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우유를 꺼내 먹을 때 우선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게 일상 버릇이다. 근데 내 삶의 유통기한은 도대체 언제까지인가? 셈법이 좀 복잡해진다. 우리가 우유를 살 때는 유통기한부터 확인하고 가능하면 그 기한이 하루라도 긴 쪽을 택한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는 가차 없이 버리거나 조금 맛을 보고 상하지 않은 상태면 그냥 하루 이틀정도 연장해서 먹어치운다. 우리 집 경우 나는 전자에 속하고 집사람은 후자에 속한다. 싱싱한 우유를 먹고자 하는 기준에서 나는 엄격한 반면 집사람은 좀 관대한 편이다. 평소 일처리 방식은 그 반대인데, 음식 버리는 데엔 집사람의 절제가 돋보인다.
교수로서 내 삶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인가? 법적으로 따지면 65세 정년과 더불어 공식적인 유통기한은 끝난 게다. 누가 정년 한 교수는 ‘폐물교수’라고 농담 삼아 호칭하는 걸 들었다. 당사자 입장에서 결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정년이 되어 퇴직한 교수이니 ‘폐물교수’래도 그냥 웃고 넘길 수밖에 없다. 듣기에 따라 퇴직교수=폐물교수는 지독한 모독이다. 퇴직하고도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왕성하게 지적활동에 열성을 보이는 교수도 있다. 이론물리학자인 장회익 교수는 정년한지가 10년이 넘었지만, 누가 자기에게 학문의 최전성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대답할 거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이라기보다 미래의 어느 날이 될 것이라 했다. 그만큼 꾸준히 공부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일 터.
나는 해방둥이인데, 아버지께서 막내둥이가 인간구실을 제대로 못할까봐 2년이나 늦게 호적에 올려놓았다. 1947년 5월 5일로 호적에 등재된 내 생년월일은 완전히 가짜인 셈인데 법적으로는 그게 버젓이 진짜로 통한다. 공적으로 기록된 게 언제나 정사(正史)가 된다. 정년을 앞두고 나는 혼자 속으로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당초에 나는 그간 교수 노릇한 기간이 실제 나이에 비해 많아 벌써부터 연금 수령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집사람에게 내 실제 나이대로만 근무하고 그만 정년 했으면 싶다고 했더니, 좋을 대로 하란다.
근데 막상 결정해야할 시점이 임박해지니 내 맘이 슬슬 변하는 게다. 그러는 중에 정년하신 교수님께서 “그냥 법대로 하지”라고 일러주는 말이 귀에 속들어왔다. 그래 법대로 해야지. 그렇게 결론은 슬그머니 굳어졌다. 게다가 아직 건강하고 강의도 농익어 가고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맹렬하게 떠받쳐 준다. 못 믿을 게 사람 맘이다. 교수로서 내 삶의 유통기한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노력과 성과가 있어야 할 게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뭘 내놓겠다고 욕심 부릴 처지도 아니지 않는가. 늘그막에 노욕은 치명적 망신이다. 그래서 나이 값하기 쉬운 게 아니다.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는 1920년 생으로 90대 중반을 넘기고도 작년에 책을 냈으니 놀랍다.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자기 인생의 전성기는 65세에서 75세까지였다고 했다. 어째서 일까? 내 생각엔 현직 교수로 정년하고 10년간 오히려 자유로우면서 왕성하게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게다. 그러다가 70대 후반부터는 아무래도 기력도 떨어지고 사회적 활동 기회도 줄어들기 마련일 게다. 그러고 보면 내게도 지금이 내 생의 전성기인가? 외국의 어느 사회학자도 대개 일생을 통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때가 70대라고 보고했단다. 정년 후에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부담 없이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 주변에 김정권 교수(대구대 명에교수)는 금년에 팔순을 맞아 『길을 모르는 사람의 길』이라는 시집과 성경 통독 가이드북인 『맛있는 1189, 행복한 298』이라는 책 두 권을 출판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역시 금년에 팔순을 맞는 김보경 교수(경북대 명예교수)도 정년 후 세 번째 책으로 작년에 『무념치유』라는 선불교와 행동심리학을 접목한 저서를 내어 주목을 끌었다. 그는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들에게 이런저런 상담활동과 심리치유 서비스를 하고 있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70대 후반의 이동렬 교수(웨스턴 온타리오대학 명예교수)는 그간(약 30년간) 신작 수필집 11권을 내고, 정년 후 근년에는 건강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자신의 마지막 수필집으로 『꽃다발 한 아름을』금혼 기념으로 최근 출판했다. 이 책 서문에서 “이제는 아무리 다르게 써 보려고 해도 거기서 거기,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서 절필을 선언했으나, 두고 볼 일이다.
내가 보기에 이분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정년 이후에도 삶의 유통기한을 잘 활용하고 있다. 공적인 직업을 통한 유통기한이 끝나고 15년 혹은 10년을 넘기고도 제2의 유통기한을 향유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지복(至福)에 속하는 삶이다. 정년이후 늘그막에 제2의 유통기한 향유를 위한 최소필수조건은 뭘까? 우선 두 가지를 들고 싶다. 그 하나는 그나마 몸이 기본적 활동을 뒷받침해줘야 할 게다. 병들어 누워 있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고 했다. 나이 들어 다소간 몸에 불편함이 있어 전 같지 않거나 상비약을 복용해야하는 건 그냥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늙으니까 어딘가 아픈 건 당연하다. 함부로 병원 찾아가서 몸을 수선할 일이 아니다. 그냥 몸이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노년의 삶일 게다.
다른 하나는 최소한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어떤 형태로건 뭔가 보탬을 주는 삶이어야 할 게다. 이른바 불학에서 말하는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 삶이다. 여기 ‘자리’(自利)는 자칫 다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끼치는 ‘이기’(利己)와는 사뭇 다른 삶이다. 다른 사람을 개입 시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기를 이롭게 하는 삶이다. 전형적으로 수행(修行)으로서의 삶 혹은 공부하는 삶이 ‘자리적 삶’에 해당 될 게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자리’가 깊어지는 동안에 간접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삶이라면 더 할 나위 없다. 여기 ‘자리이타적’ 삶에서 그 체(體)는 언제나 ‘자리’이고, 그 용(用)으로 따라 붙는 게 ‘이타’다. 늘그막에 세상을 구하겠다고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다. 남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부담 주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줄 알아야 한다.
노익장을 과시하느라 노년에 ‘이타’ 쪽으로 욕심내면 ‘노욕’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그냥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삶에 신명을 쏟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삶의 향기가 미치게 된다면 금상첨화다. 그게 노년의 향기(香氣)일 터. 그러고 보니 내가 말하는 늘어난 삶의 유통기한 ‘조건’으로 최소필수조건이란 게 ‘최소’로는 너무 엄격하고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이 값하기가 어려운가보다.