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에 귀속되는 삶
하늘과 땅에 귀속(歸屬)되는 삶
인간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두발로 땅을 딛고 사는 존재다. 네발로 걷는 짐승은 인간보다 땅에 귀속되는 삶의 모습이 확연하다. 소나 말은 땅에서 나는 풀만 먹고 살다가 그 몸은 인간의 먹거리로 바쳐진다. 농업사회에서만 해도 인간은 땅에서 나는 것으로부터 기본적인 의식주 모두를 해결했다. 그러다가 산업사회에 접어들자 땅에서 나는 석유나 석탄을 채굴해서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모든 게 기계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땅에 의존하는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10%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0% 이상은 산업과 각종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그 만큼 현대인에게 땅에 귀속되는 삶의 형식은 멀어져만 가고 있다.
교통수단도 옛적에는 땅을 밟고 걸어 다니는 게 기본이었지만, 지금은 바퀴를 굴려 타고 다닌다. 그나마 먼 거리는 하늘과 바다를 타고 다닌다. 땅에 발붙이지 않는 만큼 이동 수단은 빠르고 편리해 졌다. 그렇지만 비행기를 탄 사람은 땅을 밟아야 맘을 놓고, 배를 탄 사람은 육지에 닿아야 안심된다. 실제로 열흘이상 군함을 타고 베트남까지 항해를 해보니 그렇게 육지가 그리울 수가 없더라. 제트비행기를 타도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혹은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유럽까지 갈려면 열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 기내에서 우리에 갇힌 원숭이처럼 기내식을 받아먹고 있으면 참 따분하고 지루하다. 땅을 밟고 산책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비행기나 배를 타봐야 실감난다. 어쨌거나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 노자의 이 말은 사람은 일차적으로 땅을 본받고 살아야 하지만, 나아가 사람은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용(中庸)』첫머리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여,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성’(性)이라 했다. 여기 ‘性’은 하늘이 인간에게 품부한 ‘본래성’(本來性)이다. 더욱 적극적으로 동학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 하여, 한울님을 내 몸속에 모시고 있다고 했다. 해서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事人如天)는 게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이것은 인간존엄의 극치다.
다시『중용』(22장)에서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인간에게 품부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爲能盡其性),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至誠)이라야 한다는 게다. 해서 “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誠者 天之道也)이고, 성(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誠之者 人之道也)”(『중용』20장)라 했다. 결국, 『중용』에 의하면, ‘성’(性)은 ‘성’(誠)이다. 어째서인가? 지극한 성(誠)이라야 성(性)이 온전히 발현(至誠能盡性)되기 때문이다. 해서 『중용』에는 천하의 지극한 성(誠)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자기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해야 타인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고, 타인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모든 사물의 성(性)까지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모든 사물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단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화육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온전한 일체가 된다는 게다. 즉, 하늘과 땅에 온전히 귀속(歸屬; belonging)되는 삶에 이른다. 요약하면, 전체 흐름은 지성(至誠)⟶자성(自性)⟶타성(他性)⟶물성(物性)⟶천지화육(天地化育)⟶천지인(天地人)의 삼위일체다.
문제는 생각하고 말한 대로 사는 성실한 삶(즉, 誠之)의 과정이다. 이 과정(process) 속에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의 목적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래야 능히 화(化)할 수 있다(至誠能化)는 게다. 즉, 하늘과 땅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는 게다. 여기 성(誠)은 곧 화(化)의 과정이다. 이 때 ‘화’(化)는 감화(感化)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함의한다. 우리에게 ‘배움’(學)은 화(化)를 얻기 위함이다. 해서 도올 김용옥은 “천지대자연의 ‘성’(誠)의 덕성을 계성(繼成)하는 인간의 성(性)의 소이연이 근원적으로 ‘화’(化)를 이룩하는 데에 있다(김용옥, 2011)”고 했다. 즉, 하늘이 명령하는 인간 본래 성(性)의 소이연이 ‘화’(化)를 이룩하는 경지가 곧 천지인 삼위일체화다.
『중용』에는 ‘화’(化)의 과정으로서 “지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하고는, 마침내 ‘지성여신’(至誠如神), 즉 지성(至誠)은 하느님과 같다고 했다. 지극한 정성으로서의 ’성‘(誠)을 하느님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인간의 ’성‘(誠)하고자 하는 삶 속에 하느님(神) 혹은 천명(天命)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도올은『중용』에서 ‘성’(誠)이라는 개념은 과학과 종교와 윤리와 미학과 정치적 가치를 통합하는 것이라면서, 이런 사상은 서양인들에게는 있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인간과 자연과 신이 뿔뿔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여기 ‘성’(誠)은 천지인(天地人) 삼위일체를 매개한다.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은 하늘과 땅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하나로 뚫리는 체험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
우러러 하늘 트고 잠겨서 땅 뚫었네
몸 펴고 우러러 끝까지 트니 하늘 으뜸 김(기운) 가운데
맘 가라앉혀 잠기고 뚫어서 땅 굴대 힘 가운데 디뎠네.
풀이하면, “내 마음과 몸속에서 위로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 땅을 뚫었네. 몸 펴고 하늘 우러러 끝까지 펴니 하늘 원기 가득하고, 맘 가라앉혀 잠기고 뚫어서 지구를 돌리는 힘 가운데 디뎠네.”이다. 몸을 펴서 하늘 원기와 통하고 마음을 뚫어서 땅 중심에 이른다고 했으니, 다석은 몸과 하늘, 맘과 땅을 연관 지워 몸과 맘을 일체화 했다. 그에게 하늘과 땅과 내가 하나로 되는 것은 몸과 영성(靈性)이 하나로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종교적 깨침의 체험이기도 하다. 박재순은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2013)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석의 천지인 합일사상은 다석 사상의 종합이면서 씨알 사상의 뿌리다. 다석의 천지인 합일사상은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선 인간의 모습과 직결된다. 인간이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서 곧게 선 것은 생명진화 과정의 귀결일 뿐 아니라,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과 하나가 되려는 인간의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철학적인 인간 본성의 나타남이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서서 천지인 합일을 이루는 것이 생명진화 과정을 완성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자, 사람이 사람으로 되는 것이며, 하늘의 뜻과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박재순, 2013, pp.134-135).
다석의 ‘천지인’ 삼재(三才)사상은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과 소통하며 하늘로 가려는 인간의 열망을 담고 있다. 해서 다석은 인간의 삶이 몸 나에서 얼 나로 솟나는 오름을 강조했다. 다석은 한글의 기본모음 ‘‧ ㅡ l'는 천지인 삼재사상을 본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푼다. 박재순(3013)은 “다석은 천지인 합일 체험을 하고 한글철학과 민족종교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연구함으로써 귀일철학에 이르렀고, 그의 귀일철학은 하늘을 지향하는 천지인의 합일철학”이라 했다. 유영모 선생은 평생 하늘을 우러러 천지인의 ’하나 됨‘에 이르려 했다. 그에게는 ’하나‘인 ’하늘‘로 솟나는 곧음이 인생이자 철학이고 종교이다.
과학과 영성의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들(물리학자이자 생태과학자인 카프라, 신부이자 명상가인 슈타인들-라스트, 비교종교학자인 매터스)의 대담을 엮은 『Belonging to the Universe』(1991)에서 슈타인들-라스트는 “내가 세상 전체와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진정한 귀속감(belongings)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구원”이라 했다. 이것은 온 우주에 내가 맞닿아 있으니 내 집에 있는 듯 마냥 든든하고 편안한 마음으로서, 이것은 진정한 귀속감이자 참된 구원이란다. 비슷한 맥락에서 매터스도 ‘은총으로 구원 받았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이란 내면적 체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정한 변모(transformation)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는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지, 나쁜 습관을 버리고 다른 습관을 새로 가지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깊은 내면으로부터 신성(神性)이 밝혀지는 독특한 체험에 가까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체험을 우리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으로 이해합니다(김재희 옮김, 그리스도교의 아주 큰 전환.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14, p.136).
필자가 보기에 유영모 선생의 천지인 합일의 체험은 일종의 종교적 깨침과 같은 것으로 슈타인들-라스트가 말하는 진정한 ‘귀속감’으로서의 구원이자, 매터스가 말하는 내속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신성이 밝혀지는 독특한 체험이다. 메스트가 “그리스도교의 도덕이란 내면적 체험을 통한 진정한 변모(transformation)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 것은 예수가 말한 근원적인 의식의 변혁으로서 메타노이아(metanoia)와 같은 것이다. 천지인 일체감에서 나온 귀속감은 곧 영적 체험의 반영이다. 해서 다석 유영모 선생은 영성적 차원에서 종교와 철학을 내면화한 사람이다.
이런 종교적 체험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에 의해 훨씬 체계적으로 세상에 공표된다. 수운은 『동경대전(東經大全)』에서 ‘시천주’(侍天主)의 ‘모신다’(侍)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로 풀이했다. 즉, 안으로는 신령한 하늘과 합하고, 밖으로는 천지자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운(氣)에 한 치도 어그러짐이 없이 합치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시천주’(侍天主)의 삶은 안으로는 하늘이 명한 본성에 일치하고, 밖으로는 모든 존재들의 심층을 연결하는 기운에 동참하는 그런 삶이다. 그리고 이런 경계에서 한 치도 옮김이 없는 삶이 ‘불이’(不移)의 삶이다.
여기 ‘내유신령’이 인간생명체를 그 내면의 깊이에서 ‘영적 존재’로 자의식하게 한다면, ‘외유기화’는 인간생명체를 그 가장 넓고 높은 ‘우주적 존재’로 혼융된 동체감(同體感)으로 안내한다. 이처럼 몸이 안으로의 신령과 밖으로의 우주적 기화(氣化)를 체험함으로써, 천지의 화육(化育)에 동참하는 영성적․우주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여기 ‘내유신령’과 ‘외유기화’가 하나로 아우러진 상태가 바로 ‘천지인’(天地人)의 삼위일체다. 도올은 『중용, 인간의 맛』(2011)에서 ‘천하지성’(天下至誠)의 장(22장)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종교는 ‘도덕적 하나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한 차원 더 진화한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천지론적 하나님’(Tian-di Cosmological God/ Cosmic God)을 말했다. 동학에서 말하는 ‘한울님’은 바로 이런 ‘천지론적 하나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의 주체적 종교이자 사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슈타인들-라스트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우주와 신 그리고 인간을 하나의 연결망으로 보고, 이 삼자의 결합을 ‘우신인’(宇神人; cosmotheandric)의 원칙이라 불렀다. 그에 의하면, 우주와 인간과의 관계를 빼고 신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없으며, 신과 우주와의 관계를 빼고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게다. 같은 책에서 매터즈는 부분에서 전체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말하면서, “내가 곧 우주에 속한다는 깨달음은 나는 우주 어느 구석에 처박힌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주와 함께 숨 쉬고 함께 일하는 동반자로서의 존재가 된다.”는 게다. 즉, 『중용』에서 말하는 ‘천지화육’(天地化育)에 동참하는 나이고, 그것과 ‘하나’되는 나이다.
나아가 슈타인들-리스트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말하면서, 이것은 당대 사람들의 시대감각 척도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생명력으로 우리가 시대적 영성의 요구에 민감하게 깨어 있느냐 아니냐를 식별하는 표시가 된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이 추구하는 구원이란 “하느님 나라가 결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만을 일컫는 게 아니라, ‘지구 살림’을 제대로 책임질 줄 아는 진짜 한 식구가 된다는 뜻”이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카프라는 “심층생태론의 깨우침과 종교적 영성의 깨우침이 하나로 만나는 것”을 말했다. 그는 생태론적 생활양식이 곧 종교적 영성의 생활이라면, “재활용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적 규범”이라 했다. 놀라운 지적이다.
하늘과 땅에 하나로 귀속되는 존재의 일체감(즉, 천지인의 합일)에서 오는 개인의 영적(靈的) 구원은 동시에 ‘지속가능성’의 세계를 향한 사회적‧우주적 책임으로 연관되어야 한다. ‘구원’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책임으로 뻗어가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구원’ 혹은 ‘해탈’이 체(體)이고, 그것의 사회적 승화는 용(用)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에 편안히 귀일(歸一)하는 나의 삶은 어디쯤 일까? 앎이 삶이 되는 날이 그 날 일터이다. 생태적, 영성적 삶의 복원을 다시 생각한다.김병하(2014.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