 학부모의 반성을 듣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반성해보아야 할 게다.
공진하(특수교사, 작가)는 특수학교에서 일하는 특수교사의 딜레마를 ‘통합교육의 걸림돌과 디딤돌 사이에서’ 제기하고 있다. 그는 “장애를 이해하고 나와 다른 삶과 어울려 사는 일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배울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직접적인 교류와 관계가 소중하다는 게다. 특수학교는 단지 장애 정도가 심한 학생들을 안전하게 돌보는 곳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를 바란다. 그는 혹여 특수교사인 자신이 통합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아닌지 되돌아본다고 했다.
김헌용(중등 교사)은 우리 교육이 마주한 통합교육의 실패 사례를 경계의 공간에서 일어난 비극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특수학급’은 특수교육과 일반교육의 분절된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한 공간이랬다. 이곳은 통합교육의 부담과 모순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공간이다. 해서 특수학급은 통합교육의 거점이 되기보다는 일반 학교 안의 작은 특수학교로 굳어졌다고 비판한다.
인천 특수학급 담당 교사 사망 사건(2024.10.24)은 이 경계의 공간에서 압살당했던 거다. “통합교육의 모든 책임을 떠안은 채, 행정편의주의와 형식적 통합교육이 만들어 낸 구조적 모순” 때문이었는 게다. 그는 갈등과 대립을 넘어 하나로 보듬는 포용(inclusion) 교육의 세 가지 퍼즐로 학교문화와 조직의 변화, 보편적 학습 설계에 의한 교육과정 운영, 경쟁적 교육 제도의 쇄신을 말한다.
류경원(특수교사)은 장애 학생 ‘만’을 위한 통합교육을 넘어, 래디컬한 특수교육이 모두를 위한 통합교육의 성공을 이끈다고 했다. 그에게 특수교육은 장애아동 교육이 아니다. 특별한 교육적 요구를 지닌 모든 학생을 위한 지원 시스템의 총체다. 특수교육은 장소가 아니라, 다양한 지원체제라는 게다.
구윤숙(초등교사)은 자신의 통합 교실 분투기를 중심으로 “통합교육, 그것은 어설프게 찬란하고 서툴지만 아름다운 노력의 과정이랬다. 통합교육은 결코 고상하지 않다. 침을 닦아주고 감정이 폭주하는 아이를 달래고, 그런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설득하고, 항의하는 학부모와 대화하는 과정에 내재한다.
중등 교사이자 장애 자녀 어머니인 이수현은 처음에는 자녀의 ‘조기 치료’에만 집중했으나, 뒤늦게 장애는 치료가 되는 질병이 아님을 깨쳤단다. 그는 아이를 위해 대안학교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으나, 당사자인 아이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했다. 장애가 아무리 무거워도 부모가 아이의 삶을 디자인 할 수는 없었던 게다. 그는 자녀에게 통합교육 기회를 제공하면서, 학교는 함께 사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확인했단다.
김민진(특수교사)은 특수교육에서 ‘모두를 위한 교육’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교사들은 ”요즘 아이들은 너무 다 제각각이야“라고 불평이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획일적 교과 내용, 수업 방법과 평가에 익숙해 있다. 해서 우리 아이들이 더 이상 ‘다름’ 때문에 상처받지 않고, 각자의 ‘다름’을 존중받으며 성장하는 학교를 만들어 가는 데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최경미는 성미산학교의 통합교육을 돌아보면서 ‘급진적 교육’으로서 통합교육을 제안한다. 성미산학교에서 의미 있는 실험은 프로젝트 수업과 교사의 역할 통합이랬다. 내가 보기에 성미산학교에서 특수교육을 지원하는 통합교사를 따로 두지 않고 모든 교사가 통합교육을 지원하는 교사로 전환한 것은 주목할만한 실험이다. 그는 ”교육은 마음을 만드는 일“이랬다. 심성 함양으로서 교육은 없는 걸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있는 본래성(즉, 本然之性)을 복원하는 본성회복이다. 우리에게 통합교육은 곧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품부한 본성 회복을 위한 진보적 교육이다.
마지막으로 윤상원은 포용교육 실현을 위한 노르웨이의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학교 운동>을 말한다. 교육에서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는 모든 학생이 하나의 학교에서 함께 배우는 ‘포용교육’이다. 여기 ‘포용교육’은 진정한 통합교육의 별칭이다. 노르웨이에서 포용교육 실현을 위한 ‘특별요구교육’은 한 학생의 다양하고 특별한 교육 요구를 학교에서 배제하지 않고 발달의 보편적 조건으로 수용한다.
놀랍게도 노르웨이는 <특수학교법>의 폐지와 함께 모든 특수학교를 폐쇄하고, 지역학교와 학부모를 지원하기 위한 ‘특수교육지원센터’로 전환했다. 이로써 모든 장애학생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서 교육받게 되었다. 따라서 교육과정 운영도 학생의 특별한 교육 요구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재조정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노르웨이에서 ‘포용교육’의 실천과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통합교육은 그 실천 과정에 내재한다. 이 책은 경쟁교육 체제에서 외형적 무늬로만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통합교육을 전면적으로 반추함으로써, 모두를 포용하는 진정한 통합교육에 대한 급진적 제안서다. 특히 현장 교사들의 체험에서 우러난 제안이자 담론이기에 설득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