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학생의 교과교육: 심성함양과 교과
청각장애학생의 교과교육: 심성함양과 교과
김병하(金炳廈)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특수교육문제연구소 상임고문)
머리말
세계적으로 농교육이 특수교육으로 가장 먼저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는 맹교육이 시작되고 10년 뒤에 농교육이 성립(1908)되었다. 농교육은 그 역사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특수교육 분야 내에서도 하나의 마이너리티 그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농교육은 여전히 특수교육 중의 교육으로 특별한 쟁점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그 쟁점의 중심에는 의사소통 양식(communication mode)으로서 언어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교육에서 언어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나 내용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농교육에서는 그 역사가 증언하듯 언어문제가 교육의 목적은 물론 내용까지도 규제하는 기이한 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본 발표에서는 농교육에서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 농학교에서 교과교육의 실패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교과=점수’라는 경쟁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학교교육 현실에서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더욱 아득한 이상이 되고 말았다. 교육은 인간사에서 가장 귀하고 엄중한 일 가운데 하나다. 교육은 정권의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에서 교과교육이 바로 서야 학교가 바로 선다. 그리고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일차적 직분이자 교권의 내면적 기준이다. 농교육이 교육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학교교육으로서 농교육이 성립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교육에 안겨진 가장 큰 난점(難點)이다.
1. 농교육에서 본말전도
교육에서 근본을 간과하고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면 어김없이 재앙(災殃)이 따른다. 농교육에서 재앙은 중층적(重層的)으로 얽혀 있다. 그 하나는 농교육의 성립이래로 언어지도 방법이 교과지도 내용을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교육에서 내용이 방법을 규정하지 방법이 내용을 규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농교육에서는 지나치게 언어지도 방법논쟁에 휘말린 나머지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는 일은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학교는 일차적으로 교과를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지 의사소통 방법을 문제 삼는 곳이 아니다. 다만 교과교육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적절한 의사소통 방법이 동원될 뿐이다. 이것은 농교육에서 치명적인 ‘본말전도’ 임에도 우리 농교육계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
둘째는 엎친 데에 덮친 격으로 교과공부가 점수 따기 요령으로 둔갑하면서 교과는 교과답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교과=점수는 성적=행복(출세)으로 전치(轉置)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심각한 학생 자살문제,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학교폭력의 양상이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가를 되짚어 봐야 한다. 게다가 치열한 학력경쟁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농교육은 교과공부에 대한 열의마저 시들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농교육의 재앙은 ‘듣지 못함’(deafness)의 ‘장애’(disabilities)에 대한 인식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청각장애학생들은 학습가능성과 인지능력에 있어 기본적으로 청인학생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열등하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이른바 농학생에 대한 ‘낮은 기대수준’이 농교육의 실패를 부추기고 있다. 교사와 부모의 낮은 기대수준은 농학생의 자아정체성에 제2의 장애를 안겨준다.
이처럼 농교육에서 ‘본말전도’의 문제는 난마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막상 현장에서는 무엇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그 갈피를 잡기조차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럼 어찌할 건가? 노자(老子)는 “되돌아봄이 도의 움직임”(反者道之行)이라 했다. 즉, 복잡하고 어려울수록 근본으로 되돌아가서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뿌리를 튼실하게 유지해야 마침내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된다. ‘체용’(體用)에서 몸통(體)이 몸통 노릇을 하게 둬야지, 몸짓(用)에 끌려 놀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 교육이 머리 둘 곳을 찾게 해야 한다.
『중용(中庸)』첫 구절에는 교육이 교육답게 제 갈 길을 가는 원칙(목적)을 다음처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즉,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성(性; human nature)이고, 이 성(性)에 따르는 것이 이른바 도(道; tao, way)이고, 이 도(道)를 닦는 과정이 이른바 교(敎; education)이다. 여기서 열쇠 말은 性-道-敎로 이어진다. 즉, 교육은 ‘수도’(修道)이고 그 도(道)는 ‘솔성’(率性)이어야 하고, 그 성(性)은 ‘천명’(天命)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른바 敎-道-性-天은 하나로 연관되는 ‘일체’(一體)이다. 결국 교육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품부(稟賦)되어 있는 본래성(本來性)에 따라서 인간이면 마땅히 가야할 길(道)을 닦는 과정(process)이다. 그래서 나는 교육의 목적을 심성함양(心性涵養) 혹은 본성회복(本性回復)으로 규정한다. 농교육이 교육다워지려면 무엇보다도 농학생의 심성함양 혹은 본성회복에 연관되어야 한다. 그리고 농학생의 교과교육은 무엇보다도 이 심성함양의 직접적(일차적)인 매개(매체)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농교육이 교육답게 바로 선다.
2. 심성함양으로서의 교과교육: 그 현실과 이상
농교육에서 교과가 농학생의 심성함양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과연 의미 있는 연관이 있기나 한가? 대체로 그 연관성에 대한 회의(懷疑)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오늘날 학생과 부모는 ‘점수병’에 걸려 있고, 선생은 ‘점수제조기’에 불과한 현실에서 교과공부와 심성함양은 오히려 역(逆)상관인지도 모른다. 즉 공부 잘하는 학생일수록 자신의 점수관리를 위해 더욱 영악(寧惡)스러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교육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색이 출세한 사람일수록 철저히 이기주의자여야 한다는 엄청난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마침내 학교는 성적 거래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날 학교폭력-학생자살-빈부격차-사회범죄-노인빈곤․자살 등은 서로 하나의 연결고리로 견고하게 얽혀 있다. 옛날부터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인 것 같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만한 이유가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런 참담한 현실에 살고 있다. 어찌 보면 백약이 무효다. 이런 때 일수록 심원(心源)으로 되돌아가 다시 제대로 ‘교육함’(educating)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이여 제발 너만이라도 제자리를 지켜다오! 너 교육은 원래 천명(天命)으로 모든 인간에게 품부된 본래성(本來性)이 시키는 대로 그것을 갈고 닦는 게(心性涵養) 진정 너 설 자리가 아니더냐. 부디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 말고 뿌리(體)를 튼실하게 지켜다오. 이것은 오늘날 학교교육에 대한 필자의 회한이자 절규다.
원래 교과교육은 그 자체가 ‘심성함양’의 과정이어야 한다. 교과는 우리 인류가 축적해온 문화와 문명 가운데 ‘진선미’(眞善美)의 진수만 골라서 뽑아 놓은 공적 문서(즉, 교육과정자료)다. 인간의 심성함양은 바로 이 ‘진선미’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즉, 교과에 담긴 ‘진선미’의 세계 자체가 바로 우리 심성이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이상세계이자 기준이다. 이런 교과의 원래 의미를 간과한 체, 우리는 점수로 측정되는 무기력한 지식의 더미로 교과를 외우고 익히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3R's(읽기, 쓰기, 셈하기)처럼 교과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기본 도구는 아닌 게 아니라 무조건 외우는 도리 밖에 없다. 그러나 교과에 담긴 진선미의 세계는 이해하고 느껴야 제 맛이 우러나게 되어 있다.
교과에 대한 이해와 느낌의 이상적 상태를 『대학(大學』에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로 요약했다. 격물치지를 향한 교육의 과정(process)을 『중용(中庸)』에서는 ‘성지’(誠之; 즉, 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로 요약했다. 그래서 ‘성자’(誠者)는 하늘의 도(天道)요, ‘성지자(誠之者)는 사람의 도(人道)라 했다. 해서 교육은 성자(誠者)라는 종착역에 도착하기 위해 성지(誠之)호라는 열차를 타고 끊임없이 달리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성’(誠)은 ed이고 ‘성지’(誠之)는 ing이다. 열차는 달리는 한에서 열차다. 교육은 교수-학습을 통한 노력(달리는)의 과정이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일차적(자연적)으로 심성함양이 이루어지고, 부수적으로 학력도 신장되기 마련이다.
다시 『중용』에서는 이런 노력의 지극한 상태를 ’지성‘(至誠)이라 했다. 그래서 천하의 지극한 정성(至誠)이라야 천명(天命)으로 타고난 자기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심성함양 혹은 본성회복으로서의 교육목적을 ’지성‘(至誠)이래야 온당하게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칙적으로 교과공부는 곧 마음공부이다. 하지만 목하 한국교육은 결과로서 점수만 남고 그 마음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교육에서 지독한 ‘본말전도’이자 재앙이다. 이 재앙을 우리는 언제까지 되풀이 할 건가?
3. 교과와 교사론의 정립
앞에서 천하의 지극한 정성(至誠)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중용』에서는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能盡其性), 다른 사람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 교사론의 핵심이자 궁극이다. 교과교육에서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에 의해 그 교과가 내면화되는 만큼 학생에게도 교과의 내용과 더불어 교사의 인품까지 내면화된다. 여기서 교과가 내면화된다는 것은 곧 교과공부가 심성함양으로 연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용』의 가르침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가 있다.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모든 사물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하늘(天)과 땅(地)과 더불어 온전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중용』22장).
『중용』의 이 말은 심성함양으로서 인간교육의 극치(이상)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정성을 다하면(至誠) 자기의 성(性)을 다 발현할 수 있고, 나아가 다른 사람의 성(性)을 발현케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물(物)의 성(性)을 다 발현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그리되면 천지와 더불어 인간은 삼위일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는 동아시아문명 전통에서 설정한 이상적 인간상이다. 이것은 바로 성인(聖人)의 경지를 일컫는다.
여기서 교사론적 측면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구절은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사의 성(性)이 온전히 발현되고서야 비로소 학생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서 교사에 의한 교과의 내면화가 체현(體現)된 연후라야, 그 교과의 가르침을 매개로 한 학생의 심성함양이 온전히 실현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교과교육의 온당한 모습이자 진정한 의미다.
농학교 교사들은 농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법으로 교과를 자기 것으로 체화(體化)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농교육은 더욱 지난(至難)하다. 이것이 (농교육)교사의 운명이다. 그러나 이 운명을 거역할 교사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이 일을 완벽하게 수행할 교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만 그렇게 하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의 과정을 『중용』에서는 博學-審問-愼思-明辯-篤行으로 제기하고 있다. 널리 배우고(博學), 자세히 묻는 데(審問)에서 학문(學問)이 성립한다. 일차적으로 교사는 학문(공부)을 업으로 삼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학문이 점차로 익어 감에 따라 생각의 틀이 잡혀가게(愼思)되고, 생각이 가지런히 내면화된 다음에 라야 그 말에 조리가 분명(明辯)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교사의 교과지도는 바로 사변(思辨)으로 표출되고, 교사가 내 뱉은 말은 그의 삶으로 이어져야(篤行) 한다. 곧 앎(知)이 삶(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과에 대응하는 교직의 운명이다.
*이글은 대구영화학교 세미나(2013.10.16)에서 주제발표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