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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번째 생일 즈음에

평촌0505 2025. 7. 12. 20:24

금년은 음력으로 윤 6월이라 양력 8월에 가족들이 내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근데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어느 고마운 지인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윤달 생일은 본래 첫 윤달에 챙기는 게 맞단다. 나는 1945년 해방을 앞두고 한창 더울 때, 선산 고아 평촌에서 태어났다. 5남매의 막내둥이로 어머니가 이른 아침에 보리쌀 씻다가 낳았다.

 

할머니는 막내 손주를 위해 첫 새벽에 낙동강 물을 한 동이 길러 오셔서 나를 씻겼다. 어쩌면 나는 그 할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지금도 몸과 마음이 건강한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내 울음소리가 들리면, 아이 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단다. 이런 식으로 할머니 문화가 나의 유년 시절에 영향을 미쳤다.

 

지나고 보니 나는 격동의 세월을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일제 치하 말기에 태어나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자랐다. 내가 다섯 살 때,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여름 나는 낙동강을 건너 군위 효령을 거쳐 영천에서 다시 청도까지 고된 피난 행렬에 끼어 타박타박 걸어가야 했다.

 

그 피난길이 어린 내게 얼마나 고달팠던지 피난 끝에 나는 약 한 달간이나 걷지를 못하고 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이듬해 늦봄에 나는 폭발물 사고로 오른 손가락을 세 개나 잃었다. 이렇게 나는 온몸으로 한국전쟁을 된통 치렀다. 그래도 그 손으로 글씨를 썼고, 교단에서 분필을 쥐었다. 지금은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기를 두드린다.

 

내가 중2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종식을 고했다. 혁명은 빛을 볼 겨를도 없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18년 동안 박정희 군사독재로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70년대에는 고도 경제성장을 통해 가난의 굴레로부터 차츰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가난한 시절에 어렵게 대학 공부를 마쳤다. 그나마 부모를 잘 만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소농 출신이었으나, 일 잘하는 어머니와 힘을 합쳐 중농으로 기반을 잡았다. 부모님이 농지를 늘리는 과정에서 해방 후 토지개혁 성공이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1973년 모교에 교수가 되었고, 그해에 결혼했다. 단출하게 신접살림을 시작했으나, 고도 경제성장에 힘입어 1975년에는 작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나의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은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졌다. 1990년대에 내 연구실에 컴퓨터가 들어왔다. 2000년대에는 우리나라도 지식정보사회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2012년에 대학교수로 정년했다. 그리고 지금은 80줄의 노년에 이르렀고, 세상은 디지털 시대로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 나는 지구상에 가장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아동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결혼 후 장년기에는 압축 경제성장의 혜택을 집중적으로 받으면서 교수로 일했다. 그러나 정년 후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디지털 시대의 파고에 말려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맞물려 성공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노년에 나는 선진국 반열에 든 나라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분단체제의 비극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나는 80 평생에 농업사회-산업사회-지식정보사회의 변화를 모두 체험하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게다가 나는 지구 행성의 차원에서 볼 때, 홀로세의 마지막 세대이자 인류세(anthropocene)의 첫 세대로서 기후생태 위기를 실존적 으로 체감하고 있다. 나는 격변의 다중위기 시대를 살면서 엄청난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81번째 생일을 맞아 다시 여생을 어찌 살 것인가를 반추하게 된다. 노자는 되돌아보는 것이 도()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랬다. 노년에 시대에 앞서 갈 수도 없지만, 시대변화를 거역할 수도 없다. 이래저래 삶의 정체성 혼란을 느낀다. 나는 좀 느리게 살되, 단순하게 살고 싶다.

 

지혜로운 어부는 그물에 걸린 큰 고기 한 마리만 건지고 나머지는 다 버린다는 데. 81번째 생일에 지혜로운 삶을 다시 숙고한다. 정답은 없을 터이지만, 나만의 답을 구성하는 과정이 긴요하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다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