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닥터 로제타 홀』(박정희, 2015)
지난여름은 뜨거웠지만, 『닥터 로제타 홀』전기를 읽는 동안은 더위를 잊었다. 이 책은 19세기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이자 의사인 Rosetta Sherwood Hall(1865-1951)의 전기를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박정희 선생이 약 500쪽에 걸쳐 정리한 역작이다. 홀 의사가 우리나라에서 여성을 위한 의료 활동뿐만 아니라, 특수교육의 개척자로서 미친 영향이 지대했으므로 누군가 그 활동을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터여서 반가운 맘으로 책을 폈다. 저자는 책 머리말에서 “조선 여성을 사랑한, 마더 로제타 홀”이 19세기말 조선에서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여성 선교사들은 서구 우월주의에 빠져 우리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고 서구의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여겼던 그 당시의 남성 선교사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 또한 고국에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억압받는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19세기말의 미국여성들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자각하면서 여성평등권 운동을 매우 활발히 펼쳤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은 극단적인 억압 상황에 놓인 조선의 자매들과 강한 연대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다(박정희, 2015, pp.18-19).
‘여성을 위한 여성의 활동’(woman's work for woman)은 당시 미국 감리교 여성선교회의 방침이기도 했다. 하여 홀의 경우 선교사로서 복음 활동보다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극히 비인간적 차별대우를 감내하면서 살아야했던 당대 조선여성들에게 근대적 의료와 교육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써 모더니티의 여명을 열어주었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그녀는 평양에서만 20년 이상이나 여성들을 위해 의료와 교육, 그리고 기독교복음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기에 ‘평양의 오마니’라고 불리기도 했다. 저자는 로제타 홀을 “조선여성을 해방시켰다 하여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과 비유되기도 했다.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보다 더 일찍이 마더 로제타가 평양에 있었다.”고 평했다. 저자의 로제타 홀에 대한 소회에 좀 더 기대어 보자.
로제타는 평양 선교 중에 남편과 딸을 잃고도 그 고통에 좌절하지 않았다. ...(중략) 그녀의 일생은 거룩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완벽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 또한 개인적인 불행에 절망했으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겪는 독선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말년에는 가장 가까이 지내던 형제와 불화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진리를 찾아 고뇌하고 자신을 연단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사회 속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반추했다. 참다운 신앙인의 모범이었다(위의 책, pp.21-22).
위의 글에는 로제타 홀에 대한 평전(評傳)으로서의 함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로제타의 일생을 모두 여섯 장으로 나누어 구성‧전개했다. 즉, 로제타가 처음 평양의 문을 여는 것에서 서장을 열어 그녀가 조선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난다.
1. 첫째 장인 “닥터 로제타 홀, 평양의 문을 열다”에서는 1894년 5월 8일 홀 가족이 평양에 도착한 이후 “평양에 나타난 기이한 손님들”에 대한 평양 민중들의 호기심어린 반응을 보고하고 있다. 이어 “첫 번째 시련과 조선의 바울”에서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온갖 환난을 당했으나, 평양의 문을 여는 데 자신의 몸을 내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김창식을 조선의 바울로 묘사하고 있다. 로제타는 1894년 5월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간 일어난 일을 세세하게 일기에 기록해 두고, 그녀가 마음속 깊이 간직해온 좌우명과 같은 구절을 다시 한 번 되새길 뿐이었다.
“네가 진정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하지 않은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는 일을 하라.”
2장 “닥터 로제타 홀, 하나님의 품에서 자라다”에서는 로제타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그녀가 스무 살 처녀로서 선교사의 꿈을 키우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Rosetta Sherwood는 1865년 9월 19일 뉴욕 주 리버티 농장에서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Rosevelt R. Sherwood)와 어머니 피비 셔우드(Phoebe G. Sherwood)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언행이 일치하는 “믿음의 참다운 본보기”로, 어머니는 자애로우면서도 대쪽같은 “믿음의 든든한 후원자”로 로제타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로제타에게는 지하철도를 타고 노예 농장에서 탈출해 온 흑인 조(Joe)라는 특별한 식구가 있었다. 조는 글을 모르기에 어머니가 보내는 편지와 함께 ‘리버티 리지스터’라는 지역신문을 동봉해서 보내주곤 했다. 그만의 방식으로 이국에 있는 로제타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던 게다. 사실 로제타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아버지보다도 조가 더 자주 언급될 정도로 조를 항상 걱정하고 그리워했다. 이런데서 로제타의 인간미가 돋보인다.
자라는 과정에서 로제타는 “질문이 너무 많은 소녀”로 묘사될 정도로 호기심이 강했다. 어릴 적의 그 호기심은 후에 낯선 곳을 향한 모험심으로 이어졌다.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로제타는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열여섯 살이 되었다. 세상에! 열일곱 번째 해를 맞이하여 다시 일기를 쓰기로 했다. 내가 오래 살게 되어 오십이나 육십의 심술궂은 노처녀가 되어도 꽃다운 열여섯을 기억하도록 생생한 기록을 남겨두고 싶다.” 이때 로제타는 초등 교사를 양성하는 리버티 사범학교(Liberty Normal Institute)에 재학 중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사회생활하며 살겠다는 당찬 생각을 가슴에 지니고 있었던 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교사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교사들보다 임금을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이처럼 1920년 미국연방 헌법에서 여성 참정권을 통과시킬 때까지만 해도 여성차별은 미국에도 엄존했다. 로제타는 1881년에 초등 교사자격증을 취득하였으나,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이듬해에 오스위고(Oswego) 주립사범학교로 진학했다.
로제타는 공립학교 교사로서의 경력에 나름 매력을 가지고 있을 즈음에 1885년 어느 봄날 인도 여성들을 위한 의료선교의 생생한 사례를 챈들러(K. Chandler)부인으로부터 듣게 된다. 특히 챈들러 부인이 “인도 여성들은 몸이 아파도 남성 의사들에게 진찰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로제타는 “그것은 나에게 의료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안내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다.
로제타는 세계 최초의 여성의사 양성대학인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sylvania)에 1886년에 입학하였다. 당시 개교한지 36년이 지난 그 대학은 미국 내에서 최고의 의과대학으로 꼽힐 만큼 발전해 있었다. 1880년대에서 1890년대는 미국에서 해외선교사들을 가장 활발히 파견할 때였다.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의 졸업생 중 해외 의료 선교사는 무려 230명에 이르렀다. 당시 ‘크리스천 여성해외의료선교사’는 진취적인 여성이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합으로 평가되었다. 저자는 이 장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인생의 절정, 이십대에 로제타가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서 배우고 습득한 것은 의학지식에 국한되지 않았다. 로제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진취적인 도시에서 생활하며 역사를 만들어 나가던 선배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 에너지를 자양분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꿈을 키웠다. 이제 그녀의 시선은 지구 반대편의 땅으로 향했다(위의 책, p.116).
2. 셋째 장인 “닥터 로제타 홀, 조선에서 자매들을 만나다”에서는 로제타가 1890년 10월에 조선에 도착한 이래, 1894년 5월 남편 윌리엄 홀과 평양에서 활동하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1890년 로제타는 ‘지는 해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리버티의 가족들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길이 31m, 폭 15.2cm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한양에 도착하기까지의 긴 여정과 도착 후 자신의 생활을 꼼꼼히 기록한 것이다. 이처럼 기록한 자만이 역사가 된다. 조선을 향한 긴 여정에서 로제타는 자신의 소회를 이처럼 밝힌다. “나는 지금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쓰는 낮선 사람들에게로 가지만 ‘사랑은 보편적 언어’라 하였고,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1890년 9월 4일 일기)
로제타는 처음으로 보는 조선에서 길에 바퀴가 달린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운송수단이라고는 말과 가마밖에 없는 걸 보고 놀랐다. 문화의 차이라기보다는 엄청난 문명의 격차를 목도한 게다. 헐벗은 산과 땅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붙어 있는 초가집들이 당시 조선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 한양 지부는 언덕바지(지금의 정동 이화여고 부지)에 이화학당과 교사들의 주택, 보구여관(保救女館)의 입원실과 진료실, 학생들의 기숙사까지 함께 갖추어져 있었다. 여기서 로제타는 방 세 개가 딸린 아담한 한옥 한 채를 ‘아주 기쁘게’ 배당받았다. 선교사들은 1달러에 2000냥이나 되는, 인플레이션이 엄청난 환율 때문에 커다란 돈 궤짝을 방안에 두어야만 했다.
로제타가 조선에 와서 본 미국 북감리교 해외여성선교회의 한양지부 사업은 생각했던 것보다 자리가 잘 잡혀 있었다. 불과 5년 만에 이런 눈부신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의 ‘여성감독’(Lady Bishop)이라 불렸던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여사의 능력 때문이었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머물던 스크랜턴은 로제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닥터 윌리엄 홀이 급여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조선으로 파견해 주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그가 가까이 오기를 원하나요? 아니면 방해가 될 거라 생각하나요? 솔직하게 말해줘요. 더도 덜도 말고 날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해 줘요. 언젠가 그와 정말로 결혼할 예정이라면 그가 조선에 가도록 기꺼이 도와서 당신이 조선을 떠나지 않게 하고 싶어요.
로제타는 자신을 진정으로 배려해주는 스크랜턴 여사의 마음 씀에 감동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은 “우리는 오로지 조선인을 보다 나은 조선인으로 만드는 데에 만족한다. 우리는 조선인이 조선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그 가르침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조선인을 길러내고자 희망한다.”고 했다. 조선인을 일방적으로 서양식으로 바꾸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이 조선적인 것에 긍지를 갖게 하고 싶다는 여사의 희망은 그 심층에서 다른 선교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1909년 10월 8일 스크랜턴 여사가 조선 땅에서 세상을 떠나자 장례 행렬의 인파가 무려 20여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한양에서 일하는 동안 로제타는 내과, 외과, 치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산부인과 등 혼자서 온갖 분야의 병들과 씨름해야 했다. 게다가 간호사도 약사도 없으니 혼자서 체온과 맥박을 재고, 약도 짖고, 주사도 놓고, 수술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겹친 피로 때문에 로제타는 편도선염으로 퍽 고통스러웠다. 항생제 페니실린이 발명된 때가 1928년이었으니, 당시만 해도 편도선염은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극심한 가난 속에 19세기 말 조선의 여인들은 ‘아파서 더 아팠던’ 삶의 멍에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1892년 로제타의 의료 활동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천장이 너무 낮아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손바닥만한 방에 거친 면 이불 조각을 덮고 누워 있는 가난하고 병든 막노동꾼의 아내에게 왕진을 갔다. 이런 식으로 허다한 비참한 광경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로제타는 “나는 조선과 조선인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무척 사랑한다. 나를 이곳으로 보내준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일기에 거듭 적었다. 그녀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일이 바로 자신에게 해준 일이라고 말한 예수의 진정한 제자이고자 했다.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는 교육과 의료지원을 앞세운 선교를 통해 비기독교 국가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지위를 기독교 국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걸 선교방침으로 내걸었다.
로제타는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제일 영어수준이 높은 박에스더, 봉순, 노수잔, 오와가, 그리고 여메례까지 합쳐서 이들에게 생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다섯 명의 학생을 로제타는 ‘내 아이들’(my girls)이라고 부르곤 했다. 여기 ‘내 아이들’ 가운데 박에스더(박점동)는 로제타의 분신으로 처음에는 통역을 주로 맡았으나, 후에 에스더는 로제타의 자매이자 멘티로, 또 동반자로서 평생을 함께 했다. 1892년 무렵부터 에스더는 로제타에게 편지 쓸 때 ‘나의 사랑하는 의사선생님’(my dear doctor)에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언니’(my dearest sister)로 바꿔 적을 정도의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로제타는 캐나다 출신의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 Hall)의 간절한 청혼 끝에 마침내 두 사람은 1892년 6월 27일 한양에서 첫 번째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되었다. 4장은 “닥터 로제타 홀, 그녀의 영원한 사랑”으로 로제타가 윌리엄 홀과 만나게 된 인연과 결혼 후 짧은 신혼생활 끝에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게 되는 참담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두 사람은 세상에 좀 더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는 해외선교라는 목표를 위해 의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교사라는 직업을 거쳐 의대에 진학했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은 언젠가 한 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위의 책, p.243)
1889년 겨울, 윌리엄 홀과 로제타는 뉴욕 빈민가에서 직장동료로 첫 만남의 인연을 가지게 된 게다. 노예해방으로 남부에서 이주한 흑인들과 이민 노동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도시에 빈민지역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윌리엄 홀은 의대 졸업 후에 바로 메디슨 빈민가의 무료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던 중에 로제타를 처음 만났다. 윌리엄 홀은 크리스마스 날 로제타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그때까지 로제타는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독신주의자였다. 그 무렵 로제타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에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는 미국 북감리교 여성회의선교회 책자에 실린 메리 라이언(Mary Lyon) 연설문에 깊은 감명을 받아 해외선교사가 되고자 했다. 선교회의 계약에 따르자면 5년 동안은 독신으로 봉사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하고, 1892년 여름 마침내 비어 있던 아펜젤러의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윌리엄 홀은 평양을 새로운 선교 개척지로 만드는 일을 맡아 거의 평양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윌리엄 홀이 평양을 내지 선교의 최적지로 선택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평양은 변방이 갖는 특수한 성격의 지방이었지만, 외래문화의 수용에는 훨씬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왕조 말기에 이런저런 피해의식에 가득 차 있던 터에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나 마른장작에 불이 붙듯 적극 수용하였다.
마침내 홀 가족과 박에스더 부부, 아들 셔우드의 보모 실비아가 1894년 5월 4일 제물포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일행은 꿈에 부푼 채 5월 8일 평양에 도착했다. 하지만 평양 감사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심한 핍박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평양에서 불편한 상황을 바꿔보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했기에 5월 15일부터 로제타는 환자를 받기 시작했다. 로제타가 진료를 시작한 장소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내지 평양에 세워진 여성전용병원이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장염에다가 이질 증세가 심하여 고생하던 끝에 5월 28일부터 다시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홀 가족 일행이 평양에 정착하고 싶은 맘은 간절했지만, 그 때 남쪽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해서 평양 관군들을 남쪽으로 수송할 기선이 도착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윌리엄 홀도 정세가 어지러운 가운데 영사의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계속 가족들을 머물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94년 6월 6일 불과 한 달 만에 홀 가족은 기선이 정박하고 있던 보산에 도착했다. 6월 10일 제물포에 도착해서 항구에 감도는 전운을 감지하고 로제타는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우리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13척의 군함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고, 수천의 일본군과 청군이 도착해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조선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청은 일본에게 통고하지 않은 채 군사를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본이 또 파병하고 있으니 일본과 청군이 예전의 전쟁터로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이했다. 가엾은 조선! 이 전쟁에서 절멸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로제타, 1894년 6월 21일 일기)
아닌 게 아니라 로제타가 염려한 대로 조선에서 청일전쟁은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동학농민군은 무참히 절멸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는 비운을 겪게 된다. 여기서 우리나라 근대 특수교육 성립기점을 검토하가 위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홀 일가족이 평양에 머문 것은 1894년 5월 8일에서 6월 6일까지 불과 한 달도 채 되질 않는다. 게다가 도착 후 약 일 주일간은 정착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다가 5월 15일부터 로제타는 겨우 진료 일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5월 28일까지는 장염과 이질로 많은 고생을 하다가 다시 진료를 시작했으나, 열흘도 채 되지 않아 6월 6일에는 평양에서 철수를 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로제타는 윌리엄 홀이 전도한 첫 신자인 오석형 씨의 딸인 맹여아 오봉래를 만나게 되고, 봉래를 보자 처녀 시절에 맹학교에서 볼런티어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로제타는 봉래에게 글을 읽고 쓰는 개인지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지도의 시도였지 제대로 그 일을 수행할 여건이 되질 못했다.
한편, 1894년 9월 15일에 발발한 평양 전투는 청일전쟁의 분수령이 되어 일본이 승기를 잡고 청군은 패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는 더욱 가시화되었다. 평양에서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아직도 가까이 있었다. 윌리엄 홀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환자들을 치료하고, 광성학교를 다시 열고, 매일 예배를 인도하기에 바빴다. 11월 10일은 셔우드의 첫돌이었으나, 아버지는 평양에서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다. 윌리엄 홀은 전쟁터였던 평양의 비위생적인 환경에 저항할 힘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호전된 듯 보였던 윌리엄 홀의 건강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1894년 11월 24일 토요일, 석양 무렵 윌리엄 홀은 영원한 안식일을 찾아 이 세상을 떠났다. 로제타는 셔우드의 육아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는 혼자 내방으로 와서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셔우드를 안고 셔우드와 배안에 있는 또 다른 유복아이를 위해 내가 용감하고 강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로제타, 1894년 12월 10일 셔우드의 육아일기 중에서) 이 대목에서 필자의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너무나 아쉽고 애통한 두 사람의 이별이다. 2년여 결혼생활 중 한 번도 안정적으로 두 사람만의 집을 가지고 생활해 본 적이 없었다. 잠시의 만남과 그 만남보다 훨씬 긴 이별이 연이어 교차하는 애절한 세월이었다.
1894년 12월 7일 로제타와 외아들 셔우드와 박에스더는 제물포를 떠나 나가사키로 가서 호놀룰루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더차이나(The China) 호를 타기로 했다. 이듬해 1월 14일 일행은 마침내 리버티의 고향집에 도착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거의 5년 만에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을 안은 만삭의 딸을 맞이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마침내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안긴 로제타의 마음은 어땠을까.”(같은 책, p.324)
3. 제5장 “닥터 로제타 홀, 다시 평양으로”에서는 로제타가 미국에 머문 동안 한 일과 다시 평양에서 펼친 일들을 기술하고 있다. 로제타가 고향집에 도착하고 나흘 뒤, 1895년 1월 18일 딸 에디스 마거릿(Edith Margaret)이 외가에서 태어났다. 로제타는 고향 리버티의 병원에서 일하면서 윌리엄 홀의 지인들에게 부지런히 편지를 썼다. 남편의 1주기에 그에 대한 추모 문집을 발간할 계획으로 그들에게 원고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는 평양에 남편의 이름을 딴 기념병원을 짓는 일을 추진하고자 했다. 남편의 추모비를 세우는 일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지원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병원을 짓는 게 남편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여겼다.
한편, 로제타는 그 해 여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시댁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윌리엄 홀의 가족사(家族史)를 조사했다. 기록정신이 투철한 로제타는 이미 스물한 살에 자신의 가족사를 썼던 경험이 있었다. 지금 로제타가 기록하는 윌리엄 홀의 가족사는 일찍 아버지를 여윈 아이들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기도 했다. 로제타는 셔우드의 육아일기에 홀 가문의 4대조까지 기록을 남겼고, 마거릿의 육아일기에는 친할머니인 볼트 가의 4대조까지 가계를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로제타는 어머니로서 아이들에게 조상의 뿌리를 알리고자 했던 게다. 우리네의 형식적인 종중족보에 비하면 훨씬 실질적인 조상 섬김이자 뿌리 찾기이다. 여기서 로제타의 기록정신이 한 번 더 돋보인다.
1897년 2월 1일 마침내 평양에 ‘홀 기념병원’(기홀병원)이 개원되었다. 병원 건물은 선교회에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 홀 의사가 남긴 돈에 로제타 자신의 기부금, 그리고 조선과 고국에 있는 친절한 지인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조선식 기와집으로 지어진 이 병원은 12m⨯18m 크기로 대기실, 진료실, 약제실, 의사 사무실로 배치되었다. 이 병원은 개업일(2월 1일)로부터 4월 27일까지 약 3개월 간 1,334명이 외과적 치료를 받고, 1,011명이 일반적인 치료를 받을 정도로 병원 구실을 톡톡히 감당했다. 그해 8월에는 마침내 『윌리엄 제임스 홀의 생애(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 Medical Missionary to the Slums of New York, Pioneer Missionary to Pyong Yang, Korea)』가 출판되었다. 이 책의 수익금은 모두 평양 홀 기념병원의 운영 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미국을 떠나 1897년 11월에 다시 한양에 머물러 4개월 이상 병원 일을 하던 중 1898년 5월에 약 4년 만에 두 번째로 평양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해 미처 짐도 풀 겨를 없이 이질로 고생하던 딸 마가렛도 허망하게 하늘나라 아빠 곁으로 가고 말았다. 저자는 “이디스를 가슴에 묻다”의 말미에서 이렇게 적었다.
로제타의 첫 번째 평양행은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로 나선 여행이었다. 그렇게 평양 선교를 위해 남편을 바쳤다. 그리고 그 엄청난 상실을 메워주웠던, 정말 소중하고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던 딸, 삶의 희망이자 보람이었던 이디스를 다시 평양에서 잃었다.
평양! 평양은 이제 로제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시작한 여행의 종착점이자 세상의 끝이었다(위의 책, pp.358-359).
이제 로제타가 슬픔을 견뎌내는 유일한 길은 일에 몰두하는 것뿐이었다. 로제타는 딸의 죽음이 의사인 자신에게 전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찾았다. 그녀는 곧바로 이디스 마가렛을 기념하는 어린이 병동을 설립하여 어린이들이 입원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마련하기로 했다. 마침 여성해외선교회에서는 여성전용 병원을 짓기 위해 기금을 조성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이 여성전용 병원 옆에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을 붙여 짓는 계획을 세웠다.
이디스는 조에게 받은 작은 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로제타가 열어보니 그 상자 속에는 2달러 12센트가 들어 있었다. 로제타는 여기에 25달러를 보탠 뒤 고국에 있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이디스 마가렛 병동 건립 계획을 설명하고 기부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1899년 1월 17일 이디스의 네 번째 생일 전날 밤 로제타는 사촌에게서 온 편지를 전달 받았다. 편지에는 온 가족이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는 대신에 이디스 병동 건축 헌금으로 150 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로제타는 그것이 이디스의 네 번째 생일 축하선물로 생각되었다.
1900년 1월 18일 하늘나라로 떠난 이디스의 다섯 번째 생일을 기념해 새 건물에서 한국 소녀들에게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초대된 일곱 명의 소녀들 중에는 맹인소녀가 하나 끼어 있었다. 아마 그 맹인 소녀는 로제타에게 뉴욕식 점자를 배운 첫 번째 학생인 오봉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 마지막 6장에서 저자는 “1899년, 로제타가 병원 일과 선교 활동, 그리고 특수교육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박정희, 2015, p.388)라 한 것을 보면, 1899년에 로제타는 봉래를 비롯해서 맹소녀들에게 특수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 5월 로제타는 이디스의 사망 2주기를 한국에서 맞이하는 걸 견디지 못하고 셔우드를 데리고 상하이로 휴가를 떠났다. 다시 평양에 돌아와서 1900년 6월부터 로제타가 가장 공을 들인 일은 맹인 소녀들에게 특수교육을 실시하는 일이었다.
막 완성된 이디스 마가렛 병동의 한 쪽에 맹인 소녀들의 교육을 위한 교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한 게다. 이 무렵 로제타는 맹여아들에게 점자지도를 통해 글을 읽고 쓰는 수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로제타는 1901년 6월 그간 진료소와 병원운영, 선교여행과 전도부인 양성, 맹학교 강의 등으로 너무 지쳐 셔우드를 데리고 다시 미국행 여행길에 올랐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의외로 긴 여행을 거쳐 1903년 3월에야 다시 한양에 올 수 있었다. 저자는 “로제타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기까지 보낸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대변하듯 지난한 여행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며 점점 더 하나님과 가까워졌듯이 여행이 지체될 때마다 로제타 또한 하나님과 가까워졌을 것”이라 했다.
마지막 장 “닥터 로제타 홀, 치유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라”에서는 로제타가 조선에서 혼신의 열정으로 이룬 사업들을 전반적으로 기술하고, 조선에서 43년의 생활을 청산하고 노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적고 있다. 로제타는 외아들 셔우드에게만은 ‘세상에 가장 강한 어머니’이고자 했다. 1900년 6월에 처음 문을 연 평양외국인학교에 만 일곱 살인 셔우드도 입학을 하였다. 뉴욕 주 초‧중등학교 교사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던 로제타는 평양외국인학교의 교육과정을 뉴욕 주 교육청의 규정에 따라 개발했다. 그 결과 이 학교 졸업생들은 미국의 고등학교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 하여 평양외국인학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자녀진학을 희망하는 명문교가 되었다.
1906년 셔우드가 열세 살 때 화재로 광혜여원과 마가렛 병동이 전소되었다. 로제타는 목재건물이 화재로 허망하게 사라지자, 내화성이 강한 벽돌과 화강암으로 새 병원을 짓기로 했다. 이 때 로제타는 열네 살짜리 셔우드에게 파격적으로 공사 감독을 맡겼다. 이 공사과정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었지만, 어쨌든 1908년에는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번듯한 병원이 완성되었다. 셔우드가 열다섯 살이 되자 로제타는 아들에게 경제적 자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길 바랐다. 사실 윌리엄 홀이 남겨준 생명보험으로 셔우드의 학비 걱정은 없었을 것이나, 로제타는 셔우드가 돈을 현명하게 관리하고 투자하길 원해 그 생명보험금의 일부를 떼어주었다. 셔우드는 그 돈을 밑천으로 건축업을 해서 꽤 많은 이익을 남겨 자신의 학비에 보탤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셔우드는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였다.
1910년 4월에 로제타가 그처럼 정성들여 한국최초의 여의사가 된 에스더(박점동)가 결핵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태어날 때부터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던 에스더의 죽음은 셔우드에게 너무도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결핵은 가장 흔하면서도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에스더의 죽음을 계기로 셔우드는 결핵전문의가 되어 결핵퇴치에 헌신하고자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훗날 셔우드는 우리나라 첫 결핵요양원인 해주구세병원을 설립하고, 크리스마스실 발행을 주도해서 결핵퇴치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셔우드는 우리나라에 결핵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가을에 국가포상을 받기위해 90이 넘은 노령에도 부인과 그 아들(로제타의 손자) 일행이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 방문길에 대구대 이태영(李泰榮; 1929-2005) 총장은 로제타의 특수교육사업을 특별히 기념하는 의미로 셔우드 가족 일행을 초청하였다. 이 때 대구대 대명캠퍼스 사범대 건물을 ‘로제타 셔우드 홀 기념관’으로 명명하여 현판식을 가지고, 이 건물 내에 로제타 홀 ‘역사자료실’도 따로 마련하였다. 저자는 아들 셔우드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결핵 청정국가로 다가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이가 바로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다. 현명한 어머니 아래서 셔우드는 어머니 못지않게 창의적이고 기업가적인 면모를 겸비한 훌륭한 의료선교사로 자라났다."(박정희, 2015, p.397). 그 어머니에 그 아들(母傳子傳)이다.
4. 이 책 6장 2절에서 저자는 “한국 특수교육의 어머니, 로제타”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특수교육의 기원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밝힌다.
로제타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특수교육을 시도한 때는 1894년 평양에 첫발을 디딘 직후였다. 평양에서 윌리엄 홀의 첫 개종자였던 오석형에게는 ‘봉래’라는 시각장애아 딸이 있었다. 오석형은 로제타가 처음 평양에 갔을 때(필자주: 1894년 5월 초순) 관청에 끌려가 박해를 받았던 평양의 초기 신자 중, 한 명으로 나중에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원래 딸의 한자 이름은 ‘복녀(福女)’이고 세례명은 ‘프루던스’(Produnce)인데, 로제타는 ‘Pongnai'라고 표기했다(박정희, 2015, p.398).
여기서 “로제타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특수교육을 ‘시도’한 때는 1894년”이라 했다. 로제타가 평양에 도착한 직후 오석형의 딸 맹여아 오봉래를 처음 접하고 자신이 뉴욕맹학교에서 보런티어로 활동한 경험을 회고하면서 봉래에게 개인지도를 하고자 했을 게다. 그러나 당시 위급한 평양의 정황에 미루어 볼 때, 로제타가 봉래에게 체계적으로 점자지도를 실시해 볼 여유가 거의 없었을 터이므로 ‘시도’라는 표현을 쓴 게다. 이것을 한국특수교육의 ‘시작’ 기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데에는 보는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자연히 밝혀질 게다. 평양에 처음 도착한 후 맹여아 봉래를 처음 만났을 때, 로제타의 소회를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로제타는 봉래를 처음 만났을 때 무척 기뻤다. 신자의 딸이었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고도 특수교육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호기심으로 점자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기름을 바른 한지에다 바늘로 점을 찍어서 아주 초보적인 한글점자를 만들어 보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제타는 심화된 전문지식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위의 책, p.399)
위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에 호기심으로 점자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기름을 바른(먹인) 한지에다 바늘로 점을 찍어서 아주 초보적인 한글점자를 만들어 보았다.”고 한 것을 보면, 봉래에게 그냥 막연히 개인지도를 시도한 게 아니라 점자지도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로제타 자신이 아직 한국말이 서툴고 한글을 익히던 중이어서 한글점자를 고안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게다. 로제타의 특수교육에 대해 이어지는 관심과 노력을 보자.
1894년 남편을 잃고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로제타는 점자 시스템을 제대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그 당시 점자 시스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1829년 프랑스의 맹인 루이 브라이유(Louis Braille)가 개발한 것과, 1860년대 뉴욕맹학교 교장 윌리엄 웨이트(William Wait)가 개발한 뉴욕 포인트 시스템이었다. 로제타는 두 개의 점자 시스템을 분석한 뒤 뉴욕 포인트가 한글에 더 알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마도 자신에게 더 익숙한 것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던 듯싶다.
...(중략) 1897년 미국에서 돌아와 보구여관에서 일하는 동안 로제타는 점자책을 만들었다. 그녀는 한국어 입문서와 십계명을 기름 먹인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기록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로제타는 이 교재로 봉래를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래가 점자로 읽고 쓰기를 배우는 과정은 더디고 힘들었다. 하지만 점자의 구조를 터득한 뒤부터는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게 읽기를 배웠고, 곧 받아쓰기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로제타는 나중에 봉래에게 뜨개질도 가르쳤다(위의 책, pp.399-401).
위에서 보면, 로제타는 뉴욕식 한글점자를 직접 개발했다. 이것은 로제타의 특수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단적으로 반영한 성과다. 로제타는 1897년 11월 미국에서 돌아와 한양의 보구여관에서 약 5개월 가까이 일하는 동안 틈틈이 짬을 내어 자신이 고안한 뉴욕식 한글점자체제에 따라 점자교재를 직접 개발한 게다. 로제타가 1898년 5월에 다시 평양에 왔으나, 오자마자 딸 에디스 마가렛을 잃게 되어 너무 마음의 상처가 컸었다.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일에 열중하기로 한 로제타는 1898년 후반에 봉래의 점자지도에 몰입하게 되고, ‘더디고 힘든 과정’을 겪고 봉래는 아마 빨라도 그해 연말이나 1899년 초반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을 게다. 이하에서 로제타에 의해 이어지는 특수교육사업을 좀 더 보자.
봉래가 읽고, 쓰고, 뜨개질까지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로제타에게 아는 맹인 소녀들을 소개했다. 그리하여 1900년 1월, 맹인 소녀 4명과 함께 이디스 마거릿 병동의 방 한 칸에서 집단적인 특수교육이 시작되었다. 1903년에는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정진여학교에 맹인반이 개설되었고, 로제타는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평양맹학교 교장으로 임명 받았다(위의 책, p.402).
봉래가 점자를 익혀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본 사람들은 감탄했다. 일반여아들도 대부분 문맹인 터에, 앞 못 보는 맹여아가 글을 해독하고 쓸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너도나도 다투어 맹여아를 로제타에게 소개시킨 게다. 하여 1900년부터는 마가렛 병동의 방 한 칸에서 4명의 맹여아에게 집단적인 특수교육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봉래는 점자지도 교생(pupil-teacher)으로 투입되었다. 이어 1903년에는 평양 정진여학교에 맹여아 특수학급을 설치하고, 로제타는 그 책임자가 되었다. 이것이 학교교육으로서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효시가 된 게다.
평양에서 특수교육 수요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미국 북감리교 해외선교부에서는 1908년에 특수교육을 전담할 전문교사로 내단 록웰(Nathan Rockwell) 선교사를 보내왔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전국을 돌며 맹인 실태조사에 나서는 한편, 맹여아를 찾아서 특수교육을 받게 했다. 이처럼 맹교육이 자리를 잡아가자 로제타와 록웰 선교사는 농교육 쪽으로도 관심을 돌렸다. 이 일을 위해 이익민과 그 아내를 중국 치푸에 있는 농학교에 파견하여 농교육 방법을 익혀오게 했다. 당시 농교육의 모습을 「대한그리스도신보」(1911.5.30)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남녀 게암학교(필자주:‘계음학교’일 것임)는 금춘에 세상을 떠난 록웰 목사와 홀 의사의 부인이 열심히 주선한 결과로 1910년에 처음 설립한 학교인데, 지금은 해외에 가서 벙어리 가르치는 법을 졸업하고 돌아온 이익민 씨와 그 부인이 이 학교에서 가르치매, 학도는 남자 벙어리 4인과 여자 벙어리 3인이다. 그 가르치는 방법은 성대를 집어 발음케 함이요, 국문의 자모음과 합음법을 가르쳐 손가락으로 모든 말을 통하여 온갖 글을 읽게 하니 이것은 조선에 처음 있는 일이라 보는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함을 마지 아니 하다더라(위의 책, p.405에서 재인용).
여기에 주목할 것은 농교육의 시작 년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농교육은 1908년에 시작된 것으로 일부 자료(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1926)에는 보고하고 있다. 필자는 이익민 내외가 중국에서 농교육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1908년이고, 실제로 평양에서 농교육이 시작된 것은 1909년 일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위의 기사에는 농교육을 “1910년에 처음 설립한 학교”로 보도하고 있다. 게다가 학생실태와 교육방법까지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어, 농교육 시작 년대 혹은 농학교 설립 년대는 별도로 전후 맥락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직접 당사자인 로제타 홀 자신의 보고에 의하면, 1909년에 농교육이 시작 된 게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 부분은 김칠관 선생의 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런 특수교육사업을 기반으로 로제타는 1914년 8월 아시아 최초로 특수교육(맹‧농교육)전문가들의 국제회의를 조직하였다. 한국을 비롯해서 일본, 만주, 중국 본토에서 온 특수교육 전문가들이 평양 모란봉에 모여서 “선한 의지를 드높이고 우호적인 연대를 도모하기 위해” 서로 발표하고 토론회를 가졌다. 이것은 그간 로제타가 추진해온 평양의 특수교육사업이 아시아 지역에서 하나의 모범사례가 된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최초의 국제회의라 할 수 있다.
5. 이어 “에스더, 의사가 되어 돌아오다”에서는 에스더가 미국서 어렵사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에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금의환향한 것을 기술하고 있다. 1909년 4월 28일은 에스더와 그 가족들에게 더 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 날이었다. 경희궁에서 박에스더, 하란사, 윤정원 등 세 사람을 위해 관민합동으로 “외국 유학생 합동환영회”라는 전대미문의 큰 행사가 열린 게다. 하지만 에스더는 이듬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에게는 한 가족처럼 지내온 에스더의 죽음이 또 하나의 엄청난 충격이 되었던 게다.
로제타는 한양에서 선교를 시작하고 그 끝을 맺었지만, 20년이 넘게 평양에서 일했다. 매리 윌턴(Mary Wilton, 1934)이 정리한 소책자에 로제타는 “평양의 오마니이자, 조선 여성을 해방 시킨 노예 해방인”으로 묘사될 정도였다. 1915년 평양에서는 “홀 부인 조선 온지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로제타는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신실하고 열정적인 봉사로 일관한 25년 동안 수십만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질병의 고통과 시달림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부인의 고결함과 이타적인 모습에 감명 받은 그들 중 수천 명은 예수님께로 인도되었다. ...(중략) 아무리 더러운 병이라도 환자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친절했으며, 환자의 피부이식을 위해 자신의 피부를 떼어내기조차 했다. ...(중략) 평양 여성들에게 가장 슬픈 소식은 아마도 닥터 홀과 헤어진다거나 병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일 것이다(위의 책, pp.439-440).
이것은 그냥 인사치례의 보도가 아니라, 고통 받는 평양 여성들의 민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의사로서 로제타가 일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과제는 조선인 자체의 여성의료인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로제타는 조선에 오자마자 여성의료인 양성을 구상하고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정리한 메모 ‘한국 여자의학교의 역사’(History of the Korean Women's Medical Institute)에는 자신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먼저 여성의학교육을 시작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로제타는 조선에 오자마자 혼자서는 감당하기에 턱없이 많은 여성 환자 수 때문에 미국 여성해외선교본부에 여의사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의사수급은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고, 에스더 이후로는 한국인 여의사도 양성되지 않았다.
1921년부터 로제타는 동대문 부인병원 원장 직을 맡았는데, 그녀가 일터를 평양에서 한양으로 옮긴 이유도 여의사 양성에 주력하기 위함이었다. 1926년 로제타의 회갑연이 열린 자리에서 자신의 간절한 소망으로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1928년 5월 14일 로제타를 중심으로 60여 명의 유지들이 모여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발기했다. 그 해 9월에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마침내 개소되어, 예과생 17명이 입학했다. 강습소 운영경비 일체는 로제타가 책임졌고, 뜻을 같이하는 의사 12명이 무보수로 학생들에게 강의를 제공했다. 교육과정은 예과 1학기에 본과 4학기로 정했다.
1933년 9월 로제타는 부소장 길정희에게 의학강습소 경영을 위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로제타는 열심히 노력하는 한국인 친구들이 여자의과대학을 조만간 만들어 줄 것으로 확신했다. 그 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우여곡절 끝에 민족교육자 우석 김병익이 30만원을 쾌척함에 따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 절은 “조선에서 보낸 43년, 그리고 집으로”라는 제목으로 끝을 맺는다. 1933년 10월 2일에 로제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른다. 1890년 가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발을 디딘지 어언 43년의 세월이 흘러간 게다. 메리 라이언이 남긴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는 일을 하라”는 말을 어김없이 실천해 온 삶의 여정이었다. 로제타는 이 말에 따라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을 하기도 했고, 하고 싶은 일을 접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로제타가 조선을 떠나기 직전1933년 9월 23일에는 아들 셔우드가 설립한 해주 결핵요양원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로제타 예배당’의 봉헌식이 열린 게다. ‘로제타 예배당’은 해주 해변의 자갈로 벽을 올리고 빨간 기와로 지붕을 단장한 아름다운 예배당이다. 「서울프레스」기사에는 “예배당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여도 로제타가 행한 봉사의 백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한다.”고 썼다. 로제타가 조선을 떠나기 직전 「동아일보」(1933.4.11)에 기고한 내용에는 “서양이 아직도 동양에서 더 배울 것이 있다”면서 조선의 흰옷문화를 예찬한다. 흰옷은 더러워지거나 전염이 되었을 때는 삶을 수 있으므로 그 옷감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극히 싸고 깨끗하게 소독할 수 있어 좋단다. 흰옷은 햇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강해 살균효과도 크고, 결핵 발생률을 낮추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로제타는 생의 말년까지도 세상의 흐름을 주시하는 삶의 모습을 보였다. 1948년 6월 9일에 그녀는 ‘평화를 위해 집결하라(Mobilize for Peace)’는 기독교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서약했다. 여든세 살의 할머니가 “기독교인으로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UN 활동을 지원하며, 세계적으로 시민권의 향상과 경제정의를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아름다운 노년의 단면이다. 귀국 후에도 일흔여덟 살까지 10년 동안 개업의로 일했던 로제타는 1943년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고향 리버티를 떠나 뉴저지의 오션 그로브(Ocean Grove)에 있는 은퇴한 감리교 여성선교사들의 집, ‘벤 크로프트 타일러 홈’을 마지막 거처로 삼았다.
1951년 4월 5일에 로제타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한국전쟁의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던 어느 날 그렇게 로제타는 일생을 마감한 게다. 인도에서 결핵퇴치 사업을 하던 중 외아들 셔우드는 양로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아무런 통증도, 고통도 없이 평화롭게 잠들었으며, 당신의 하늘나라 집에서 깨어났습니다.” 누구나 잘 살면 잘 죽는다. 다행히 토론토에서 큰손자 윌리엄 홀이 가족을 대표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로제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리버티를 방문한 뒤, 영혼이 먼저 와서 기다리던 한국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남편과 딸 곁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그곳은 양화진(樣花津) 선교사 묘원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로제타는 필립스 브룩스와 마찬가지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으며,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역사 속에서 로제타는 조선 자매들의 절박한 울부짖음을 듣고 달려가는 소명을 받았고, 그 일에 소임을 다함으로써 인류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닦는 데 작지 않은 벽돌 몇 개를 놓았다(박정희, 2015, p.482).
필립스 브룩스는 “미래 세대가 천국이라는 도시에 이르는 보도를 닦는 데에 작은 벽돌 하나 만이라도 놓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이제 필자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순결한 삶과 그 영혼의 안식을 위해 라인홀드 니버(R.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를 헌사(獻辭)한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중략)
당신의 뜻에 순종할 때
당신께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울 것을 믿게 하셔서
이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저생에서는 다함이 없는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하소서.
6. 이상에서 박정희 지음 『닥터 로제타 홀』(2015) 책 전체를 리뷰하면서 약간의 해석을 가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총평을 미시적으로 본 로제타 홀 개인의 논평과 거시적으로 본 미국의 극동정책과 프로테스탄티즘을 매개로 한 해외정책으로 나누어 간단히 논의하고자 한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유족한 가정에서 태어나 엄격한 전문성을 요하는 의과대학을 성공적으로 졸업하고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 미개한 아시아지역에, 그것도 조선을 택하여 사역(使役)을 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네 문화, 특히 내 기준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니 미국의 개척문화, 종교적 사명감, 개인적 성향이나 기질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작용한 결과 로제타가 한국에 온 게 아닌가 싶다. 구한말 우리나라에 도래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별난 사명감으로 뭉친 사람들이지만, 개인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함께한다. 근데 필자가 보기에 로제타 홀은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개신교선교사로서 공적 책임이나 사명감이 유독 별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어찌 보면, 개인적으로 로제타는 불행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어린 딸을 모두 평양에서 잃어버렸다. 그녀는 ‘평양 오마니’로 불리었다지만, 평양은 그녀에게 잔인한 곳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그처럼 공들여 최초의 조선여의사로 길러낸 박에스더 마저도 요절하고, 그녀의 첫 맹인 제자인 오봉래도 먼저 저세상으로 가버렸으니 그 슬픔이 오죽했겠는가. 쓴맛이 인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가혹한 쓴맛이었을 게다.
로제타는 의사로서 조선에 끼친 영향도 막중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우리나라 특수교육 선구자로서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막중하다. 그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을,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인간승리의 감동적 특수교육 씨앗을 이 땅에 뿌린 게다. 그 씨앗의 열매가 지금의 한국특수교육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로제타의 순결한 삶이 긍정적으로 끼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프로테스탄티즘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결코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홍이섭(洪以燮) 교수는 “한국에 있어 프로테스탄티즘을 매개로 한 아메리카 문화의 영향”(1984)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개신교사에 있어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정책이 어디까지나 선교사(宣敎史) 자체로 다루어진 나머지 한국사 전체 인식선상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점이 후일에 큰 문제점을 남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 문제점으로 그는 초기에 한국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위한 역사적 추이에 결부시킬 미국의 극동정책과 연관되어 있음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박순경 교수는 “한국 민족과 기독교의 선교문제”(1986)를 사회과학적 인식에서 다루면서 교육선교는 서양문명의 도입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교육선교에 내포된 반민족적 요인이 간과되어왔음을 지적한다.
최근 필자는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2009) 라는 책을 읽으면서 차원이 다른 ‘깨달음’의 세계와 현실적 ‘역사문제’를 어떻게 연관지을 것인지 여전히 숙제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현응은 “깨달음과 역사의 조화로운 삶의 모습이야말로 열린 보살의 역사적인 삶”이라 했지만, 솔직히 아직 잘 와 닿지 않는다. 19세기 말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래, 그리고 미국의 선교정책과 해외정책의 얽힘은 21세기 우리의 역사적 삶에서 다시금 엄중히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닥터 로제타 홀』서평은 어떻게 쓰일지 궁금하다.
미국과 그에 편승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이식이 한반도에 미친 빛과 그림자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