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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인류세인가?

평촌0505 2025. 7. 9. 08:22

1. ‘인류세’(Anthropocene)의 도래와 그 영향

 

대기 과학자 파울 크뤼천(P. Crutzen)이 2000년 멕시코 국제 지권-생물권 회의에서 처음 인류세개념을 제기했다. 인류세는 Anthropos(인류) + cene(/:누대----)의 합성어다. 대기와 기후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던 중 번쩍하는 느낌을 주는 인류세’ 라는 말이 등장했다. 크뤼천은 프레온 가스가 오존층 파괴의 주범임을 밝혀 1995년 노벨 화학상 받은 사람이어서 그의 주장은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은 기후 안정기인 홀로세’(Holocene)가 아니다. 우리는 홀로세의 마지막 세대이자 인류세의 첫 세대로서 대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다. J. 다이아몬드는 농업이 인류 최대의 실수랬다. 사람을 땅의 노예로 삼았다. 산업혁명은 사람을 기계의 노예로 만들었다.산업혁명 이후 기술혁신과 물질적 풍요는 오늘의 인류세를 촉발했다.

 

인류세는 불과 약 20년 전에 등장한 과학(지질학) 용어임에도 인문·사회학문에 걸쳐 오늘날 이처럼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스마트 폰이 한 세대 만에 세상을 바꾼 것과 인류세의 도래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비견되는가?  기술혁신 도구의 활용과 인류세의 곤경’을 아울러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의 기후생태 위기를 초래한 주인공은 호모 사피엔스다. 인간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지구 시스템에 균열을 초래할 정도가 되었다면, 그것을 개선할 책임과 방안도 인간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는  인류세의 인문학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양면성과 모순을 성찰해 보고싶다. 이것은 내 나름 인류세에대한 문제의식이자 접근방법이다.

 

2. 거대한 가속화와 인류세

 

슘페트는 인류세를 창조적 파괴의 돌풍이랬다.

사회경제적 지표로서 인구 증가, 실질 GDP, 에너지 사용, 비료 소비, 그리고 지구 시스템변화요인으로 이산화탄소, 성층권 오존과 표면 온도, 열대우림 손실, 해양 산성화 등을 장기 추적한 결과 산업혁명(1750) 이후 1950년대까지는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다가 1950년대 이후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른바 거대한 가속’(great acceleration)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가 인류세의 실질적(본격적) 시작 시기를 1950년대 이후로 잡는 데에 대체로 합의하는 이유다.

 

탁월한 기술혁신은 필연적으로 탁월한 에너지 소비를 수반한다. 1750년 두 마리 말로 쟁기질하는 농민은 1,000 와트를 통제하지만, 보잉 747 제트기는 10억 와트를 소비한다. 10만 배의 동력 차이다. 정보화시대의 빅 데이트센터는 에너지 소비에도 쉼이 없다.

 

지구 시스템은 연기적/유기적으로 얽힌 통합체다. 지구 생태 용량 발자국에서 보면, 미국인은 지구가 5개 이상 있어야 하고, 한국인 평균은 3개 이상이다. 기후 악당, 기후 바보로 불리는 이유다. 세계적 평균 생태 용량 발자국은 지구의 1.7개에 달한다.

 

거대한 가속을 어떻게 완화 조절하느냐가 인류의 생존과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 기후생태 위기에서 연착륙과 경착륙의 차이는 80억 인류의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해를 거듭할수록기후 채찍질은 가중되고 있다.

 

그 변곡점(tipping point)은 언제쯤, 어떻게 올까? 인류세는 지구과학의 문제지만, 역사철학적 통찰을 요하는 주제다.

모두가 기후 탓인가? 라는 질문은 기후변화를 좀 더 장기적이고 다면적으로 접근해 봐야 하는 숙제를 안긴다. 기후변화는 장기적 복합적 문제이기에 그 대응 방식도 다양하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인류의 죽고 사는 실존적 곤경임에 틀림없다.

 

지구 위험의 한계와 도미노 현상으로 생물 다양성, 질소와 인의 순환(녹조, 적조), 토지이용(산업적 농법), 기후변화가 계속 거론되고 있다. 생태 종말(eco-apocalypse)의 경고는 식량 위기, 해수면 상승, 폭염, 산불 확산을 동시 다발적으로 반영한다.

 

 

3. 인류세의 시대 의식

 

<행성시대 역사의 기후>에서 인도의 차크라바르티는 기후변화를 당대의 시대 의식’(epochal consciousness)으로 제기했다. 이것은 문명 위기의식이자 우환 의식이다. 야스퍼스는 시대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댔다. 그 이유는 해결이 어려운 긴장 속에서 장기적으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세의 역사 인식은 자연사의 생명중심 빅 히스토리에 빠지는 것(falling)이기에 일종의 인식 충격(신비성)을 동반한다. 지금 여기의 나는 30억 년 이상에 이르는 생명 바통을 이어받은 존재다. 생명의 진화는 공생의 과정이다. 인류세의 역사 인식에서 인간중심에서 생명중심 세계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긴요하다.

 

박찬석 총장은 지리산책 교실 <에콰도르 생물의 다양성>(2025.05.20.)에서 에콰도르는 2008년 세계 최초로 헌법에서 자연의 권리를 부여한 나라로서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고 했다. “경제개발은 생명의 종에는 천적이다. 인간 생명을 유지 보전해주는 생물 다양성을 인간이 멸종시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랬다. 이 대목에서 생명의 긴 역사에서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이 과연 직선적인 발전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지속 가능성과 죽고 사는 생존의 곤경으로서 인류세의 시대 의식은 당대에 우리가 어찌 살 건가?라는 질문을 거듭 제기하게 한다.  지금은 80억 인류에게 ‘탐진치’(貪瞋痴)에서 계정혜’(戒定慧)로의 전환이 절실한 때다. 지금 여기서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 글은 필자의 '인류세 인문학' 강의 요목을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