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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의 가르침

평촌0505 2013. 8. 30. 10:58

 

 

 

 

 

1945년 12월, 이집트 북부 나일 강 기슭에 위치한 마을(Nag Hammadi) 근처에서 밭에 뿌릴 퇴비를 모으던 농부가 봉인된 질그릇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다. 이 항아리 속에 1600년 동안 묻혀 있었던 문서 중에서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이 발견된 게다. 신비주의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낸 앤드류 하비(A. Harvey) 교수는 1945년 12월에 발견된 이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는 죽임의 파괴였지만, 하나는 영적인 생명의 젖줄이었다. 어쩌면 하늘은 공평하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통일된 종교로 기독교를 승인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기독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공의회)가 열렸다. 이 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아리우스파를 물리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2009) 교수는 『또 다른 예수』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正經化)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 기준에 따라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이때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나중에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속에 숨겨 놓은 책들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오강남, 2009, pp.16-17).

 

처음 항아리를 발견한 농부 형제는 그 문서들이 그들이 발견 당시에 기대한 황금은 아니지만 골동품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 암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다. 그 문서들은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 년 동안 골동품 시장을 떠돌다가 마침내 이집트 콥트어(Coptic)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박물관 측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그함마디 문서의 열람을 허용했고, 어떤 식의 재출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문서가 세상에 완전히 공개되기까지 다시 35년의 세월(즉, 1980년 이후)이 흘렀다고 한다(류시화 옮김, 도마복음 강의, 2008).

 

이 나그함마디 문서 뭉치 속에는 고대 이집트어의 하나인 콥트어로 적힌 13개의 두루마리로 된, 총 52편의 문서가 담겨 있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등이 있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장 관심을 끈 것이 바로 『도마복음』이다. 나그함마디 문서들은 현재의 신약성서와는 달리 로마교회의 검열과 첨삭, 의도적인 수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어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접근하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도마복음』의 서장(prologue)은 이렇게 말문을 연다.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입니다."(Ther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Judas Thomas the Twin recorded.)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살아 있는 예수’(the living Jesus)라는 말이다. 죽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가 살아생전에 그가 한 말들에 대한 로기온 자료라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독자는 이 도마복음서를 매개로 살아 있는 예수를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김용옥은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2』(2010)에서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는 예수’는 죽음의 전제조차 없는 예수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살아 있는 회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예수다. 이 살아 있는 예수에게는 죽음의 전제가 없기 때문에 부활도 있을 수 없다. 부활을 운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승천도 재림도 있을 필요가 없다. 일체의 신화적 장치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일체의 종말론적 전제나 개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 대신 남는 것은 오로지 하나!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로기온)인 것이다(김용옥, 2010, p.77).

 

이것이 공관복음(共觀福音)과 『도마복음』의 중요한 차이다. 도올은 “살아있는 예수를 나의 실존의 본래성과 동일시 할 때만이 예수는 우리 삶의 의미체가 된다.”고 했다. 게다가 여기서 예수가 한 말은 ‘은밀한 말씀들’(the secret sayings)이라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비의(秘意)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기록자는 예수의 쌍둥이 유다 토마스란다. 실제로 예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김용옥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의 말을 예수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 예수를 너무도 잘 알고 이해하는 쌍둥이가 기록했다고 하는 사실은 곧 그 기록을 읽는 우리 자신도 예수의 쌍둥이, 즉 예수의 분신, 보다 과감하게 말하면 예수와 동일한 경지의 인간, 아니 예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화자와 기록자, 그리고 독자. 이 삼자의 해석학적 일체감은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문서 전체를 일관하는 정조(情調)였다(김용옥, 2010, p.83).

 

그렇다. 화자-기록자-독자가 삼위일체로 하나 될 때 도마복음서의 진정한 실체(reality)가 드러난다. 어쨌든 살아 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을 교감(intercourse)하는 주체는 바로 그 자신이 예수의 분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도마복음서를 매개로 살아 있는 예수를 직접 만나는 일만 남아 있다.

 

『도마복음』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는 달리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언자로서 믿음의 대상으로 설정하기보다는 제자들(혹은 우리들 자신) 각자의 내면적 자각과 깨침을 통해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도마복음』에 나오는 약 50% 정도가 공관복음에 나오는 말씀과 평행을 이루고 있지만, 『도마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기적, 예언의 성취, 재림, 종말, 부활, 최후 심판, 대속(代贖)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도마복음』에는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osis)을 통해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오강남, 2009)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도마복음〟은 “예수만이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 안에서 깨달으면 누구나 예수처럼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기존의 4복음서와 달리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함으로써 『도마복음』은 공관복음에 포함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류시화는 ‘신의 길 인간의 길’(오쇼, 『도마복음 강의』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신의 아들인가? 당신이 인류를 구원하러 왔는가?” 하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그는 더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그와 그들은 똑같은 근원으로부터 나왔으며, 똑같은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 근원을 자각함으로써 누구나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외부의 신과 메시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궁극적인 구원을 줄 수 없으며, 저마다의 깨침만이 그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라고.

그가 말한 것은 이것이었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류시화, 2008, p.9).

 

이처럼 그는 우리에게 진정한 마음의 길을 열어 보였다. 이 한 가지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는 3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도마복음』은 그 첫 머리에서 이것은 ‘살아 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이라 했다. 예수의 말씀 중 여기에 나오는 메시지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깊은 차원의 진리를 찾는 소수의 사람들만이(제23절의 표현처럼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꼴”이라 할 정도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비밀의 말씀’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가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도마복음』 원본에는 숫자 구분이 없지만 성서학자들은 편의상 『도마복음』을 114절로 구분해 놓고 있다. 여기에는 오로지 예수의 가르침, 예언, 격언, 우화 등 예수의 말씀만 적은 ‘어록’(語錄)으로 서로 연결되지 않는 독립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하에서는 내가 『도마복음』을 접하고 특히 감명 받은 몇 구절을 중심으로 기존의 해석에다 내 느낌을 보태 본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도마 1절)

 

이 말은 종교적 진술에 대해 우리가 어떤 해석을 하느냐가 영적인 사활에 직결될 정도로 중요하는 것이다. 오강남(2009) 교수는 종교적 진술에는 네 가지 의미 층이 있다고 했다. 즉, 문자적 의미가 있고, 나아가 심적, 영적, 신비적 의미가 있다는 게다. 바울도 성서에서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성은 사람을 살린다”고 했다. 이처럼여기 주어진 메시지의 가장 깊은 영성적․신비적 차원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함으로써 새 생명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표현은 『도마복음』에 네 번이나 나온다(제18, 19, 85, 111절). 영적 사활에 관계되는 만큼 의미심장하다는 뜻일 게다. 도올 김용옥(2010)은 여기서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의 부정이 아니라 ‘삶의 환희’를 강조하는 상징적 표현이라 했다. 그 해석이 탁월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도마 2절)

 

“구하는 자는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구할지니”, 이 말을 접하니 『중용(中庸)』20장의 다음 구절이 떠오른다. “생각할진대 결말을 얻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중략)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십시오.” 나는 이 말을 두고 특수교육을 향한 경구라고 해석한 적이 있다. 여기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말은 『중용』의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를 떠올린다. 그래서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고 했다.

 

이어 도마는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이라 했다. 대개 종교적 진리는 일상적 틀을 초월하기에 우리에게 ‘불편한 진리’다. 오강남 교수는 훌륭한 종교적 가르침은 “편안한 사람에게는 혼란을, 혼란한 사람에게는 편안을 준다.”고 했다. 칸트는 자기 인생을 참으로 경이롭게 하는 것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자기 속에 있는 선험적 도덕성이라 했다. 인생은 경이와 신비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맛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을 체감 혹은 육화(肉化)한 사람은 모든 걸 다스리고 이룬 사람일 게다. 불교에서는 크게 깨쳐 대자유를 얻으면 편히 쉰다고 했다. 쉰다는 것은 비움의 구원이다.

 

우리가 깨침을 얻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나라는 인격주체의 근원적 변화’(the transformation of one's subjectivity)를 요구한다. 도올 김용옥의 표현에 의하면 “아이디 카드(identification card), 즉 자기동일성의 증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디 카드를 새로 발급받아야 하니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 혼란은 동시에 경이(驚異)다. 경이의 체험은 우리를 ‘지혜의 왕국’에 들게 한다. ‘나’라는 왕국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추구의 노력, 그리고 고통과 경이의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개인의 주체적 개벽(開闢)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실존하는 인간의 진정한(이상적) 모습을 도마복음서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러분 자신을 아십시오. 그러면 남도 여러분을 알 것이고, 여러분도 자신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가난에 처하게 되고, 여러분이 가난 그 자체가 됩니다.”((도마 3절 후반)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 self!) 많이 들어본 말이다. 도올은 인간 예수의 모습과 인간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겹치는 것으로 본다. 물론 문화사적 관점에서 예수는 헬레니즘의 보편주의적 문화권에 살면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원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니라, 이 말은 델포이 신전에 씌어 있던 신의 신탁(神託)이었다. 오강남(2009)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알아야 할 것, 깨쳐야 할 것 중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내가 바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사실, 내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는 사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 속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 혹은 ’얼나‘에 다름 아니라(人乃天)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음‘-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진주‘같은 진리다.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자각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오강남, 2009, p.47).

 

문제는 우리가 이런 깨침에 이르지 못하고 미망(未忘)의 삶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도마서 3절의 구절에 대해 도올 김용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여기서 논리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을 선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유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케 만드는 지혜로운 스승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 존엄과 평등의 극치다. 적어도 도마복음서 시대(즉, 1세기의 초기 기독교의 세계)에서는 이런 ‘깨침’의 문제가 아무런 금기 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꼽힌다. 실제로 칼 야스파스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예수를 같은 반열에 놓고, 결코 비교할 수 없는 4성자(聖者)를 실존적 인물로 함께 아울러 논의 한 적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칠 일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를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오,

또 하나 된 자가 될 것이니라.“

 

노자 『도덕경』(제55장)에서도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아기와 같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 ‘갓난아기’는 물리적인 갓난아기라기보다는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갓난아기가 된 사람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삶의 자리 그 자체를 항상 어린이 다웁게 만들어 가야한다”는 것이다. 도올은 이 절의 해석에서 “천국이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아이로 역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갓난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않는 사람은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이다.

 

도올은 “우리 사회에 촉촉한 봄비에 솟아오르는 연두잎 새싹 같이 부드러운 노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뜨이기를...”바란다고 했다. 여기 도마복음서에서는 ‘첫째’라는 것이 죽음을 향해 가는 어른의 무리이자 하향의 무리다. 오히려 ‘꼴찌’가 되는 것이 갓난 아이 쪽으로 가깝게 가는 것이자 상향의 무리이다. 그런데 첫째의 모두가 꼴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의 일부만 선택되어 꼴찌가 된다는 것이다. 나도 손녀(지현), 손자(경현)랑 함께 놀 때가 뭣보다 행복하다는 느낌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살고 싶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그물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를 잔뜩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습니다. 그 지혜로운 어부는 잡은 물고기들 중에서 좋고 큰 고기 한 마리를 찾아내고, 다시 나머지 작은 고기들을 모두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큰 물고기들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 들을 귀 있는 이들은 잘 들어야 합니다.”(도마 8절)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큰 ‘물고기’는 무엇인가? 토마스에 의하면, 우리의 궁극 관심은 내 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현존,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류영모 선생의 표현대로 하면 몸나와 제나를 버리고 얼나를 붙잡는 것이다. 궁극적인 것을 깨닫고 발견한 ‘지혜로운’ 사람은 일상의 잡다한 일들에 대한 관심을 끊을 줄 안다. 그래야 큰 고기를 쉽게 골라낼 수 있다. 노자 『도덕경』에도 도(道)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일손’(日損)의 길이라 했다. 오강남 교수는 “예수님의 표현을 쓰면, ‘성전을 청결케 하심’ 나아가 아주 ‘성전을 허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도마는 귀 있는 이들은 잘 들으라고 했다. 하늘나라의 비밀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감추어진 가르침’(esoteric teaching)이다. 이것이 예수 가르침의 비의(秘意)다. 그만큼 그에 담긴 의미는 순결하고 감동적이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비교하여 내가 누구 같은지 말해 주시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의로운 사자(使者)와 같습니다.” 마테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혜로운 철인과 같습니다.” 도마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입으로는 당신이 누구와 같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 자네는 내게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취했네.”(도마 13절 전반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말은 공관복음서에도 나온다. 오강남 교수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여기 『도마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공관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고백만 있을 뿐 ‘도마의 침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깨달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면 이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른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를 두고 한 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으뜸 되는 가르침은 ‘불언지교’(不言之敎)다.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다.

 

예수가 도마에게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 자네는 내게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취했네.” 라고 한 말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극치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인안회가 공자에게 이런저런 말로 자신의 공부가 깊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공자는 거기에 대해 별로 관심 기울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다가 안회가 자기는 좌망(坐忘), 즉 앉아서 모든 것을 잊었다고 하니 공자가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 하고 묻는다. 안회가 모든 앎을 몰아내고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자 공자는 그를 보고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면서 부탁했다. 예수와 도마, 공자와 안회의 관계가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참으로 부러운 경지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하늘나라가 어떠할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겨자씨와 같아서, 모든 씨들 중 지극히 작지만, 준비된 땅에 떨어지면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가 될 것입니다.”(도마 20절)

 

우리 속에 잠재적 상태로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는 가능태로서의 씨앗은 겨자씨처럼 미미하기 짝이 없지만, 그 변화의 가능성은 무궁무진(unlimited)하다. 다만 그 씨앗이 준비된 땅에 떨어져야 한다. 불교에서 ‘돈오’(頓悟)는 별안간(몰록) 깨친다는 말인데, 이미 공부가 쌓여 심경이 순숙(純熟)한 때에 기연(機緣)이 오면 그 깨치는 찰나는 시간의 여유를 두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부가 쌓여 심경이 순숙한 경지에 이름’이다. 그래서 도마는 겨자씨가 준비된 땅에 떨어지면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가 된다고 했다. 으뜸 되는 가르침으로서 종교(宗敎)는 궁극적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수단이자 체험 그 자체다.

 

여기서 ‘궁극적 변혁’의 지침으로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혹은 소를 찾는 『심우도(尋牛圖)』를 잠시 살펴보자. 그 변혁의 과정적 단계는 이렇다.

(1) 심우(尋牛); 소를 찾는다. 깨침을 향한 원심(願心)을 발하는 단계다.

(2) 견적(見跡); 소의 발자취를 보았다. 경전을 읽고 공부하여 깨침의 길을 찾는 단계다.

(3) 견우(見牛); 소를 보았다. 자기 맘을 바로 알아차려서(見性) 깨침이 열리는 단 계다.

(4) 득우(得牛); 소를 붙잡았다. 깨친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단계

(5) 목우(牧牛); 소를 먹인다. 한 번 깨쳤다고 방심(放心)하면 도망친다. 소의 고삐 를 놓지 말고 수행(修行)을 지속해야 하는 단계

(6) 기우귀가(騎牛歸家); 소(길들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깨친 본래의 자 리로 돌아오는 단계

(7) 망우존인(妄牛存人); 소는 없고 사람은 있다. 깨치긴 했지만 내가 깨쳤다는 병 (病)이 남아 있는 단계

(8);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없다. 강물이 바다에 이르듯 일원상(一圓相) 에 접어든 단계

(9) 반본환원(返本還元); 본래로 돌아간다. 앞의 일원상(一圓相)이 뒷등이라면, 반 본환원(返本還元)은 세상의 표면(자연) 그대로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시가지로 들어간다. 목동(牧童)이 포대(布袋) 스님이 되 어 세상 속으로 나오는 단계다.

 

이상에서 보면, 불교와 기독교의 깨침이 다르면서 서로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 있는 석가와 살아 있는 예수가 만나 이야기하면 서로 말 끼가 통할 게다. 실제로 틱낫한(Thick Nhat Hanh)은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예수(Living Buddha, Living Christ)』(1995) 라는 책에서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로 엮어 펴냈다. 최근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는 닫힌 종교에서 열린 종교로의 종교다원주의를 제기하면서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2013)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일본에서 스즈키 순류(鈴木俊陵) 밑에서 선수행을 하고 선사(禪師)가 된 베이커(R. Baker)는 “제가 『도마복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구태여 불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라는 고백을 했단다. 이에 대해 오강남은“『도마복음』의 가르침이 선불교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을 한두 세대 전에만 해도 알 길이 없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원래 겨자는 1년생 풀로서 나무가 될 수 없다지만)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를 제공해 주게 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원래 자리행(自利行)은 이타행(利他行)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지만, 남이 그렇게 알아주어야지 깨친 자기가 나서서 설칠 일이 아니다. 마을의 정자나무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와 그늘에서 쉼을 얻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가 되싶시오.”(도마42)

 

도마복음서에서만 나오고, 『도마복음』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도마복음서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대표적인 구절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꼽을 것이라 한다. 어째서인가? 이 42절은 짧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아무런 맥락 없이 “나그네가 되십시오”(방랑자가 되라) 라고 하니 우리에게 훨씬 순결한 감동을 준다. 사실 나그네가 되어 길을 떠나고 집을 떠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는 기본적 가르침의 하나다. 이 구절에 대해 도올 김용옥은 이렇게 말한다.

 

불교에도 ‘만행’(卍行)이라는 것이 있다. 스님들의 삶을 특징지우는 것도 ‘무소유’(無所有)와 ‘무소주’(無所住)라 할 것이다. ...(중략) 예수운동 도반들에게도 무소유(재산 포기), 무주택(집 없음), 무가정(가정 포기)은 필수의 요건이었으며, 그들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여기 “방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구하는 도반들의 아이덴티티가 그룹 아이덴티티가 아닌, 개인의 내면적 주체성을 그 핵심으로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방랑’이란 세계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사(世事)에 연루되지 않는 탈(脫)앙가주망(disengagement)을 의미하는 것이다(김용옥. 도마복음한글역주3. 2010, p.105).

 

그래서 오강남 교수는 우리가 집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의 인습적이고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생활방식이나 사유방식을 뒤로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향해 출발함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은 내적 자유를 향유하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삶이다. 정년 후의 나의 삶이 바로 이런 삶으로 엮어지기를 소망한다. 나그네가 되라!(Be a passersby!) 인생은 나그네 길.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홀로이며 택함을 받은 이는 행복합니다. 나라를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와서 그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도마 49)

 

도마복음서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홀로 됨’ 혹은 ‘홀로 섬’을 말하고 있다. 그만큼 단독자, ‘홀로인 자와의 홀로 됨’(alone with the Alone)(오강남, 2009)을 강조하고 있음이다. 성경에는 사막에서 홀로 지낸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모세가 그랬고, 예수도 광야에서 40일간이나 홀로 기도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사막은 결국 ‘정신적 사막’의 상징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정신적 사막’ 말이다. 코뿔소처럼 혼자서 외뿔로 걸어가며, 혼자서 깨달은 그런 사람 말이다.

 

이렇게 홀로됨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라’(천국)를 찾는데, 이 나라는 바로 우리가 나온 근원이자 우리가 돌아갈 궁극 목적지이기도 하다. 이것은『십우도』에서 말하는 ‘반본환원’(返本還元)의 자리, 혹은 유학에서 말하는 ‘본래성’(本來性)의 회복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도마복음서에서 나라는 너희 마음 안에 있는 것이지 너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서 내가 보기에 도마복음서의 가르침은 내면적 깨침을 중시하는 위대한 교육의 과정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에 의존하는 몸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 몸에 의존하는 영혼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부끄러울지어다. 영혼에 매달린 육체여! 부끄러울지어다. 육체에 매달린 육체여!)(도마 112절)

 

이 절의 괄호 안 부분은 도올 김용옥의 번역이다. ‘의존하다’를 ‘메달리다’로 좀 더 강렬하게 표현했다. 이 절에 대한 도올의 해석을 보자.

 

궁극적으로 영혼과 육체는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인 관계를 통하여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며 일자가 타자에게 환원․흡수될 수 없는 것이다. 유심론의 마음도 부끄러운 것이며, 유물론의 물질도 부끄러운 것이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를 현현시키며 궁극적으로 함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영혼과 육체가 분화되기 이전의 ‘하나 된 자’로서 우리는 회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박(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인들에게는 본 로기온 속의 예수의 사상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김용옥. 도마복음한글역주3. 2010, p.365).

 

영혼과 육체가 상호의존적이지만 둘 다 하느님의 영(靈; spirit)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게 오강남(2009)의 해석이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영, 나의 참 나를 찾는 일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리(三理, 즉 生理, 心理, 哲理)의 섭생(攝生)을 말하는 동양의 고전적 입장이 내게는 훨씬 생생하게 와 닿는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그 나라가 언제 올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어 사람들이 볼 수 없습니다.”(도마 113절)

 

앞에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했듯이 ‘아버지의 나라’도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올은 “천국과 세속이 하나이며, 영혼과 육체가 하나이며, 하늘과 땅이 하나이며, 빛과 어둠이 하나라는 이 강렬한 주제는 당대 중동세계의 모든 이원론적 사유를 거부하는 일대 혁명 중의 혁명”이라 했다. 제자들은 아직도 그 나라가 ‘언제’ 이를 것인가를 묻지만, 예수는 그 ‘나라’는 미래 어느 시점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관통하는 ‘영원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오강남, 2009).

 

그 나라는 이미 여기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도올에 의하면, 나라(천국)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의 실체화는 실천 이성적 삶의 결단에 의한 과제상황이라는 것이다. 도올의 인문학적 해석이 신선하다. 도올은 ‘토마스에 의한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전략) 신약의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복음이다. 그러나 토마스의 복음은 같은 기쁜 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살아 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의 해석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복음이며, 야훼를 향한 메타노이아가 아니라 야훼를 버리는 메타노이아이다. 그것은 말씀 속의 아버지를 발견하는 것이며 하나님에로의 예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는 어디까지나 선포하는 예수이지, 선포되어지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중략) 도마의 유앙겔리온이야말로 인류의 인문정신이 개화한 21세기에 다시 태어난 ‘기쁜 소식’인 것이다. 기나긴 분별의 장벽을 허물고, 동․서를 회통시키고, 융합시키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김용옥. 도마복음한글역주3. 2010, pp.375-376).

 

토마스의 복음은 신 중심의 복음이 아닌 인간 중심(즉, 내 속에 내재하는 신)의 복음이라는 데에 특히 공감이 간다. 그것은 인류의 인문정신이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 ‘기쁜 소식’이며, 동․서를 회통(會通)하는 ‘기쁜 소식’이라는 도올의 해석이 돋보인다. 이에 비해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저자후기에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천국의 비밀’이라는 제하에 공관복음의 연장선상에서 도마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다.

 

공관복음에도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공관복음에서도 더 깊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란 우리 중에, 혹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영어로 ‘God within'입니다. 『도마복음』의 가르침과 하등 상충될 여지가 없습니다(오강남. 또 다른 예수. 2009, p.431).

 

종교학자의 신중한 해석과 그 깊이가 돋보이는 지적이다. 그는 폴 틸리히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높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깊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종교사적인 측면에서 도마복음서를 세계 여러 종교 전통에서 면면히 흐르는 ‘신비주의’ 전통에 속하는 문헌으로 규정한다.(그러나 도올 김용옥은 도마복음서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부정한다.) 이제 내게 도마복음서의 깊이에서 신약의 4복음서를 새로 읽어야 할 숙제가 닦아온다. 이것은 나를 향한 『도마복음』의 가르침이다. 김병하(2013.08.15.)

 

<추기(追記)>

2006년에 내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손에 든 것은 어쩌면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판 구멍에 목을 내미는 것과 같은 행운 혹은 지복(至福)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작년 말(2012년 12월)에 내가 『도마복음』을 접하고 오늘(광복절 68주년) 이 글을 남기게 된 것은 어쩌면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이변(異變)이자 행운이다. 이 자리에서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선생과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