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장애인관과 오늘의 장애인운동
『장자(莊子)』의 장애인관과 오늘의 장애인운동
『장자』의 제5편 ‘덕충부’(德充符)는 덕(德)이 가득해서 저절로 드러나는 표시라는 뜻이다. 이편에서 장자는 장애인을 등장시켜, 그가 비록 신체적으로 온전치 못하지만 속에 있는 자신의 천부적 잠재력을 발휘해서 의연한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1999)은 노자의 『도덕경』이 도(道)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것을 강조해서 오늘날 ‘여성운동가의 성서(聖書)가 될 수 있다면, 『장자』는 장애인이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의 성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장자』 제1편의 ‘소요유’(逍遙遊)는 흔히 자유롭게 노니는 인간의 절대 자유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장자』의 주제는 우리 인간이 절대 자유의 존재가 되는 변화(變化)의 가능성과 그것의 실현이다. 1편의 첫 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다. ...(중략)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중략)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池)라 하였습니다(오강남, 1999, p.26).
곤(鯤)은 본래 작은 물고기나 그 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로 등장한다. 이 물고기가 다시 엄청나게 큰 붕(鵬) 새가 되어 구만리나 되는 하늘 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조그만 알에서 깨어 나왔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런 씨앗을 품고 있다. 우리 속에 품부되어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여 이를 크게 실현하는 깨침의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는 실존적 한계를 초월하는 ‘화이위조’(化而爲鳥)의 ‘화’(化)가 있다.
“이 새가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 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나는 것”은 초자연적인 작용(힘)이 아니라, 자기 속의 생래적 가능성이 한 번 신명나게 발현되어 ‘하늘 못’(天池)에 이른다는 것이다. ‘하늘 못’에 이른다는 게 뭔가? 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래성(本來性; human nature)이 천명(天命)을 따라 그것과 하나가 됨이다. 이것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로 거듭나 하늘나라에 이름이다. 혹은 류영모 선생이 말하는 ‘몸 나’에서 ‘얼 나’로 솟나 하느님의 줄을 잡음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감이다. 해서 사바가 열반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신(神)이 아니지만, 신성(神性)은 내 속에 내재한다. 도(道)의 근원은 초월적인 것이지만, 그 길을 따르는 힘은 우리 속에 내재해 있다. 장애인은 그의 장애가 아무리 무겁고 중복되어 있어도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는 존엄한 존재(the human one)다. 이 지점에서 장자의 장애인관과 현대 문명사회에서 장애인을 보는 관점은 갈라진다. 문명사회는 도구로서 문명을 지나치게 존중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그 노예가 되어버렸다. 문명의 측도에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고 등급을 매기다 보면, 사람은 없고 장애(disabilities)만 남는다.
이쯤에서 『장자』에 나타난 장애인관을 직접 살펴보자. ‘왕태(王駘)와 공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노(魯)나라에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형벌을 받아 발 하나가 잘린 사람인데, 그를 따르는 사람의 수가 공자를 따르는 수와 맞먹을 만했단다. 해서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물었다. “왕태는 외발인데 따르는 자가 선생님의 제자와 노나라를 반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서 가르치는 일이 없고, 앉아서 토론하는 일도 없다는 데, 사람들이 텅 빈 채로 찾아가서 가득 얻어 돌아온답니다. 정말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몸이 불구지만 마음은 온전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그는 성인이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을 이끌고 그분을 따르려 한다. ...(중략) 그는 사물의 변화를 운명(運命)으로 여기고 그 근본을 지킨다. 그런 사람은 귀나 눈이 옳다고 하는 것과 상관하지 않고, 덕(德)에서 나오는 평화의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게(遊心) 한다. 사물에서 하나 됨을 보고, 그 잃음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지.”
다시 상계가 말했다. “그는 ‘앎’으로 그 마음을 터득하고, 그 마음으로 영원한 마음을 터득하는 등 자기수양에만 전념했는데, 어찌 사람들이 그리 모여듭니까?” 공자가 답하기를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중략) 이런 사람은 날을 잡아서 어디 먼 곳에 오르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 같은 일에 괘념하겠느냐?”
위에서 ‘노닌다’(遊)는 것이 결국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발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럼 그 마음의 경지는 뭔가? 공자는 왕태의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 같다고 했다. 그는 오로지 자기 내면세계를 향해 정진했을 뿐인데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眞我)를 비춰 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세(勢)에 결코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다는 건가? 장애는 개인적 실존의 엄중한 문제다. 이 엄중한 문제조차 ‘마음을 노닐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우리가 상정하는 그런 장애인이 아니다. 그는 단지 장애를 지닌 ‘성인’(聖人)일 따름이다. 이런 사람은 언제 날을 잡아 먼 곳에 오를 것이라 했는데, 과연 그가 오르고자 하는 먼 곳은 어디일까?
위의 ‘왕태와 공자’ 이야기 외에도 『장자』에는 발이 잘린 ‘신도가(申徒嘉)와 정자산(鄭子産)’의 이야기, ‘무지(無趾)와 공자와 노자’ 이야기, ‘추남 애태타(哀駘它)’이야기, 그리고 중증장애인 인기지리무신(閵趾支離無脤)과 큰 혹부리 사람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자산이 신도가에게 장애인 주제에 자기 분수를 지키라고 비난하니 신도가는 이렇게 말한다.
활 잘 쏘는 예(羿)의 활 사정거리 안에서 놀 때, 그 안은 모두 화살에 맞을 수 있는 땅, 그런데도 맞지 않았다면 그것은 명(命)일 따름이지, 그런데도 자신이 온전하다 하여 내 발하나 없음을 비웃는 사람이 많았네. 나는 그 때마다 불끈 화를 내다가도, 선생님 계신 곳에 가면 그런 마음을 말끔히 씻고 평소 상태로 되돌아왔네. 선생님께서 훌륭하신 덕으로 나를 씻어 주셨나 보이. 내가 선생님을 19년 동안이나 따르며 배웠지만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내가 ‘외발’임을 아신다고 내비치신 적이 없다네(오강남, 1999, pp.232-233).
장애인이 되고 안 되고는 명(命)일 따름이라 했다. 이 ‘명’(命)은 유학에서 말하는 천명(天命)이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뜻이다. 영화 ‘제8요일’에서 하느님은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루를 쉰 다음 뭔가 한 구석 허전하여 제8요일에 지적 장애인을 내보냈단다. 농학교의 농문화와 농교육 현장을 리얼하게 묘사한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은 제목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여기 일반적인 장애인관에 대칭해서 신도가의 스승은 그가 19년간이나 배웠지만 아직도 자기가 외발 장애인임을 내비치신 적이 없다고 했다.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느끼지 않게 하는 세상 모습(인심)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장애인의 낙원(樂園)은 비장애인의 마음에 있다.
최근 나는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이면서 우리나라 장애인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박경석의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2013)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읽고 느낀 우리의 장애인 현실과 약 2500년 전에 장자가 말한 장애인관 간의 엄청난 간극을 어찌 메워야 할지 난감했다. 박경석은 책 제목에서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고 표현한 걸 보면, 장애인이 되기 전 그의 평범한 삶 혹은 장애인이 되고난 다음 그가 앓은 시련까지 포함해서 장애인운동가로서 살아가는 지금의 자기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일 터. 과연 박경석 교장다운 삶의 전환(transformation)이다. 『장자』 식으로 표현하면,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새가 되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른 격이다.
박경석의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는 책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1960년 대구에서 태어났으니 올 해 54세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평생 박경석 교장이 장애인운동가로 거리에서 투쟁하는 ‘운동가’로 살게 둘 건가? 길게 잡아 그도 60대 중반이 되면 ‘활동가’의 딱지를 떼고 후배들에게 품위 있는 ‘운동가’의 길을 자문해 주는 그런 삶의 여유를 가지게 하는 게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본적 도리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장애인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 우리 사회는 몸으로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고는 장애인의 삶의 질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호소할 게 뻔하다.
그래서 장애인야학 학생들에게는 아직도 “공부가 먼저냐 운동(투쟁)이 먼저냐”라는 화두를 가지고 씨름한다. 그러는 동안 공부가 곧 운동이고, 운동이 곧 공부라는 프락시스가 하나의 틀을 잡아 가길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 이 땅의 특수교육은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의 입장에서 거듭나야 한다. 특수교육은 장애의 교정이 아니다. 장애인 한 사람마다 인격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하는 게 특수교육의 본질이다. 그래서 특수교육은 교육 중의 교육이어야 한다.
『장자』의 장애인관에서는 기본적으로 장애인 당사자의 내면적 깨침 혹은 절대 자유를 중시한다. 그에 비해 오늘의 장애인운동에서는 장애인의 권리 쟁취를 앞세운다. 그래서 장자에게는 ‘소요유’의 삶이 가능했지만, 민주사회에서는 모두가 권리를 앞세우다 보니 기본적으로 사람의 관계가 갈등적일 수밖에 없다. 원칙적으로 문명사회에서는 장애인 당사자의 권리주장 이전에 제도적으로 장애인의 불편함이나 소외를 들어주는 데에 힘써야 한다. 그게 정의사회의 본래 모습이다. 장애인의 삶이 기껏 그들의 권리투쟁 산물로 조금씩 떡 주듯이 떼어주는 것은 문명사회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어찌 보면 장애인에게는 문명사회에서 문명의 혜택도 있지만,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에 그 혜택의 ‘차별’은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에게 ‘문명’(文明)은 양날의 칼이다.
장자는 인간의 절대 자유와 그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인간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한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장애인관에 우리 사회가 한층 접근하게 되는 날, 박경석 교장도 자연인으로서 ‘마음을 노닐게 하는’(心遊) 그런 삶을 향유하게 될 터이다. 우리에게 그 때가 언제쯤일까? (2013.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