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전한 추석
허전한 추석
이번 추석에 큰댁에 차례(茶禮) 지내려 가니 형님들이 한 분도 보이질 않는다. 큰형님은 교통사고로 망인이 된지 벌써 30년이나 되었고, 둘째 형님도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팔순이 넘은 셋째 형님은 병원에 가고 계시지 않는다. 한 때는 형님들의 객기(客氣)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는데. 뜻밖에도 이번 추석에는 4형제 중 막내인 나 혼자 제사에 참례하였다. 어느 날 혼자 남은 허망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들이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 한 분 뿐이라고 서울 고모님에게 전화로 안부를 전하니 누님도 울먹이더란다. 몸이 불편한 큰형수께서 내게 제주(祭酒)를 권하시는 모습이 오늘은 별나게 애처롭다. 이렇게 세월은 무심히 흘러간다. 그야말로 풀잎에 맺힌 이슬(草露)과 같은 인생이다.
차례를 마치고 조카들과 해평(海坪) 산소에 갔다. 윗대 조상부터 조부모,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참배하고 내리 술을 세잔이나 음복(飮福)했다. 형님들이 오시지 않으니 음복술도 모두 내 차지다. 작년에 세운 병모(炳模) 형님 묘비에는 ‘수분지족’(守分知足)이라 적혀 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삶, 욕심 내지 않는 삶이다. 형님은 나이 들며 그렇게 살고자 노력한 분이었다. 소탈했고 삶과 죽음이 하나로 꿰였다. 성묘를 마치고 큰댁에 돌아오니 병원에서 투석(透析)을 끝내고 병형(炳亨) 형이 와계셨다. 퍽 지친 모습이었다. 댁으로 형님을 모셔주고 집으로 내려오는 고속도로가 벌써 정체되고 있다.
우리에게 추석은 민족 대이동의 행렬이다. 잃어버린 고향, 고향을 두고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명절은 허전하다기보다 잔인하기까지 할 터. 그래도 집에 돌아와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추석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어 좋다. 손자(경현; 鏡炫) 손녀(지현; 志炫)가 소란을 피워 야단법석이지만 그게 사람 사는 명절 풍경이다. 그러나 마지막 연휴 날 딸을 고속버스 터미널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니 영 서운하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 나고 죽는 게 모두 윤회(輪廻)다.
하지만 산소에 누워 있는 조상 어른들은 여전히 말이 없다. 병든 몸으로 누워 있는 어른들에게는 후손들이 좀 채로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 말 건네기도 의례적이기 십상이다. 내가 보기에 누구나 누워 있으면 어른 대접 받기 어렵다. 자기 발로 걸어 다녀야 최소한 사람 대접 받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양생(養生)보다는 섭생(攝生)이 중요하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체 게바라의 투사다운 삶은 외경스럽다. 굳이 투사까지는 아니어도 누워서 사느니 아예 산에서 편안히 누워 있는 게 좋다. 그게 살아 있는 후손들에 대한 예의다. 이처럼 망자에게 죽음의 예의는 지엄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든 사람에게는 못 믿을 게 건강이다. 이래저래 이번 추석은 허전한 맘이 든다. 김병하(201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